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 놓치면 거품” vs “디플레가 더 무서워”
‘출구전략’ 논란이 좀처럼 그치지 않고 있다.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출구전략을 제때 쓰지 못하면 경제에 또 다른 거품이 낄 것이라는 우려와 불완전한 회복세에 찬물을 끼얹으면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고강도 부양책 성과 나타나자 논란 시작 = 출구전략 논의는 금융위기 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국가들이 추진한 전례 없는 고강도 부양책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본격화됐다.
지난 6월 열린 G7재무장관 회의에서 독일 등 일부 유럽국가 재무장관들은 금리인하, 유동성공급, 재정지출 확대조치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을 차단하기 위해 출구전략을 수립해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달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중앙은행 연차총회에서도 국제결제은행(IBS)은 인플레이션 위험성을 지적했다.
국내에서는 이달 들어 논의가 불붙었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9일과 17일 통화정책 완화 기조를 이어갈 뜻을 밝혔다. 그러나 21일 KDI는 ‘경제환경 변화와 정책방향’ 보고서에서 “통화정책 정상화가 적기에 이뤄지지 않을 경우 부작용이 더욱 파괴적일 수 있다”며 출구전략 필요성을 역설했다. 정부는 이에 쐐기를 박았다.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과 이명박 대통령은 각각 26일, 27일 “출구 준비가 이르다”고 입장을 밝혔다.
해외에서는 버냉키 미 FRB의장이 21일 “적절한 시점에 통화량을 흡수하는 출구전략을 갖고 있다”고 밝힌 가운데 호주, 영국 등에서 기준금리 인상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찬성론자들 “미·일을 보라” = 출구전략의 조기 시행 필요성은 시기를 놓칠 경우 부작용이 경제 전반에 걸쳐 보다 심각하게 나타날 것이라는 우려에서 제기됐다.
KDI에 따르면 이미 OECD 선진국들은 1970년대 중반 1차 석유파동 때 취했던 적극적인 경기부양정책으로 발생한 정부부채 때문에 만성적인 적자기조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선진국들처럼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곤 하지만 2009년 GDP의 35% 내외 수준인 국가부채가 2013년에는 50% 수준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등, 재정건전성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통화정책도 정책 정상화가 적기에 이루어지지 못하면 부작용이 더욱 파괴적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 FRB는 2003년 이후 장기간 저금리상태로 유지해 주택가격 버블을 크게 심화시켰으며, 결국 최근 경기침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중앙은행은, 1985년 플라자협정 후 엔화 가치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경기가 하강하고 물가가 안정됨에 따라 목표금리를 크게 인하했으나, 1988년 이후 경기가 회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금리 정상화를 지연시킴으로써 부동산 버블이 심화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경기회복세 불완전”= 반면 출구전략 논의가 시기상조라고 보는 이들은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이 더 문제”라는 입장이다. 거품 낀 경제보다 ‘주저앉은’ 경제가 더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 현재의 경기회복 국면은 추세로 확신하기 어렵다는 시각이다.
지난 5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대비 1.3% 하락하며 3개월 연속 마이너스 증가율을 보였다. 핵심 소비자 물가지수도 전년대비 3.4% 증가에 그쳤다.
메리츠증권 정용택 연구원은 “물가상승률로 파악할 경우 미국은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에 가까운 상태로 보인다”며 “현재 상승세를 타고 있는 상품시장도 3분기에 다시 위축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만큼 자산가격에 거품 낄 우려도 높지 않다”고 밝혔다.
인플레이션 우려가 생각보다 높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중제 토러스증권 연구원은 “은행들의 신용창출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통화공급 과잉보다 디레버리징으로 인한 위험이 더 크다”고 분석했다.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
출구전략조치 뭐가 있나
출구전략의 타이밍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필요성에는 공감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출구전략조치에 어떤 것이 있는지도 관심사다.
일단 시장의 관심이 가장 쏠린 출구전략은 금리인상이다. 최근 한국은행이 유동성을 흡수하는 일부 조치를 취하고 있어 한은이 취할 수 있는 출구전략은 금리인상밖에 없다는 것. 조만간 금리인상 조치가 취해질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시장의 전반적인 예측이지만 변경시기와 속도가 어느 정도 될지에는 비상한 관심을 쏟고 있다.
