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권은 행정구역으로 가를 수 없다.
금오산은 우리 구미시, 김천시, 칠곡군 3개 시군에 걸쳐 있다. 따라서 각 자치단체는 자신의 행정구역에 포함된 지역에만 관심을 표명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행정구역의 구분과 같이 나누어지지 않는다. 금오산 자락의 여러 마을들은 각기 독자적인 마을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평야지대의 마을들과는 사뭇 다른 금오산 문화권의 모습을 공통으로 지니기도 하였다.
금오산이 품은 마을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적어봐도 남통, 덤바우, 수점(이상 구미시), 갈항, 우장, 부상, 지경(김천시), 숭산, 강진(칠곡군) 등이다. 이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지난 세월 금오산의 그늘에서 금오산과 밀접한 삶을 산 사람들이다.
남통은 금오산집단시설지구의 건립으로 대부분의 민가들이 철거되고 집단시설지구 또는 시내로 이주하여 옛모습을 추정하기 어렵다. 다만 법성사골에 남은 한 두 가옥을 통해 예전의 모습을 더듬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산자락에 드문드문 집 자리를 마련하고 경사지에 밭을 장만하여 산에 기대어 산 모습을 짐작할 수가 있다.
갈항사! 꽤 유명한 절이다.
지금의 궁색한 갈항사는 폐허가 되었던 옛 갈항사 인근에 새로이 조성된 절이다. 원래의 갈항사는 서울로 간 동탑, 서탑의 위상과 석조 석가여래좌상으로 유명하다.
갈항사를 따로 보면 그냥 꽤 큰절이 폐허가 되었구나 하지만, 금오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18개의 절터와 관련시켜 보면 금오산 서쪽을 관장하는 절로서 의미를 추측 할 수가 있다.
그 반대편인 금오산 동쪽 자락에는 옥림사지가 있다. 북쪽에는 대혈사지, 남쪽에는 선봉사지, 사방에 금오산를 호위하는 사찰이 있었다고 감히 상상해 본다.
갈항마을의 아름다움이 갈항사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늘 갈항에서 바라보는 금오산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아름다운 금오산의 모습을 조망할 수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고속전철 건설공사로 마을의 모습이 일그러지고 있으나 동구에 자리잡은 온전한 모습의 조산(造山)무지(돌무더기탑), 산골 민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토담집들, 자동차 도로가 제대로 닦여있지 않았던 90년대 초중반의 갈항은 도심에서 멀지 않으면서 산골의 서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고개마루의 서낭당.
갈항을 포함한 행정동인 오봉리는 겨울 철새가 날아드는 오봉저수지, 그 곁의 금오산초등학교 분교 등 연인들의 발길을 끄는 곳이 더러 있어 최근 드라이브족의 모습을 간혹 볼 수가 있다.
갈항에서 걸어보지 못한 길이 아직 하나 남아있다. 차가 다니지 못하는 부상으로 넘어가는 산길이다. 다음 여행에는 꼭 한번 걸어 넘어야지.
■갈항사지(葛項寺址)
김천시 남면 오봉동(梧鳳洞)에 있었던 갈항사의 절터이다.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 승전(勝詮)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건립 연대와 폐사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서 승전은 승도(僧徒)를 거느리고 《화엄경(華嚴經)》을 강설하였다. 절터에 남아 있던 2기의 3층 석탑(국보 99호)은 경복궁으로 옮기고, 현재 이 절터에는 오봉동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245호) 및 쌍탑(雙塔)을 옮긴 포석 2기가 있을 뿐, 밭으로 변하였으며, 간혹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
■갈항사 삼층석탑(葛項寺 三層石塔)
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2기의 화강석제 3층 석탑.
국보 제99호이며 ‘갈항사지쌍탑’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높이는 동탑이 4.3m, 서탑이 4m. 원래 김천시 남면 갈항사에 있던 것을 1916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모두 2중의 기단 위에 같은 규모와 구조로 세운 3층 석탑이다.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고, 동탑은 3층의 옥개석이 없다. 기단부는 몇 개의 석재로 구성하였고 탑신부는 옥신(屋身) 및 옥개를 각각 1장의 돌로 만들었다. 그 규모는 크지 않으나 2중 기단의 상·하층에 탱주(撑柱) 2개씩을 세운 점을 비롯하여 각 부분의 구성은 통일신라 초기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각 부의 균형 잡힌 비례로 안정된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동탑 기단부에 조탑(造塔)의 유래와 연대를 밝힌 명기가 있는 오직 하나의 석탑일 뿐만 아니라, 이두(吏讀)를 사용하여 역사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승전(僧詮, ?~?)
신라의 승려. 당(唐)나라에 가서 현수(賢首) 밑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공부하고 692년(효소왕 1년)에 귀국, 현수의 《화엄소초(華嚴疏抄)》를 의상(義湘)에게 전하였다. 상주 개령군(開寧郡)에 절을 짓고 석촉루(돌 무리)로 관속(官屬·청중)을 삼아 《화엄경》을 강설하는 등 훈련을 쌓아 명강설을 하게 되었는데 《심원장(心源章)》에 따르면 주로 금릉군(金陵郡) 갈항사(葛項寺)에서 강설하였다고 한다.
