지난 1948년 12월 1일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이 오늘로 60년을 맞았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 사람 수는 줄어드는 추세지만 피해자들의 몸과 마음에 입은 상처는 깊기만 하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사이버모욕죄와 통신비밀보호법, 국정원 권한 강화 등 각종 유사 국보법안들이 발의되고 있다. “막걸리를 먹으며 정부비판을 했다는 이유로 잡혀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해서 붙여진 ‘막걸리법’의 악명을 되찾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제2, 제3의 함주명 더는 생기지 않길” =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살고 있는 함주명(77·사진)씨는 목이 메 말을 잇지 못했다. 3년 전 ‘그 날’이 그에겐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눈가가 붉게 젖어들었다.
함씨는 간첩죄 판결이 재심에서 뒤집힌 첫 번째 주인공이다. 6·25 당시 그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북한에 의용병으로 징집됐다. 그리고 23살이 되던 1954년 4월 헤어진 가족과 만나기 위해 남파간첩을 자처, 휴전선을 넘자마자 자수했다. 돌아오긴 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함씨는 30년 가까이 분식점과 사진관 점원, 빈병수집, 막노동 등을 전전했다. 비록 직장을 구하거나 혼사 이야기가 오갈 때마다 ‘간첩’ 꼬리표 때문에 번번이 좌절해야 했지만 그때까지 국가보안법은 그에게 ‘불편한 법’ 이상은 아니었다.
함씨와 국가보안법의 진짜 악연은 30년 후인 1983년 2월 18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 앞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에게 납치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만난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63일 동안 함씨에게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각종 고문과 구타, 협박을 거듭하며 그를 ‘위장 자수한 고정간첩’으로 만들었다.
재판도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상소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반공법(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은 그는 전주 교도소에서 9년, 광주 교도소에서 7년을 보내고 환갑이 한참 지난 1998년 8월 15일 특사로 풀려났다. 그동안 아내는 ‘간첩 마누라’가 돼 동네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막내아들은 ‘간첩자식’으로 몰려 결혼에 실패했다.
다행히 1999년 이근안은 구속됐다. 그는 지난 2005년 7월 15일 재심에서 간첩죄를 벗었다. 그러나 함씨는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3년째 매일 5번씩 혈당을 체크하며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감옥살이 때 얻은 당뇨, 동맥경화 등의 지병과 싸우고 있다. 늦은 밤에도 남영동 대공분실의 악몽 때문에 “자다가 벌떡벌떡 깨는” 일이 잦다. 그때마다 부인이 깨서 손발을 주물러주면 겨우 다시 잠들곤 한다.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지 60년, 그는 누명을 벗었지만 상처는 그대로다.
◆40년 한은 풀었지만 상처는 그대로 =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 살고 있는 강대광(67)씨의 상처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968년 7월 연평도 해상에서 ‘태영호’를 타고 병치잡이를 하던 중 북한 경비정에 나포됐다 억류된 지 4개월 만에 풀려난 그와 당시 선원들은 ‘자진월북’ 혐의로 두달이 넘도록 갖은 혹독한 고문수사를 받았다.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지만 낙인은 그대로였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 낯선 사람들이 집을 수시로 다녀갔다. TV를 보고 있기만 해도 문 밖에 앉아서 귀를 대고 있기 일쑤였다. 이렇게 감시당하는 생활을 10년간 했다.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이게 다 못 배운 탓이려니’ 했던 강씨는 이웃 5명과 자식교육을 위해 계모임을 만들었다. 그러다 1978년 12월 16일 다시 경찰에 불려간 그는 첫날부터 알몸이 돼 고무호스로 맞았다. 경찰들은 사흘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조서작성을 강요했다. 물고문과 전기고문은 예사였다.
그는 이런 식으로 39일 동안 경찰서와 대공분실, 여관을 오가며 고문·구타·협박을 당했다. 결국 강씨는 친구들과 ‘북한 탈출 시도’ ‘북한 고무찬양’ 등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만기 1년 전인 1987년 12월 석방됐다. 집안은 엉망이 됐다. 5남매 자녀 가운데 한 명은 학교 친구들로부터 하도 많이 맞아 석달 동안 등교를 안 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7월 9일 전주지법 정읍지원 재심 선고공판에서 결국 무죄를 선고받은 강씨는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며 “그 때 멀어진 이웃들과는 아직도 서로 피해 다닌다”고 호소했다. 누명은 벗었지만 국가보안법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를 따라다니고 있다.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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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사이버모욕죄와 통신비밀보호법, 국정원 권한 강화 등 각종 유사 국보법안들이 발의되고 있다. “막걸리를 먹으며 정부비판을 했다는 이유로 잡혀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해서 붙여진 ‘막걸리법’의 악명을 되찾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제2, 제3의 함주명 더는 생기지 않길” =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살고 있는 함주명(77·사진)씨는 목이 메 말을 잇지 못했다. 3년 전 ‘그 날’이 그에겐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눈가가 붉게 젖어들었다.
