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희망이다 - ‘시화호 지킴이’ 최종인씨
제목 : “다시는 이런 잘못 되풀이 말아야죠”
부제 : 시화호와 함께 한 15년 세월 … “최근 주변 개발로 또 걱정”
최종인(55)씨를 만난 곳은 그가 근무하는 안산시청 작은 사무실이었다. 한눈에도 상당한 고가의 카메라와 동영상 카메라를 가득 들고 서 있는 그를 사무실 문 앞에서 만났다.
사무실 안은 예상대로 시화호와 관련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수많은 비디오테이프가 정리돼 있고 벽면에는 그가 찍은 시화호 사진들이 붙어있었다.
‘시화호 지킴이’. 세상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준 또 하나의 이름이다.
◆운명처럼 만난 환경지킴이와 시화호 =
최종인씨가 처음 시화호와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 인연은 지난 1989년 안산으로 이사오면서 부터다.
어린 시절 시작한 전기 기술에 인생을 걸었지만 사업은 연이어 실패를 거듭한 후였다. 그렇게 찾아든 곳이 안산이었고 바닷가가 있는 안산은 그에게 하나의 위안이었다.
그가 안산에 들어올 쯤 환경운동도 슬며시 찾아왔다. 안산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하던 90년대 초반 송파구에서 발생한 민원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환경운동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화장실 물이 그대로 하수종말처리장으로 가면서 악취가 발생한 민원이었다.
당시 공해추방운동본부와의 인연을 시작으로 93년 환경운동연합에 정식으로 참여했다. 자연스럽게 환경운동연합 안산 통신원으로 자리잡게 됐고 이런 인연은 자연스럽게 방조제가 건설되는 시화호로 그를 이끌었다.
“94년 방조제가 만들어진 후 찾아간 시화호는 썩은 생선냄새로 진동했어요. 이미 공사가 진행되던 91년부터 갯벌의 물이 눈에 띄게 빠지고 있었습니다.” 최악의 환경사태였던 시화호 사태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 때부터 최씨는 정신없이 이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수없이 죽어 떠오르는 물고기와 조개류 등 시화호는 말 그대로 간장색의 ‘죽음의 호수’로 변해갔다. 1997년 환경부 조사로 시화호의 화학적 산소요구량은 17.4ppm이었다. 대부분의 생명체가 서식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일부에서는 시화호 주변의 오염물질이 결정적이라고 하지만 결정적으로 시화호를 죽인 것은 죽은 갯벌 속에서 죽어간 수천만마리의 생물체였습니다. 생물체의 썩은 물질이 시화호의 60%를 죽였다고 보면 됩니다.”
결국 정부는 시화호 담수화 계획을 포기했다. 바닷물을 막은 거대한 간석지에 농업단지와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담수호를 통해 용수를 공급한다는 개발 논리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1997년 사실상 바닷물 유통이 시작됐다. 99년 2월에 조개 바지락 등이 조금씩 살아났다. 2002년도에는 시화호 상류까지 숭어들이 살기 시작했다. 시화호가 새로운 생명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시민단체 활동가에서 공무원으로 =
시화호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최씨는 94년 본격적으로 시화호에 살리기에 나섰다. 부상당한 새들을 세 들어 사는 집 옥상에서 돌보기도 하고 시화호를 죽이는 온갖 인간들의 행위에 맞섰다. 1994년에는 안산환경운동연합 창립 멤버로 참여, 이후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안산시청에게 최씨는 골치아픈 민원인이었다. 매일 같이 새로운 고발꺼리를 들고 시청에 달려왔다. 이런 그를 눈여겨 본 이가 있었다. 당시 박강호 안산시 환경과장이 밤에는 공공근로, 낮에는 시화호로 달려가는 그를 보고 아예 공무원으로 일할 것을 권했다. 최씨는 이를 받아들여 99년 일용직으로 안산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2004년에는 전문직 공무원으로 전환해 현재까지 안산시 지구환경과에서 근무하고 있다.
