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은 아련한 동경이다. 낭만과 신화가 가득 쟁여져 있는 곳이다. 섬마을 선생님은 왠지 달콤한 로맨스와 깊은 사연을 지닌 주인공 일 것만 같다. 그래서 섬마을 유람에 나섰다. 섬마을 선생님들의 훈훈한 휴먼스토리와 낙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지면에 담아낼 작정이다. 서해의 백령·연평군도에서 남해 한려수도를 돌아 동해의 울릉도까지….
“아저씨! 선생님이 똥독에 빠졌대요. 그래서 오늘 목포로 나가는 새벽 배도 못 타셨어요.”
토요일 아침, 막 세수를 마치고 아침을 먹으려 할 즈음 상준(11)이가 헐레벌떡 마당으로 뛰어들며 호들갑을 떤다. 상준은 뛰느라 거칠어진 숨을 고르랴, 깔깔 웃으랴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아침 눈을 뜨자마자 집에서 200m 거리에 있는 학교까지 달려갔다 온 상준이가 전하는 ‘섬마을 특보’였다. 옹기종기 아홉 가구로 이루어진 전남 신안군 신의면 기도(箕島)의 박옥남(54)-이금단(46)씨 부부 집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섬에 숙박업을 하는 집이 없어 하룻밤 신세를 진 집이었다.
설마 요즘 세상에 똥독이 있을라고. 박씨 부부도 늦둥이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냥 피식 웃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아침 여섯 시 몇 분엔가 있는 첫배를 타고 목포로 나가려던 선생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전날 저녁에 선생님은 관사의 식재료가 떨어져 뭍에 다녀와야 한다고 말했었다.
상준이 어머니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후닥닥 먹은 뒤 학교로 달려갔다. 상준이 집에서 학교까지는 200여m 정도. 학교의 교문이 곧바로 푸른 바다를 접한 학교다. 학생도, 교사도, 고실도 모두 하나뿐인 초미니 학교다. 상준이 말대로 과연 선생님은 관사에 있었다. 막 샤워를 마친 듯 머리가 젖어 있었다. 신의초등학교 기도분교의 강대호(32) 선생님이다.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똥독에 빠진 선생님
“선생님, 오늘 첫배로 나간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아, 예. 옥상 물탱크 뚜껑을 닫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가다가 그만….”
상준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관사 옥상 물탱크의 물이 넘치고 있었다. 1층의 수도꼭지에서 연결한 고무호스를 통해 물을 받는 수동식 물 탱크였다.
“물이 차면 고무호스를 뽑아내고, 뚜껑을 닫아야 하거든요. 옥상으로 올라가다가 사다리가 넘어지면서 정화조 뚜껑위로 떨어졌어요. 플라스틱 뚜껑이 튕겨져 나가면서 오른 쪽 다리가 정화조 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상준이 말대로 똥독에 빠진 거지요.”
예전엔 학교마다 소사 아저씨가 한 분씩 있었다. 학교의 목공일과 정원관리 등 크고 작은 잡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요즘의 학교 기능직들보다 훨씬 궂은일을 하던 분들이었다.
선생님이 아침 댓바람부터 똥독에 빠지는 참변을 당한 이유는 자신이 기능직 일까지 도맡아 해야 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학생이라곤 상준이 하나뿐인 학교에 기능직이 배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탱크 뿐 아니라 보일러, 전기장치, 정원 등 모든 시설물 관리를 선생님 스스로 해 내갈 수밖에 없다.
대학을 무려 세 번이나 바꾼
끝에 교직의 길로
인간에게 하늘이 내리는 소명(召命) 혹은 천직(天職) 이라는 게 있을까, 아니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일까? 그가 교직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보면 적어도 선택된 소수에겐 소명이나 천직을 내리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좋다는 의과대학에 합격해 놓고도 포기를 하는 등 대학을 무려 세 번이나 바꾼 끝에 교직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처음 들어간 학교는 전남대학 화학공학과였는데 자꾸 전공이 낯설게 느껴지더라고요. 다시 공부를 해서 강원대학 의예과에 특차로 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6년 의대과정을 마치기엔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피를 봐야하는 의사 일을 할 자신이 없더라고요. 등록을 포기한 뒤 2년제 전문대인 조선이공대학 애니메이션 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꾸 걱정을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4년제 대학을 나와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공부를 해서 들어간 곳이 광주교대입니다. 부모님들께서 바라셨던 길을 택한 거였어요.”