함씨는 간첩죄 판결이 재심에서 뒤집힌 첫 번째 주인공이다. 6·25 당시 그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북한에 의용병으로 징집됐다. 그리고 23살이 되던 1954년 4월 헤어진 가족과 만나기 위해 남파간첩을 자처, 휴전선을 넘자마자 자수했다. 돌아오긴 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함씨는 30년 가까이 분식점과 사진관 점원, 빈병수집, 막노동 등을 전전했다. 비록 직장을 구하거나 혼사 이야기가 오갈 때마다 ‘간첩’ 꼬리표 때문에 번번이 좌절해야 했지만 그때까지 국가보안법은 그에게 ‘불편한 법’ 이상은 아니었다.
함씨와 국가보안법의 진짜 악연은 30년 후인 1983년 2월 18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 앞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에게 납치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만난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63일 동안 함씨에게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각종 고문과 구타, 협박을 거듭하며 그를 ‘위장 자수한 고정간첩’으로 만들었다.
재판도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상소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반공법(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은 그는 전주 교도소에서 9년, 광주 교도소에서 7년을 보내고 환갑이 한참 지난 1998년 8월 15일 특사로 풀려났다. 그동안 아내는 ‘간첩 마누라’가 돼 동네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막내아들은 ‘간첩자식’으로 몰려 결혼에 실패했다.
다행히 1999년 이근안은 구속됐다. 그는 지난 2005년 7월 15일 재심에서 간첩죄를 벗었다. 그러나 함씨는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3년째 매일 5번씩 혈당을 체크하며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감옥살이 때 얻은 당뇨, 동맥경화 등의 지병과 싸우고 있다. 늦은 밤에도 남영동 대공분실의 악몽 때문에 “자다가 벌떡벌떡 깨는” 일이 잦다. 그때마다 부인이 깨서 손발을 주물러주면 겨우 다시 잠들곤 한다.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지 60년, 그는 누명을 벗었지만 상처는 그대로다.
◆40년 한은 풀었지만 상처는 그대로 =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 살고 있는 강대광(67)씨의 상처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968년 7월 연평도 해상에서 ‘태영호’를 타고 병치잡이를 하던 중 북한 경비정에 나포됐다 억류된 지 4개월 만에 풀려난 그와 당시 선원들은 ‘자진월북’ 혐의로 두달이 넘도록 갖은 혹독한 고문수사를 받았다.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지만 낙인은 그대로였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 낯선 사람들이 집을 수시로 다녀갔다. TV를 보고 있기만 해도 문 밖에 앉아서 귀를 대고 있기 일쑤였다. 이렇게 감시당하는 생활을 10년간 했다.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이게 다 못 배운 탓이려니’ 했던 강씨는 이웃 5명과 자식교육을 위해 계모임을 만들었다. 그러다 1978년 12월 16일 다시 경찰에 불려간 그는 첫날부터 알몸이 돼 고무호스로 맞았다. 경찰들은 사흘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조서작성을 강요했다. 물고문과 전기고문은 예사였다.
그는 이런 식으로 39일 동안 경찰서와 대공분실, 여관을 오가며 고문·구타·협박을 당했다. 결국 강씨는 친구들과 ‘북한 탈출 시도’ ‘북한 고무찬양’ 등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만기 1년 전인 1987년 12월 석방됐다. 집안은 엉망이 됐다. 5남매 자녀 가운데 한 명은 학교 친구들로부터 하도 많이 맞아 석달 동안 등교를 안 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7월 9일 전주지법 정읍지원 재심 선고공판에서 결국 무죄를 선고받은 강씨는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며 “그 때 멀어진 이웃들과는 아직도 서로 피해 다닌다”고 호소했다. 누명은 벗었지만 국가보안법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를 따라다니고 있다.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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