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효도를 당연시 하고 있지만 효에 대한 근본적인 자세를 묻는다면 주저할 것이다. 효란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이지만 그것에 대한 자세는 결국 가족이라는 틀보다는 인간에 대한 존중함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농암의 삶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농암은 문학사상보다 더욱 진지하게 접근한
것이 효이다. 농암의 대표적인 유적인 애일당은 이점을 잘 드러내 준다. 농암은 애일당 건립
과 관련하여 “1508년…가을 영천으로 부임하여…일상공무로 왕래하면서 어버이를 뵙기가
달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나 고향마을이 협소하여 어버이를 즐겁게 할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1512년 드디어 바위위에 집을 짓기로 하고…명절때마다 부모님
을 모시고 동생들과 더불어 색동옷을 입고 술잔을 올려 기쁘게 해 드리기를 반드시 이집에
서 했다”고 농암집에 적고 있다. 1512년이면 농암의 나이 46세때이다. 당시 평균연령이 30
세를 겨우 넘긴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46세라는 나이는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양친을 모셔다가 색동옷을 입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 주었다는 사실에서 농암의 치기어
린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살펴보게 한다.
그는 1519년에 안동부사로 재직하였는데 이때 노인들을 불러 양로연을 배푼다. 그는 이전
1511년에 영천에서 ‘쌍청양로연’을 열었으니 그의 부사시절에는 지속적으로 어른들을 위
한 양로연을 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때 초청된 사람들은 신분귀천을 막론하고 남녀 80
세 이상되는 안동부내의 어른분을 모두 모셨으니 당시로 보아서는 파격적인 일임에 틀림이
없다. 말하자면 격식과 신분이라는 사회적 제약을 무시하고 한 인간으로서 먼저 살아간 사
람들에게 예를 다한 것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도 고을원이라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색동옷
을 입고 어른들 앞에서 재롱(?)을 부린다. 이 양로연을 ‘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이라하며
화산은 안동의 옛지명이니 가히 안동의 정신과 내용을 담은 노인잔치라 할 것이다.
농암은 그의 문집에서 화산양로연에 대하여 “대개 관리나 장수, 재상이 되어 크게 봉친하
는 사람은 많지만 고을원의 신분으로 향중의 노인들을 초청하여 자리를 마련함은 흔하지 않
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 이런 모임을 다시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세월이 지나감
에 한편은 기쁘고 판현은 두려움의 가점이 저절로 일어 좌중에 화답을 구하고 후일에도 잊
지 않을 자료로 삼고자”한다며 양로연이 끝나도 계속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늦추지 않을 것
을 소망한다. 이때 그가 지은 시를 보면 /풍년 9월 하늘아래/노인들을 청내로 모셨네/서리서
리 백발들이 손잡은 주변에/단풍 국화가 가득하네/나누어 수작하는 자리/내 외청에 음악이
이어지네/색동옷 입고 술잔앞에 춤추는 사람(농암) 괴이하다 하지 마라/ 태수 양친이 또한
계심이다.
다시 묻는다. 효란 무엇인가. 농암은 최소한 훌륭한 자동차, 큰집을 부모님께 사주는 사람이
효를 다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효에 대한 많은 논의보다 때때옷을 입고 부모님에게 한
판 춤사위를 통해서 효의 본질에 대한 답을 추구할 수 있다. 효란 사회적 관계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사람에 대한 이해와 먼저 살아갈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농암은 사후 효절공(孝節公)이란 시호를 받는다. 시호로 효절을 받은 분은 조선시대를 통털
어 유일하다. 그가 부모를 위해 지은 건물 이름이 애일당(愛日堂)이다. 부모님이 살아계심이
오래지 않으니 날을 사랑하며 보필하라는 뜻이다. 농암의 이러한 사상이 알려지자 많은 사
람들이 애일을 다짐하는, 농암의 효에 대한 의미를 새기는 그런 다짐의 글을 보낸다.
권두현(민예총 안동지부 사무국장)
농암의 삶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농암은 문학사상보다 더욱 진지하게 접근한
것이 효이다. 농암의 대표적인 유적인 애일당은 이점을 잘 드러내 준다. 농암은 애일당 건립
과 관련하여 “1508년…가을 영천으로 부임하여…일상공무로 왕래하면서 어버이를 뵙기가
달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나 고향마을이 협소하여 어버이를 즐겁게 할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1512년 드디어 바위위에 집을 짓기로 하고…명절때마다 부모님
을 모시고 동생들과 더불어 색동옷을 입고 술잔을 올려 기쁘게 해 드리기를 반드시 이집에
서 했다”고 농암집에 적고 있다. 1512년이면 농암의 나이 46세때이다. 당시 평균연령이 30
세를 겨우 넘긴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46세라는 나이는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양친을 모셔다가 색동옷을 입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 주었다는 사실에서 농암의 치기어
린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살펴보게 한다.
그는 1519년에 안동부사로 재직하였는데 이때 노인들을 불러 양로연을 배푼다. 그는 이전
1511년에 영천에서 ‘쌍청양로연’을 열었으니 그의 부사시절에는 지속적으로 어른들을 위
한 양로연을 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때 초청된 사람들은 신분귀천을 막론하고 남녀 80
세 이상되는 안동부내의 어른분을 모두 모셨으니 당시로 보아서는 파격적인 일임에 틀림이
없다. 말하자면 격식과 신분이라는 사회적 제약을 무시하고 한 인간으로서 먼저 살아간 사
람들에게 예를 다한 것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도 고을원이라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색동옷
을 입고 어른들 앞에서 재롱(?)을 부린다. 이 양로연을 ‘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이라하며
화산은 안동의 옛지명이니 가히 안동의 정신과 내용을 담은 노인잔치라 할 것이다.
농암은 그의 문집에서 화산양로연에 대하여 “대개 관리나 장수, 재상이 되어 크게 봉친하
는 사람은 많지만 고을원의 신분으로 향중의 노인들을 초청하여 자리를 마련함은 흔하지 않
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 이런 모임을 다시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세월이 지나감
에 한편은 기쁘고 판현은 두려움의 가점이 저절로 일어 좌중에 화답을 구하고 후일에도 잊
지 않을 자료로 삼고자”한다며 양로연이 끝나도 계속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늦추지 않을 것
을 소망한다. 이때 그가 지은 시를 보면 /풍년 9월 하늘아래/노인들을 청내로 모셨네/서리서
리 백발들이 손잡은 주변에/단풍 국화가 가득하네/나누어 수작하는 자리/내 외청에 음악이
이어지네/색동옷 입고 술잔앞에 춤추는 사람(농암) 괴이하다 하지 마라/ 태수 양친이 또한
계심이다.
다시 묻는다. 효란 무엇인가. 농암은 최소한 훌륭한 자동차, 큰집을 부모님께 사주는 사람이
효를 다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효에 대한 많은 논의보다 때때옷을 입고 부모님에게 한
판 춤사위를 통해서 효의 본질에 대한 답을 추구할 수 있다. 효란 사회적 관계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사람에 대한 이해와 먼저 살아갈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농암은 사후 효절공(孝節公)이란 시호를 받는다. 시호로 효절을 받은 분은 조선시대를 통털
어 유일하다. 그가 부모를 위해 지은 건물 이름이 애일당(愛日堂)이다. 부모님이 살아계심이
오래지 않으니 날을 사랑하며 보필하라는 뜻이다. 농암의 이러한 사상이 알려지자 많은 사
람들이 애일을 다짐하는, 농암의 효에 대한 의미를 새기는 그런 다짐의 글을 보낸다.
권두현(민예총 안동지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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