처음엔 교대 교육과정도 심드렁하기만 했다. 또 다시 엉뚱한 선택을 한 걸까? 그러나 가슴 속에 조금씩 피어오르던 회의는 실습 현장에 나가는 순간부터 씻은 듯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1학년 때 교생 실습을 위해 학교 현장에 서는 순간 가슴이 뛰는 제 자신을 발견했답니다.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들을 대하는 선배 교사들의 열성과 진정성도 가슴에 와 닿았고요.”
이젠 그도 만 2년을 경력을 꽉 채운 어엿한 교사다. 엉뚱한 길을 돌고 돈 끝에 남들보다 4~5년 뒤늦게 시작한 교사생활인만큼 그의 열정은 남다르다. 상준이는 선생님의 뜨거운 열정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복 많은 아이다. 아니 어쩌면 과도한 열정에 치이는 희생양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까?
“학생이라고는 상준이 한명 뿐인데, 이 아이만큼은 정말 제대로 가르쳐 보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독서, 영어, 컴퓨터, 한자를 집중적으로 지도하기 시작했어요. 하루 종일 학원에 다니며 사교육을 받는 도시의 아이들과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더욱 열심히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루 한권씩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도록 시켰다. 매일 영어 일기 쓰기를 하도록 했고, 워드는 1급 교재로 공부를 시작했다. 상준이가 혹시 영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지능검사를 받아보도록 하기도 했다.
“지난 여름방학 때였어요. 상준이 아버님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오늘 아빠, 엄마와 함께 고추를 땄습니다’를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영어 일기를 쓰던 상준이가 답답해 하니까 아버님이 전화를 걸어오신 거였어요. 다분히 항의성이 섞인 전화였어요. 방학 끝나기 전날 제 미니홈피에 상준이가 글을 올렸더라고요. ‘선생님, 영어 숙제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제 기대치가 너무 높았구나 하고 반성을 했지요.”
하루종일 붙어서 살아요
결국 워드는 3급 교재로 낮추었고, 독후감 쓰는 것도 읽은 책 내용을 3분 동안 구두로 설명하는 선으로 물러섰다. 그래도 영어일기 쓰는 것은 계속 시키고 있다. 요즘은 중간 중간 섞이는 한글 비율도 제법 줄어들고, 장난삼아 툭툭 영어로 말을 거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상준이는 선생님으로부터 ''24 시간 특별과외‘를 받는 것은 물론 어떤 시험에서도 전교 1등을 놓칠 염려는 안 해도 되는 행복한 소년이다.
선생님과 상준이는 잠자는 시간만 빼고는 하루 종일 붙어산다. 또래 친구는 물론 구멍가게 하나 없는 고적한 섬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친구가 된다. 여기에 상준이 꼬리처럼 붙어 다니는 삽살개 잡종 ‘행복이’까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함께 한다. 함께 밥도 먹고, 낚시도 하고, 축구와 야구도 하고, 출출할 땐 라면을 끓여먹기도 한다.
어둑어둑한 저녁 무렵 포구로 나갔던 선생님이 묵직해 보이는 양동이를 들고 학교로 올라온다.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양동이를 반 쯤 채운 산 낙지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갯벌에 나갔던 마을 어른으로부터 싸게 샀어요. 한 20여 마리 될 거예요. 이곳 낙지는 ‘옥도 뻘 낙지’로 유명하잖아요.”
박상주 오지여행가
지도에도 잘 안나오는 작은 섬
섬마을에선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보다 훨씬 많다. 우선 할머니들의 수명이 길기 때문이고, 배를 타던 낭군들이 일찍 바다에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여성의 수명이 남성보다 길기도 하다.
파란 바다를 면한 밭에서 할머니 두 분이 빨간 고추를 따고 있었다. 한 겨울에 빨갛게 익은 고추가 지천으로 달려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따뜻한 남쪽 지방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쪽빛 바다와 빨간 고추의 색깔이 강한 대비를 이룬다. 낯선 길손의 등장에 할머니들이 허리를 펴면서 잠시 일손을 멈춘다.
“어디서 오셨소?”
“서울에서 왔습니다. 참 좋은 섬에 사십니다.”
