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김용택의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줄 것이다’

세상에 보내는 응원과 위로의 시

지역내일 2008-11-21
38년 교편생활, 60년 인생 반추하며 70편 엮어내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줄 것이다
김용택 엮음 / 마음의숲 / 7000원

겨울이 왔다. 전국시대의 지혜를 모은 ‘여씨춘추’는 겨울에 들어서는 달에 하늘의 양기는 올라가고 땅의 음기는 내려가 하늘의 기와 땅의 기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주역의 천지비(天地否), 소통이 사라지는 때다.
나뭇가지에 아직 걸린 잎들을 본다. 물 흐름이 막혀 파삭파삭 마른 잎들. 잠시 동안 화려했던 분장이 더욱 덧없다. ‘여씨춘추’는 이 달의 시령(時令)에서 이렇게 충고한다. “잘못된 일을 덮어 감추는 일이 없도록 한다.” 추위는 적어도 나목(裸木)의 진실을 동행한다.
모든 것이 추락하고 있다. 그런데 이 큰 상실의 고통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예감이 더욱 무겁게 짓누른다. 경제정책의 책임자는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에 ‘1회 초’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작은 위안이라도 소중한 시절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의 입구에 들어서서 서로 손을 잡고, 격려의 말을 나누며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나아가야 하는 장면인 것이다.
시인 김용택이 엮은 시 선집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줄 것이다’에 대해 출판사의 책 소개는 시대의 아픔에 대한 위로를 강조한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는 일이 힘들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길을 택하는 요즈음… 사람들에게 보내는 응원과 위로의 시들을” 엮었다고 알린다.
엮은이의 ‘서문을 대신해’에도 그런 기분이 읽힌다. “삶의 길이 끊기고, 사라질 때마다 캄캄한 어둠을 더듬어 읽던 시/그 시들, 내 삶에 해답을 가져다주던 시들을 모아/당신에게 보낸다.”
그런데 시에게 과연 그런 위로의 힘이 있는가? 이 배금주의의 시대에 목숨 같이 아끼던 재산을 날리고, 일자리를 빼앗기고, 가정이 풍비박산이 된 사람들에게 시가 줄 수 있는 위로라는 건 기껏 공허한 울림은 아닌가?
사실 시인이 조롱거리가 된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보들레르는 동양으로 가는 배 위에서 기품 있는 큰 바닷새 알바트로스가 사로잡혀 뒤뚱거리는 모습에서 지상에 유배된 시인의 자화상을 보았지만, 실용주의라는 비정의 땅에 추락한 시가 제대로 걸음을 옮길 수 있겠는가?
나치의 수용소에 갇혔던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랑클이 생각난다. 그는 지옥의 고통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을 찾아냈다.
이 절망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강건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생존자는 자기가 겪고 있는 상황과 인생의 깊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었던 이들이었다.
근원과 그 의미를 노래하는 것, 그건 바로 시의 본질적 기능이다. 시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는 “세계는 시가 없어 매일 죽어간다”고 했지만 시 정신은 세계의 심장과 함께 뛴다.
나는 바로 그런 기분으로 이 시집을 펼치고 싶다. 가령 이 시집에 실린 괴테의 시 ‘용기’는 거침없이 이렇게 선언한다. “신선한 공기, 빛나는 태양,/맑은 물, 그리고/친구들의 사랑/이것만 있거든 낙심하지 마라.”
나무는 잎이 떨어졌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벌거벗은 나무는 당당하다. 생명에 본질적인 요소는 공기와 물, 태양과 사랑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은 너무 이르다.
가령 ‘당신은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작자 미상)는 이렇게 시작한다. “만약 지는 해를 바라보며 미소 지을 수 있다면,/당신은 아직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만약 당신이 작은 꽃송이의 빛깔에서/아름다움을 찾는다면,/당신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애완동물의 부드러운 털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가? 다른 사람의 고통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가? 저녁 식탁을 꾸밀 작은 장식품을 사는가? 그러면 아직 희망이 있다고 이 시는 격려한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70편쯤의 시 가운데 내 마음을 가장 따뜻하게 덥힌 건 이상국의 ‘국수가 먹고 싶다’였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길거리에 나서면/고향 장거리 길로/소 팔고 돌아오듯/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국수를 먹고 싶다.”
사람들은 뒷모습이 슬프다. 앞에서 보면 폭군과 같은 사람들도 뒤에서 보면 연약하고 처량한 존재일 뿐이다. 이 “허전함”에서 모든 사람들은 다를 바가 없다.
이 시는 이렇게 끝난다.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눈물자국 때문에/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어딘지 동체대비(同體大悲)의 큰 울림이 있다.
지구가 기우뚱한 각도로 태양을 도는 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은 필연이다. 계절의 순환이 어쩔 수 없듯이 자본주의 경제에서 경기순환의 불확실성은 인간 능력 밖이다. 운명을 사랑하라는 철인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봄은 또 올 테고.
이 시집에는 포함돼 있지 않지만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으로 이 글을 끝맺고 싶다. 옛날 물질적으로 정말 가난했던 시절 우리의 아픔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나’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에 아내도 집도 잃고, 부모형제도 멀리 떨어진 채 목수네 집 헌 삿(갈대를 엮어 만든 자리)을 깐 방 하나를 얻고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굿한” 방에서 누워 뒹굴면서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려 죽을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그러다가 여러 날이 지나면서 세상은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 자기를 마음대로 굴려간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박순철 전 문화일보 논설위원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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