이와 관련 KDI 조동철 박사는 “최근 단기유동성 지표라고 할 수 있는 본원통화 및 M1 증가율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현상은, 금융시장 참여자가 현재의 금리를 충분히 낮은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방증한다”면서 “현재의 수준에서 부분적인 금리인상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는 ‘긴축기조로의 전환’이라기보다는‘부양강도의 조정’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 외에 가장 간단하게 예상할 수 있는 출구전략은 그동안 취해졌던 비상조치를 원상태로 되돌리는것이다.
금융위기가 본격화된 리먼사태 이후 국제금융시장이 경색되면서 도입됐던 ‘국내은행 차입 외화표시 채무의 원리금 상환에 대한 국가보증’, 은행들의 유동성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은행채 등 위험채권을 한은의 RP 대상 채권으로 편입시켰던 비상조치 등이 일단 가장 먼저 철회 검토될 수 있는 정책으로 꼽힌다.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정책도 도마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중소기업 대출과 관련한 공적 보증기관의 보증, 한은의 총액한도대출한도 확대 등이 축소될 가능성이 언급된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찬성
이종우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지금 시작해야 때 안놓쳐”
“시기상조라는 말은 하기 쉽다. 경기부양의 유혹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종우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출구전략 논의에 ‘적절한 때’란 없다”고 강조했다. 경기 회복 신호가 보이는 지금부터 서서히 출구전략을 강화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거품이 끼었다 터지는 파국이 반복되면서 경제가 전반적으로 망가질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센터장은 “출구전략은 비정상적인 금융상황을 정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라며 “전 세계 80%의 금리가 1% 이하인 지금 상황은 정상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대공황 시절 수준의 초저금리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그 때만큼 경제가 나쁘기 때문인지 의문을 표했다.
이 센터장은 “세계 어느 정부도 버블 붕괴 후 적절한 출구전략을 구사한 전례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경기부양의 유혹 앞에서 거품 다스릴 때를 놓치는 바람에 ‘버블경제’가 지금껏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 이런 현상은 IT버블이 한창이던 10여년 전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반복돼 왔다고 이 센터장은 지적했다.
즉, 1999년부터 2000년 상반기까지 IT혁명에 대한 기대감으로 세계 주식시장은 기록적인 상승세를 기록했다. 그러나 FRB의 소극적인 금리인상정책 때문에 2000년 5월 미국증시는 최고점 대비 30% 가까이 폭락했다. 0.5% 금리인상이라는 FRB의 때늦은 강수로 IT버블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FRB는 이후에도 금리를 1%대까지 급락시켜 경기부양을 도모했다. 결국 유동자금들이 부동산으로 쏠려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낳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200대까지 떨어졌던 코스피지수가 2000년 1월 1000선을 회복했다. 위기 탈출론에 힘이 실렸다. 당시 정부는 경기부양을 이유로 저금리기조를 유지, 세 차례에 걸쳐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그러나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카드 대란까지 겹쳐 1년도 되지 않아 코스피지수는 50% 이상 주저앉았다. 이후 경기가 회복세로 접어들었지만 정부는 수년간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경기부양이 더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이 센터장은 “FRB와 각국 정부의 금리정책 실패는 경기가 저점을 찍은 직후부터 선제적이고 점차적인 출구전략 강화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고 설명했다. 특히 다른 나라에 비해 경제 회복 신호가 빠르게 나타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선제조치가 절실하다는 것. 언젠가 미국, 영국 등에서도 출구전략이 본격화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움직임에 눈치를 보며 보조를 맞추려 하면 이미 늦다. 회복 속도가 빠른 만큼 새로운 거품이 생기는 속도도 빨라 경제가 과열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출구전략에 대해 시장과 정부가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본의 장기 불황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이라며 “당시 일본과 지금의 우리는 상황이 다르다”고 덧붙였다. 일본이 1997년 긴축정책을 쓰면서 불황에 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에는 금융위기가 아시아를 덮친 탓이 컸으며, 현재는 그럴 우려는 없다는 설명이다.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
반대
장재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금융위기 해소안돼 시기상조”
장재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향후 경제상황의 시나리오에 맞춰 출구전략을 준비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지금 출구전략을 시행해야 할 때는 아니라고 봤다.
