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산(嵩山)! 원래 금오산을 (남)숭산이라 불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지금은 칠곡군 북삼면 숭오리의 일부로 포함된 숭산 마을은 김천시 아포읍의 숭산 마을과 함께 금오산의 옛이름을 간직한 같은 이름의 2개 마을이다.
숭산 마을은 대각국사의 비석이 발견되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아포의 숭산마을은 금오산 자락은 아니지만 ‘주천자 탄생 설화’를 간직한 마을이다. 금오산 일대에는 중국 명나라의 건국시조인 주원장(朱元璋·1328년∼1398년)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중국의 천자가 한국 땅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허황된 이야기이다. 그러나 주천자 탄생담은 한국의 여러 곳에서 전승되었다. 인물이 많이 난다는 금오산 명기설(名基說)의 확고한 바탕으로 작용하고 있다.
● 총을 맞은 대각국사비
선봉사가 폐허가 되어 대각국사비는 오랜 세월 땅에 묻혀 있었다. 숭산마을 어느 주민이 현몽하여 대각국사비를 찾았다고 한다.
그 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비석에는 총탄 자국이 남게 되었다. 수 백년 땅 속에 묻혔다가 빛을 본 뒤 얼마 만에 총알받이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이겠는가.
또 하나 알수 없는 일은 천태종의 시조의 유적이 있는 곳인데도 천태종단에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연전에 만난 선봉사 주지께서는 천태종의 성지의 모습을 갖추는 불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 일제(日帝)가 베어간 당산목
수점마을 하당(下堂·아랫당), 갈항마을 하당이 신목(神木)과 조산무지로 이루어졌듯이 숭산마을 입구에 있는 하당도 돌무더기의 흔적과 나무가 있다. 원래 길 양쪽에 두 그루의 거대한 나무가 있었는데 이제는 작은 나무 한 그루만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
그 연유를 들어보니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일본군들이 배를 만드는 재료로 쓸려고 나무 한 그루를 베어 갔다. 서슬 퍼런 왜놈들 등쌀에 다들 숨죽여 살던 시절이었지만 주민들은 칠곡군청으로 달려가 거세게 항의하고 사과를 받았다”고 한다.
잊혀져 가는 우리 지역 근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누가 언제부터인지 알 수가 없으나 민중의 믿음의 체계로 자리 잡았던 이른바 민중신앙은 특히 근현대에 갖가지 이유로 훼손되고 제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인근에서는 보기 드물게 감나무가 흔한 숭산 계곡의 초겨울 아침 풍경은 안개가 서려 신비감과 아름다움이 넘친다.
*선봉사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
경북 칠곡군 북삼면 숭오리(崇烏里) 선봉사에 있는 고려시대 대각국사의 화강석 비석(보물 제251호)이다.
귀부대석(龜趺臺石) 크기 1.97m, 너비 1.82m, 이수 높이 0.56m. 비석의 조형은 간략하여 복련(覆蓮·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과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을 각출(刻出)한 직사각형의 대석 위에 비신(碑身)을 세웠고, 둘레에 당초문(唐草紋)을 새긴 개석(蓋石)을 얹었다.
비문은 표면과 이면에 모두 있으며 제액(題額)은 ‘천태시조대각국사비명(天臺始祖大覺國師碑銘)’으로 지은이는 임존(林存), 글씨는 승린(僧麟)의 전서(篆書)이다.
권이문 금오문화연구소 연구원
지금은 칠곡군 북삼면 숭오리의 일부로 포함된 숭산 마을은 김천시 아포읍의 숭산 마을과 함께 금오산의 옛이름을 간직한 같은 이름의 2개 마을이다.
숭산 마을은 대각국사의 비석이 발견되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아포의 숭산마을은 금오산 자락은 아니지만 ‘주천자 탄생 설화’를 간직한 마을이다. 금오산 일대에는 중국 명나라의 건국시조인 주원장(朱元璋·1328년∼1398년)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중국의 천자가 한국 땅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허황된 이야기이다. 그러나 주천자 탄생담은 한국의 여러 곳에서 전승되었다. 인물이 많이 난다는 금오산 명기설(名基說)의 확고한 바탕으로 작용하고 있다.
● 총을 맞은 대각국사비
선봉사가 폐허가 되어 대각국사비는 오랜 세월 땅에 묻혀 있었다. 숭산마을 어느 주민이 현몽하여 대각국사비를 찾았다고 한다.
그 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비석에는 총탄 자국이 남게 되었다. 수 백년 땅 속에 묻혔다가 빛을 본 뒤 얼마 만에 총알받이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이겠는가.
또 하나 알수 없는 일은 천태종의 시조의 유적이 있는 곳인데도 천태종단에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연전에 만난 선봉사 주지께서는 천태종의 성지의 모습을 갖추는 불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 일제(日帝)가 베어간 당산목
수점마을 하당(下堂·아랫당), 갈항마을 하당이 신목(神木)과 조산무지로 이루어졌듯이 숭산마을 입구에 있는 하당도 돌무더기의 흔적과 나무가 있다. 원래 길 양쪽에 두 그루의 거대한 나무가 있었는데 이제는 작은 나무 한 그루만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
그 연유를 들어보니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일본군들이 배를 만드는 재료로 쓸려고 나무 한 그루를 베어 갔다. 서슬 퍼런 왜놈들 등쌀에 다들 숨죽여 살던 시절이었지만 주민들은 칠곡군청으로 달려가 거세게 항의하고 사과를 받았다”고 한다.
잊혀져 가는 우리 지역 근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누가 언제부터인지 알 수가 없으나 민중의 믿음의 체계로 자리 잡았던 이른바 민중신앙은 특히 근현대에 갖가지 이유로 훼손되고 제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인근에서는 보기 드물게 감나무가 흔한 숭산 계곡의 초겨울 아침 풍경은 안개가 서려 신비감과 아름다움이 넘친다.
*선봉사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
경북 칠곡군 북삼면 숭오리(崇烏里) 선봉사에 있는 고려시대 대각국사의 화강석 비석(보물 제251호)이다.
귀부대석(龜趺臺石) 크기 1.97m, 너비 1.82m, 이수 높이 0.56m. 비석의 조형은 간략하여 복련(覆蓮·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과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을 각출(刻出)한 직사각형의 대석 위에 비신(碑身)을 세웠고, 둘레에 당초문(唐草紋)을 새긴 개석(蓋石)을 얹었다.
비문은 표면과 이면에 모두 있으며 제액(題額)은 ‘천태시조대각국사비명(天臺始祖大覺國師碑銘)’으로 지은이는 임존(林存), 글씨는 승린(僧麟)의 전서(篆書)이다.
권이문 금오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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