“아 좋다마다. 바다 좋지, 땅 비옥하지, 공기 맑지, 안 좋은 게 하나도 없어. 한 철은 밭에서 고추농사 짓고, 또 한 철은 바다에서 김 농사지으니까 여그 사람들은 먹고 살 걱정도 안 해.”
스스로 멋쩍은지 할머니들이 하하 웃으신다. 쪼글쪼글한 얼굴에 가득 담기는 웃음이 하회탈의 표정을 닮았다.
전남 신안군 신의면 기도(箕島)는 웬만한 지도에는 표시조차 안 되는 작은 섬이다. 섬의 형태가 곡식을 까부르는 키의 모습을 닮았다하여 키 기(箕)자를 붙인 이름을 얻었다.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도 채 안돼 섬을 다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좁은 땅이다. 그래도 주민 아홉 가구 중 네 가구가 밭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섬 전체가 밭을 일굴 수 있는 평지로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다섯 가구도 바다 일과 밭일을 함께 하고 있다. 비록 좁지만 버릴만한 자투리 하나 없는 착한 땅과 항상 푸르고 넉넉한 바다, 캐고 또 캐도 끊임없이 낙지와 게, 조개 등을 토해 내놓는 보물창고 같은 개펄로 둘러싸인 섬이다.
“할머니 여기선 무슨 고기가 잡히나요?”
“숭어는 많이 잡히는 디 사람들이 찾지를 않는 고기여. 돈 되는 돔이나 농어 같은 놈들은 조금씩만 잡히고…. 이곳 뻘에서 잡히는 낙지는 알아주지라. 여그서 요 옆 옥도까지 전부 뻘로 연결돼 있응께. 아, 옥도낙지라고 안 들어봤소.”
망망하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기를 잡아도, 또 잡아도 어족자원이 고갈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워낙 극성스럽게 구석구석 훑어대니까 연안에서는 어획량이 크게 줄어드는 모양이다.
그래서 바닷가 사람들이 시작한 것이 양식업이다. 기도 사람들은 대부분 김 양식을 한다. 신안 김은 맛과 품질 모두 알아주는 제품이다. 섬 둘레에 설치된 김 양식장의 지주대들이 마치 무슨 설치 예술작품이라도 되는 듯 멋스럽다.
저녁을 먹고 난 뒤 김 농사를 짓는 상준이 아버지 박옥남씨와 마주 앉았다. 김 농사를 짓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안 김이야 세상이 알아주는 맛과 품질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어민들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너무 박해요. 유통과정이 너무 왜곡돼 있어요.”
상준이 아버지도 한 때 섬마을 탈출을 꿈꾸었다고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서울로 올라와 용산 시장과 영등포 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배웠다. 밭떼기로 채소를 사서는 서울의 큰 시장으로 넘기면서 쏠쏠한 재미도 보았다. 그런 그를 다시 고향으로 불러 내린 것은 김이었다. 군 입대 문제 때문에 고향에 잠깐 내려왔던 상준이 아버지는 당시 ‘금값’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치솟던 김 값을 보고는 다시 고향에 주저앉았던 것이다.
“한동안은 교사 월급 2~3만원 할 때 한 달 10만원씩 벌었다오. 야채 과일 장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요. 그때 생각하면 요즘은 참 속상합니다. 그래도 우리 상준이 때문에 행복합니다. 더군다나 상준이가 섬 생활을 참아하거든요. 목포나 서울보다 여기가 더 좋대요.”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운 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상준이 어느 틈엔가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상준이가 언제까지 섬 생활을 즐거워할까. 나중에 더 큰 뒤에도 뭍보다 섬을 더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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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선생님이 똥독에 빠졌대요. 그래서 오늘 목포로 나가는 새벽 배도 못 타셨어요.”
토요일 아침, 막 세수를 마치고 아침을 먹으려 할 즈음 상준(11)이가 헐레벌떡 마당으로 뛰어들며 호들갑을 떤다. 상준은 뛰느라 거칠어진 숨을 고르랴, 깔깔 웃으랴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아침 눈을 뜨자마자 집에서 200m 거리에 있는 학교까지 달려갔다 온 상준이가 전하는 ‘섬마을 특보’였다. 옹기종기 아홉 가구로 이루어진 전남 신안군 신의면 기도(箕島)의 박옥남(54)-이금단(46)씨 부부 집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섬에 숙박업을 하는 집이 없어 하룻밤 신세를 진 집이었다.