장 연구원은 “일각에서는 한국의 CDS 프리미엄, 금리스프레드 등이 금융위기가 가속화됐던 때보다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위기가 상당히 해소됐다고 보는 듯하다”면서 “그러나 아직 실물부문의 문제가 남아 있고, 미국의 실업률 등 우려되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 누리엘 루비니 교수는 미 실업률과 관련, 현재 9.5%에서 11%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장 연구원이 보는 출구전략 시행의 전제는 그동안 정책당국이 여러 가지 비상조치를 취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 즉 금융위기가 해소됐다는 확신이다. 그러나 현 경제상황이 그렇게 좋으냐고 그는 반문했다. 금융위기 시발점이었던 미국만 봐도 그동안 정부가 대형 투자은행들의 부실을 막아왔지만 그렇다고 금융시스템 전체가 크게 개선됐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 경제지표상에 큰 개선이 없는 상황에서 그동안의 비상조치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이후에도 금융시스템이 자발적으로 개선되리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은 그런 확신을 가질만한 상태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장 연구원은 최근 급등하고 있는 주가에 대해서도 시각을 달리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 경제가 저점을 치고 올라갈 거라는 기대심리 때문에 주가가 오르고 있지만 그런 기대감도 사실은 현재 정부의 경기부양책 등 대규모 재정정책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면서 “만약 현 상태에서 그런 조치들을 이전으로 되돌린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예측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출구전략을 시급하게 시행한다면 ‘도박’이 될 가능성이 높고 그 도박 후에 경제상황이 얼마만큼 나빠질지는 가늠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는 “섣부른 출구전략에 시동을 걸 경우 자칫하면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더블딥 사태가 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현재 소비자 물가지수가 2% 수준인데 이는 한국은행이 목표치로 밝힌 2.5~3.5%보다 낮다. 또 경제성장률이 점점 나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지만 애초 잠재성장률을 하회하고 있는 형편”이라면서 “현재로는 인플레이션 우려가 있다고 볼 수 없는데 굳이 출구전략을 쓸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재정적자, 유동성 문제 등 경기부양책의 부작용은 인정했다. 지금 풀어놓은 유동성이 장차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유동성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유동성을 어떻게 콘트롤할 것인가가 중요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부양책을 중단했을 때 발생하는 부작용의 크기와 현재 겪고 있는 부작용을 비교할 때 아직은 중단을 선택할 시기는 아니라고 봤다.
물론 출구전략을 준비에 대해서는 장 연구원도 이견이 없다. 다만 미국의 경우 출구전략 논의가 나오는 것이 ‘준비’의 의미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논의하는 것 자체가 방금이라도 정책이 시행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데 경계감을 표했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세계도 출구전략 논쟁중 …“중, 미 경제회복 보면서 검토”
출구전략은 세계적으로도 화두다. 미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출구전략과 관련한 언급을 한 후 논란이 심화되는 모습이다.* 중 “미국을 지켜볼 것” = 저우샤오촨(周小川·사진) 중국 인민은행장은 28일 중국이 경기부양책에서 탈피하기 위한 `출구전략은 미국의 경제회복 여하에 달려 있다며 중국 정부가 앞으로 미국의 경제상황을 고려해 경제와 통화정책을 펴나갈것임을 시사했다.
저우 행장은 워싱턴 D.C.에서 이틀째 열리고 있는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 중국의 경제운용 방향과 관련, “우리는 미국이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지켜볼 것”이라고 이같이 밝혔다.
그는 “미국의 경제 회복이 굳건하고 안정돼 있다는 확신이 들 때 중국도 무엇을 할지를 검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일 “출구 전략 마련할 때”= 일본 정부는 디플레 재연을 막기 위해 계속 느슨한 재정 통화 정책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출구 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지난 24일 발표된 일본의 경제재정백서는 “그간의 연구들은 정부 지출을 줄이는것이 공공 부채를 낮추고 위기가 가라앉은 후의 재정 적자를 줄이는데 효과적인 방법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일본이 향후의 재정 정책을 만드는데 이걸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보고서는 이어서 일본은행이 지탱 가능한 성장이 회복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지적함으로써 당분간 초저금리 통화정책 기조가 유지돼야 한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강조했다.
김형선 기자·연합뉴스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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