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노믹스 재조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전국이 큰 지도자를 잃은 슬픔에 젖어 있는 가운데 DJ노믹스에 대한 재조명 바람이 일고 있다. 그는 1997년 ‘준비된 경제대통령’이라는 구호로 대통령에 당선된 뒤 곧 경제청사진을 내놓았다. ‘국민의 정부 경제청사진’이라는 책자에는 DJ노믹스, 즉 김대중 경제학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김대중 경제학의 골자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었다. 햇볕정책과 제2의 건국도 포함된 통치철학이 드러났다. 당시 DJ노믹스의 일선 전도사격인 이규성 재경부장관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자유 경쟁 책임 세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해석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결코 새로운 철학이 아니다. 선진국 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표방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그러나 그동안은 말로만 외쳤지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말이 아닌 행동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DJ노믹스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고강도 개혁으로 외환위기 최단기간에 극복
DJ노믹스는 첫 발부터 암담한 현실의 도전에 직면했다. 국치에 버금갈만한 외환위기에 맞닥뜨린 것이다. 대통령직 취임도 하기 전에 당선자 신분으로 IMF 외환위기 극복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지 사흘만인 1997년 12월23일 민주당 당사에서 데이비드 립턴 미 재무부차관을 비밀리에 만났다. 정치적 기반을 희생하면서까지 정리해고를 포함한 고강도의 개혁을 약속해야 했다.
IMF권고에 따라 금융 기업 공공 노동 등 4대 부문의 개혁을 밀어붙였다. 개혁은 치욕의 외환위기 극복의 원동력이었다. 개혁 결과 재벌급을 포함하여 55개 부실기업과 5개 부실은행이 퇴출되는 아픔을 겪었다.
국민의 정부 경제팀의 경제정책 모토는 ‘신자유주의’였다. 개방과 경쟁을 골간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를 공개적으로 표방하면서 ‘지금은 식민시대가 아니므로 외국자본을 많이 들여 올수록 좋다’고 밝혔다. 이러한 기조 아래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거대 투기자본의 이익을 보장해야 했고 그 결과 일부 은행과 기업이 외국자본에 넘어가는 희생도 감수해야 했다. 국부유출 논쟁도 일었다.
김 대통령의 위기극복 의지와 실천력은 범국민적인 금모으기 운동에서 절정을 이뤘다. 전정부에서 받은 유산은 빈금고였다. ‘금고가 비고 빚독촉장만 쌓여 있다’며 도움을 호소했고 국민들은 남녀노소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요원의 불길을 이뤘다. 국가적 재난에 힘차게 일어나는 잠재된 저력이 결집한 것이다.
인사도 계파와 인맥보다는 위기극복을 위한 능력을 우선시했다. ‘적장’을 도왔던 사람을 금융감독위원장에, 과거 인사를 재경부장관에 기용하여 능력인사의 표본을 보여줬다. 반재벌 비판과 이념논쟁의 저항에 부딪치면서도, 기업분할과 인수합병 고용조정 등 다양한 제도를 도입하여 재벌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재벌개혁이 미적거리자 총수들을 직접 만나 압박하기도 했다. 폐쇄적인 황제경영과 문어발 확장이 사라지고 투명경영 윤리경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외환위기의 간접적인 원인이었던 과도한 부채비율이 크게 낮아져 기업체질이 단단해졌다.
김 대통령은 취임 1년 반만에 외환위기 극복을 공식 선언했다. 빚을 모두 갚았다. IMF 족쇄에서 최단기에 벗어난 기록을 세웠다. 성장 물가 국제수지 등 모든 지표가 합격점이었다.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이유였던 바닥 외환보유고가 1000억달러에 이르렀다. 외신들도 위기를 빠르게 잘 극복한 나라, 경제를 V자로 회복시킨 명대통령이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정의와 효율을 적절하게 구사함으로 일궈낸 성취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식기반 경제 토대 닦고 IT산업 일으켜
DJ노믹스의 또 다른 날개는 지식기반 경제와 IT산업이라 할 수 있다. 지식에서 성장동력을 찾으려 했다. 자본과 노동 요소에 지식과 창의 등 소프트웨어를 주입함으로써 한 단계 더 높은 경제를 지향하고 지속발전이 가능한 경제기반을 구축했다. 대중경제 서민경제도 김대중경제학의 한 챕터를 기록한다.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한 치적 뒤에는 과(過)도 없지 않다. 하루라도 빨리 위기를 극복하려는 조급증과 과욕으로 무리한 경기부양책을 쓴 나머지 카드대란, 벤처버블, 부동산 폭등과 같은 부작용을 낳았다. 본격화되기 시작한 사회 경제의 양극화 현상은 지금도 씁쓸한 기억이다.