설마 요즘 세상에 똥독이 있을라고. 박씨 부부도 늦둥이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냥 피식 웃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아침 여섯 시 몇 분엔가 있는 첫배를 타고 목포로 나가려던 선생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전날 저녁에 선생님은 관사의 식재료가 떨어져 뭍에 다녀와야 한다고 말했었다.
상준이 어머니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후닥닥 먹은 뒤 학교로 달려갔다. 상준이 집에서 학교까지는 200여m 정도. 학교의 교문이 곧바로 푸른 바다를 접한 학교다. 학생도, 교사도, 고실도 모두 하나뿐인 초미니 학교다. 상준이 말대로 과연 선생님은 관사에 있었다. 막 샤워를 마친 듯 머리가 젖어 있었다. 신의초등학교 기도분교의 강대호(32) 선생님이다.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똥독에 빠진 선생님
“선생님, 오늘 첫배로 나간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아, 예. 옥상 물탱크 뚜껑을 닫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가다가 그만….”
상준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관사 옥상 물탱크의 물이 넘치고 있었다. 1층의 수도꼭지에서 연결한 고무호스를 통해 물을 받는 수동식 물 탱크였다.
“물이 차면 고무호스를 뽑아내고, 뚜껑을 닫아야 하거든요. 옥상으로 올라가다가 사다리가 넘어지면서 정화조 뚜껑위로 떨어졌어요. 플라스틱 뚜껑이 튕겨져 나가면서 오른 쪽 다리가 정화조 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상준이 말대로 똥독에 빠진 거지요.”
예전엔 학교마다 소사 아저씨가 한 분씩 있었다. 학교의 목공일과 정원관리 등 크고 작은 잡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요즘의 학교 기능직들보다 훨씬 궂은일을 하던 분들이었다.
선생님이 아침 댓바람부터 똥독에 빠지는 참변을 당한 이유는 자신이 기능직 일까지 도맡아 해야 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학생이라곤 상준이 하나뿐인 학교에 기능직이 배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탱크 뿐 아니라 보일러, 전기장치, 정원 등 모든 시설물 관리를 선생님 스스로 해 내갈 수밖에 없다.
대학을 무려 세 번이나 바꾼
끝에 교직의 길로
인간에게 하늘이 내리는 소명(召命) 혹은 천직(天職) 이라는 게 있을까, 아니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일까? 그가 교직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보면 적어도 선택된 소수에겐 소명이나 천직을 내리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좋다는 의과대학에 합격해 놓고도 포기를 하는 등 대학을 무려 세 번이나 바꾼 끝에 교직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처음 들어간 학교는 전남대학 화학공학과였는데 자꾸 전공이 낯설게 느껴지더라고요. 다시 공부를 해서 강원대학 의예과에 특차로 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6년 의대과정을 마치기엔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피를 봐야하는 의사 일을 할 자신이 없더라고요. 등록을 포기한 뒤 2년제 전문대인 조선이공대학 애니메이션 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꾸 걱정을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4년제 대학을 나와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공부를 해서 들어간 곳이 광주교대입니다. 부모님들께서 바라셨던 길을 택한 거였어요.”
처음엔 교대 교육과정도 심드렁하기만 했다. 또 다시 엉뚱한 선택을 한 걸까? 그러나 가슴 속에 조금씩 피어오르던 회의는 실습 현장에 나가는 순간부터 씻은 듯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1학년 때 교생 실습을 위해 학교 현장에 서는 순간 가슴이 뛰는 제 자신을 발견했답니다.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들을 대하는 선배 교사들의 열성과 진정성도 가슴에 와 닿았고요.”
이젠 그도 만 2년을 경력을 꽉 채운 어엿한 교사다. 엉뚱한 길을 돌고 돈 끝에 남들보다 4~5년 뒤늦게 시작한 교사생활인만큼 그의 열정은 남다르다. 상준이는 선생님의 뜨거운 열정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복 많은 아이다. 아니 어쩌면 과도한 열정에 치이는 희생양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까?
“학생이라고는 상준이 한명 뿐인데, 이 아이만큼은 정말 제대로 가르쳐 보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독서, 영어, 컴퓨터, 한자를 집중적으로 지도하기 시작했어요. 하루 종일 학원에 다니며 사교육을 받는 도시의 아이들과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더욱 열심히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루 한권씩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도록 시켰다. 매일 영어 일기 쓰기를 하도록 했고, 워드는 1급 교재로 공부를 시작했다. 상준이가 혹시 영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지능검사를 받아보도록 하기도 했다.