시민단체 활동을 하던 그가 공무원으로 변신하면서 힘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정신적으로 고통이 심하죠. 아직도 부딪히는 게 많아요. 협의과정이 힘들어요.” 하지만 얻은 것도 많다. 시민단체 회원으로 부정적으로 보던 공무원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 물론 공무원들도 시민단체 활동가였던 그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
공무원이 됐다 해도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시간의 대부분을 시화호에서 보내고 있다. 사진을 찍고 새들을 보호하고 환경오염을 감시하는 역할은 그의 몫이다.
◆“시화호 이름을 바꾸고 싶다” =
이제 시화호는 더 이상 죽음의 호수가 아니다. 최씨의 말처럼 “물반 고기반”이라고 할 정도로 물고기가 넘쳐난다. 잠수부가 들어가면 소라를 수없이 건져낸다.
하지만 아직 그가 가야할 길은 멀다. “시화호는 지금 살아났어요.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어찌보면 시화호는 지금 가장 큰 짐을 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화호는 요즘 때 아닌 개발에 몸살을 앓고 있다. 주변에 골프장 5개가 들어서고 북측엔 시화 멀티테크노밸리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남측엔 농경지가 조성되고 있다. “당장 갈대가 걱정입니다. 정화작용으로 시화호를 지켜주던 갈대가 개발과정에서 없어지면 오염물질이 다시 시화호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는 최근 이름이 알려지면서 이러 저러한 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자신이 겪은 일들, 환경에 대한 생각 등을 이들에게 알린다. 무리한 개발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그들에게 알리고 있다.
요즘 최종인씨는 시화호의 이름을 바꾸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시화호는 원래 시흥시와 화성시의 합성어다. “이름에 목적이 없어요. 죽었다 다시 살아난 호수라는 뜻이 담긴, 다시는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의 이름을 만들고 싶어요.”
이 때문에 최근 논란을 빚는 경인운하나 대운하도 그에게는 근심거리다. “너무 급해요. 100년을 보면서 진행해야 합니다. 당장 일자리 창출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잖아요.”
윤여운 기자 yuyoon@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제목 : “다시는 이런 잘못 되풀이 말아야죠”
부제 : 시화호와 함께 한 15년 세월 … “최근 주변 개발로 또 걱정”
최종인(55)씨를 만난 곳은 그가 근무하는 안산시청 작은 사무실이었다. 한눈에도 상당한 고가의 카메라와 동영상 카메라를 가득 들고 서 있는 그를 사무실 문 앞에서 만났다.
사무실 안은 예상대로 시화호와 관련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수많은 비디오테이프가 정리돼 있고 벽면에는 그가 찍은 시화호 사진들이 붙어있었다.
‘시화호 지킴이’. 세상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준 또 하나의 이름이다.
◆운명처럼 만난 환경지킴이와 시화호 =
최종인씨가 처음 시화호와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 인연은 지난 1989년 안산으로 이사오면서 부터다.
어린 시절 시작한 전기 기술에 인생을 걸었지만 사업은 연이어 실패를 거듭한 후였다. 그렇게 찾아든 곳이 안산이었고 바닷가가 있는 안산은 그에게 하나의 위안이었다.
그가 안산에 들어올 쯤 환경운동도 슬며시 찾아왔다. 안산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하던 90년대 초반 송파구에서 발생한 민원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환경운동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화장실 물이 그대로 하수종말처리장으로 가면서 악취가 발생한 민원이었다.
당시 공해추방운동본부와의 인연을 시작으로 93년 환경운동연합에 정식으로 참여했다. 자연스럽게 환경운동연합 안산 통신원으로 자리잡게 됐고 이런 인연은 자연스럽게 방조제가 건설되는 시화호로 그를 이끌었다.