김진동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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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전국이 큰 지도자를 잃은 슬픔에 젖어 있는 가운데 DJ노믹스에 대한 재조명 바람이 일고 있다. 그는 1997년 ‘준비된 경제대통령’이라는 구호로 대통령에 당선된 뒤 곧 경제청사진을 내놓았다. ‘국민의 정부 경제청사진’이라는 책자에는 DJ노믹스, 즉 김대중 경제학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김대중 경제학의 골자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었다. 햇볕정책과 제2의 건국도 포함된 통치철학이 드러났다. 당시 DJ노믹스의 일선 전도사격인 이규성 재경부장관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자유 경쟁 책임 세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해석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결코 새로운 철학이 아니다. 선진국 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표방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그러나 그동안은 말로만 외쳤지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말이 아닌 행동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DJ노믹스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고강도 개혁으로 외환위기 최단기간에 극복
DJ노믹스는 첫 발부터 암담한 현실의 도전에 직면했다. 국치에 버금갈만한 외환위기에 맞닥뜨린 것이다. 대통령직 취임도 하기 전에 당선자 신분으로 IMF 외환위기 극복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지 사흘만인 1997년 12월23일 민주당 당사에서 데이비드 립턴 미 재무부차관을 비밀리에 만났다. 정치적 기반을 희생하면서까지 정리해고를 포함한 고강도의 개혁을 약속해야 했다.
IMF권고에 따라 금융 기업 공공 노동 등 4대 부문의 개혁을 밀어붙였다. 개혁은 치욕의 외환위기 극복의 원동력이었다. 개혁 결과 재벌급을 포함하여 55개 부실기업과 5개 부실은행이 퇴출되는 아픔을 겪었다.
국민의 정부 경제팀의 경제정책 모토는 ‘신자유주의’였다. 개방과 경쟁을 골간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를 공개적으로 표방하면서 ‘지금은 식민시대가 아니므로 외국자본을 많이 들여 올수록 좋다’고 밝혔다. 이러한 기조 아래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거대 투기자본의 이익을 보장해야 했고 그 결과 일부 은행과 기업이 외국자본에 넘어가는 희생도 감수해야 했다. 국부유출 논쟁도 일었다.
김 대통령의 위기극복 의지와 실천력은 범국민적인 금모으기 운동에서 절정을 이뤘다. 전정부에서 받은 유산은 빈금고였다. ‘금고가 비고 빚독촉장만 쌓여 있다’며 도움을 호소했고 국민들은 남녀노소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요원의 불길을 이뤘다. 국가적 재난에 힘차게 일어나는 잠재된 저력이 결집한 것이다.
인사도 계파와 인맥보다는 위기극복을 위한 능력을 우선시했다. ‘적장’을 도왔던 사람을 금융감독위원장에, 과거 인사를 재경부장관에 기용하여 능력인사의 표본을 보여줬다. 반재벌 비판과 이념논쟁의 저항에 부딪치면서도, 기업분할과 인수합병 고용조정 등 다양한 제도를 도입하여 재벌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재벌개혁이 미적거리자 총수들을 직접 만나 압박하기도 했다. 폐쇄적인 황제경영과 문어발 확장이 사라지고 투명경영 윤리경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외환위기의 간접적인 원인이었던 과도한 부채비율이 크게 낮아져 기업체질이 단단해졌다.
김 대통령은 취임 1년 반만에 외환위기 극복을 공식 선언했다. 빚을 모두 갚았다. IMF 족쇄에서 최단기에 벗어난 기록을 세웠다. 성장 물가 국제수지 등 모든 지표가 합격점이었다.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이유였던 바닥 외환보유고가 1000억달러에 이르렀다. 외신들도 위기를 빠르게 잘 극복한 나라, 경제를 V자로 회복시킨 명대통령이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정의와 효율을 적절하게 구사함으로 일궈낸 성취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식기반 경제 토대 닦고 IT산업 일으켜
DJ노믹스의 또 다른 날개는 지식기반 경제와 IT산업이라 할 수 있다. 지식에서 성장동력을 찾으려 했다. 자본과 노동 요소에 지식과 창의 등 소프트웨어를 주입함으로써 한 단계 더 높은 경제를 지향하고 지속발전이 가능한 경제기반을 구축했다. 대중경제 서민경제도 김대중경제학의 한 챕터를 기록한다.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한 치적 뒤에는 과(過)도 없지 않다. 하루라도 빨리 위기를 극복하려는 조급증과 과욕으로 무리한 경기부양책을 쓴 나머지 카드대란, 벤처버블, 부동산 폭등과 같은 부작용을 낳았다. 본격화되기 시작한 사회 경제의 양극화 현상은 지금도 씁쓸한 기억이다.
김진동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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