권이문 금오문화연구소 연구원
금오산은 우리 구미시, 김천시, 칠곡군 3개 시군에 걸쳐 있다. 따라서 각 자치단체는 자신의 행정구역에 포함된 지역에만 관심을 표명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행정구역의 구분과 같이 나누어지지 않는다. 금오산 자락의 여러 마을들은 각기 독자적인 마을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평야지대의 마을들과는 사뭇 다른 금오산 문화권의 모습을 공통으로 지니기도 하였다.
금오산이 품은 마을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적어봐도 남통, 덤바우, 수점(이상 구미시), 갈항, 우장, 부상, 지경(김천시), 숭산, 강진(칠곡군) 등이다. 이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지난 세월 금오산의 그늘에서 금오산과 밀접한 삶을 산 사람들이다.
남통은 금오산집단시설지구의 건립으로 대부분의 민가들이 철거되고 집단시설지구 또는 시내로 이주하여 옛모습을 추정하기 어렵다. 다만 법성사골에 남은 한 두 가옥을 통해 예전의 모습을 더듬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산자락에 드문드문 집 자리를 마련하고 경사지에 밭을 장만하여 산에 기대어 산 모습을 짐작할 수가 있다.
갈항사! 꽤 유명한 절이다.
지금의 궁색한 갈항사는 폐허가 되었던 옛 갈항사 인근에 새로이 조성된 절이다. 원래의 갈항사는 서울로 간 동탑, 서탑의 위상과 석조 석가여래좌상으로 유명하다.
갈항사를 따로 보면 그냥 꽤 큰절이 폐허가 되었구나 하지만, 금오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18개의 절터와 관련시켜 보면 금오산 서쪽을 관장하는 절로서 의미를 추측 할 수가 있다.
그 반대편인 금오산 동쪽 자락에는 옥림사지가 있다. 북쪽에는 대혈사지, 남쪽에는 선봉사지, 사방에 금오산를 호위하는 사찰이 있었다고 감히 상상해 본다.
갈항마을의 아름다움이 갈항사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늘 갈항에서 바라보는 금오산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아름다운 금오산의 모습을 조망할 수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고속전철 건설공사로 마을의 모습이 일그러지고 있으나 동구에 자리잡은 온전한 모습의 조산(造山)무지(돌무더기탑), 산골 민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토담집들, 자동차 도로가 제대로 닦여있지 않았던 90년대 초중반의 갈항은 도심에서 멀지 않으면서 산골의 서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고개마루의 서낭당.
갈항을 포함한 행정동인 오봉리는 겨울 철새가 날아드는 오봉저수지, 그 곁의 금오산초등학교 분교 등 연인들의 발길을 끄는 곳이 더러 있어 최근 드라이브족의 모습을 간혹 볼 수가 있다.
갈항에서 걸어보지 못한 길이 아직 하나 남아있다. 차가 다니지 못하는 부상으로 넘어가는 산길이다. 다음 여행에는 꼭 한번 걸어 넘어야지.
■갈항사지(葛項寺址)
김천시 남면 오봉동(梧鳳洞)에 있었던 갈항사의 절터이다.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 승전(勝詮)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건립 연대와 폐사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서 승전은 승도(僧徒)를 거느리고 《화엄경(華嚴經)》을 강설하였다. 절터에 남아 있던 2기의 3층 석탑(국보 99호)은 경복궁으로 옮기고, 현재 이 절터에는 오봉동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245호) 및 쌍탑(雙塔)을 옮긴 포석 2기가 있을 뿐, 밭으로 변하였으며, 간혹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
■갈항사 삼층석탑(葛項寺 三層石塔)
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2기의 화강석제 3층 석탑.
국보 제99호이며 ‘갈항사지쌍탑’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높이는 동탑이 4.3m, 서탑이 4m. 원래 김천시 남면 갈항사에 있던 것을 1916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모두 2중의 기단 위에 같은 규모와 구조로 세운 3층 석탑이다.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고, 동탑은 3층의 옥개석이 없다. 기단부는 몇 개의 석재로 구성하였고 탑신부는 옥신(屋身) 및 옥개를 각각 1장의 돌로 만들었다. 그 규모는 크지 않으나 2중 기단의 상·하층에 탱주(撑柱) 2개씩을 세운 점을 비롯하여 각 부분의 구성은 통일신라 초기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각 부의 균형 잡힌 비례로 안정된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동탑 기단부에 조탑(造塔)의 유래와 연대를 밝힌 명기가 있는 오직 하나의 석탑일 뿐만 아니라, 이두(吏讀)를 사용하여 역사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승전(僧詮, ?~?)
신라의 승려. 당(唐)나라에 가서 현수(賢首) 밑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공부하고 692년(효소왕 1년)에 귀국, 현수의 《화엄소초(華嚴疏抄)》를 의상(義湘)에게 전하였다. 상주 개령군(開寧郡)에 절을 짓고 석촉루(돌 무리)로 관속(官屬·청중)을 삼아 《화엄경》을 강설하는 등 훈련을 쌓아 명강설을 하게 되었는데 《심원장(心源章)》에 따르면 주로 금릉군(金陵郡) 갈항사(葛項寺)에서 강설하였다고 한다.
권이문 금오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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