“94년 방조제가 만들어진 후 찾아간 시화호는 썩은 생선냄새로 진동했어요. 이미 공사가 진행되던 91년부터 갯벌의 물이 눈에 띄게 빠지고 있었습니다.” 최악의 환경사태였던 시화호 사태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 때부터 최씨는 정신없이 이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수없이 죽어 떠오르는 물고기와 조개류 등 시화호는 말 그대로 간장색의 ‘죽음의 호수’로 변해갔다. 1997년 환경부 조사로 시화호의 화학적 산소요구량은 17.4ppm이었다. 대부분의 생명체가 서식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일부에서는 시화호 주변의 오염물질이 결정적이라고 하지만 결정적으로 시화호를 죽인 것은 죽은 갯벌 속에서 죽어간 수천만마리의 생물체였습니다. 생물체의 썩은 물질이 시화호의 60%를 죽였다고 보면 됩니다.”
결국 정부는 시화호 담수화 계획을 포기했다. 바닷물을 막은 거대한 간석지에 농업단지와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담수호를 통해 용수를 공급한다는 개발 논리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1997년 사실상 바닷물 유통이 시작됐다. 99년 2월에 조개 바지락 등이 조금씩 살아났다. 2002년도에는 시화호 상류까지 숭어들이 살기 시작했다. 시화호가 새로운 생명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시민단체 활동가에서 공무원으로 =
시화호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최씨는 94년 본격적으로 시화호에 살리기에 나섰다. 부상당한 새들을 세 들어 사는 집 옥상에서 돌보기도 하고 시화호를 죽이는 온갖 인간들의 행위에 맞섰다. 1994년에는 안산환경운동연합 창립 멤버로 참여, 이후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안산시청에게 최씨는 골치아픈 민원인이었다. 매일 같이 새로운 고발꺼리를 들고 시청에 달려왔다. 이런 그를 눈여겨 본 이가 있었다. 당시 박강호 안산시 환경과장이 밤에는 공공근로, 낮에는 시화호로 달려가는 그를 보고 아예 공무원으로 일할 것을 권했다. 최씨는 이를 받아들여 99년 일용직으로 안산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2004년에는 전문직 공무원으로 전환해 현재까지 안산시 지구환경과에서 근무하고 있다.
시민단체 활동을 하던 그가 공무원으로 변신하면서 힘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정신적으로 고통이 심하죠. 아직도 부딪히는 게 많아요. 협의과정이 힘들어요.” 하지만 얻은 것도 많다. 시민단체 회원으로 부정적으로 보던 공무원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 물론 공무원들도 시민단체 활동가였던 그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
공무원이 됐다 해도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시간의 대부분을 시화호에서 보내고 있다. 사진을 찍고 새들을 보호하고 환경오염을 감시하는 역할은 그의 몫이다.
◆“시화호 이름을 바꾸고 싶다” =
이제 시화호는 더 이상 죽음의 호수가 아니다. 최씨의 말처럼 “물반 고기반”이라고 할 정도로 물고기가 넘쳐난다. 잠수부가 들어가면 소라를 수없이 건져낸다.
하지만 아직 그가 가야할 길은 멀다. “시화호는 지금 살아났어요.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어찌보면 시화호는 지금 가장 큰 짐을 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화호는 요즘 때 아닌 개발에 몸살을 앓고 있다. 주변에 골프장 5개가 들어서고 북측엔 시화 멀티테크노밸리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남측엔 농경지가 조성되고 있다. “당장 갈대가 걱정입니다. 정화작용으로 시화호를 지켜주던 갈대가 개발과정에서 없어지면 오염물질이 다시 시화호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는 최근 이름이 알려지면서 이러 저러한 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자신이 겪은 일들, 환경에 대한 생각 등을 이들에게 알린다. 무리한 개발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그들에게 알리고 있다.
요즘 최종인씨는 시화호의 이름을 바꾸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시화호는 원래 시흥시와 화성시의 합성어다. “이름에 목적이 없어요. 죽었다 다시 살아난 호수라는 뜻이 담긴, 다시는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의 이름을 만들고 싶어요.”
이 때문에 최근 논란을 빚는 경인운하나 대운하도 그에게는 근심거리다. “너무 급해요. 100년을 보면서 진행해야 합니다. 당장 일자리 창출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잖아요.”
윤여운 기자 yuyoon@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