“지난 여름방학 때였어요. 상준이 아버님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오늘 아빠, 엄마와 함께 고추를 땄습니다’를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영어 일기를 쓰던 상준이가 답답해 하니까 아버님이 전화를 걸어오신 거였어요. 다분히 항의성이 섞인 전화였어요. 방학 끝나기 전날 제 미니홈피에 상준이가 글을 올렸더라고요. ‘선생님, 영어 숙제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제 기대치가 너무 높았구나 하고 반성을 했지요.”
하루종일 붙어서 살아요
결국 워드는 3급 교재로 낮추었고, 독후감 쓰는 것도 읽은 책 내용을 3분 동안 구두로 설명하는 선으로 물러섰다. 그래도 영어일기 쓰는 것은 계속 시키고 있다. 요즘은 중간 중간 섞이는 한글 비율도 제법 줄어들고, 장난삼아 툭툭 영어로 말을 거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상준이는 선생님으로부터 ''24 시간 특별과외‘를 받는 것은 물론 어떤 시험에서도 전교 1등을 놓칠 염려는 안 해도 되는 행복한 소년이다.
선생님과 상준이는 잠자는 시간만 빼고는 하루 종일 붙어산다. 또래 친구는 물론 구멍가게 하나 없는 고적한 섬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친구가 된다. 여기에 상준이 꼬리처럼 붙어 다니는 삽살개 잡종 ‘행복이’까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함께 한다. 함께 밥도 먹고, 낚시도 하고, 축구와 야구도 하고, 출출할 땐 라면을 끓여먹기도 한다.
어둑어둑한 저녁 무렵 포구로 나갔던 선생님이 묵직해 보이는 양동이를 들고 학교로 올라온다.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양동이를 반 쯤 채운 산 낙지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갯벌에 나갔던 마을 어른으로부터 싸게 샀어요. 한 20여 마리 될 거예요. 이곳 낙지는 ‘옥도 뻘 낙지’로 유명하잖아요.”
박상주 오지여행가
지도에도 잘 안나오는 작은 섬
섬마을에선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보다 훨씬 많다. 우선 할머니들의 수명이 길기 때문이고, 배를 타던 낭군들이 일찍 바다에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여성의 수명이 남성보다 길기도 하다.
파란 바다를 면한 밭에서 할머니 두 분이 빨간 고추를 따고 있었다. 한 겨울에 빨갛게 익은 고추가 지천으로 달려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따뜻한 남쪽 지방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쪽빛 바다와 빨간 고추의 색깔이 강한 대비를 이룬다. 낯선 길손의 등장에 할머니들이 허리를 펴면서 잠시 일손을 멈춘다.
“어디서 오셨소?”
“서울에서 왔습니다. 참 좋은 섬에 사십니다.”
“아 좋다마다. 바다 좋지, 땅 비옥하지, 공기 맑지, 안 좋은 게 하나도 없어. 한 철은 밭에서 고추농사 짓고, 또 한 철은 바다에서 김 농사지으니까 여그 사람들은 먹고 살 걱정도 안 해.”
스스로 멋쩍은지 할머니들이 하하 웃으신다. 쪼글쪼글한 얼굴에 가득 담기는 웃음이 하회탈의 표정을 닮았다.
전남 신안군 신의면 기도(箕島)는 웬만한 지도에는 표시조차 안 되는 작은 섬이다. 섬의 형태가 곡식을 까부르는 키의 모습을 닮았다하여 키 기(箕)자를 붙인 이름을 얻었다.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도 채 안돼 섬을 다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좁은 땅이다. 그래도 주민 아홉 가구 중 네 가구가 밭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섬 전체가 밭을 일굴 수 있는 평지로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다섯 가구도 바다 일과 밭일을 함께 하고 있다. 비록 좁지만 버릴만한 자투리 하나 없는 착한 땅과 항상 푸르고 넉넉한 바다, 캐고 또 캐도 끊임없이 낙지와 게, 조개 등을 토해 내놓는 보물창고 같은 개펄로 둘러싸인 섬이다.
“할머니 여기선 무슨 고기가 잡히나요?”
“숭어는 많이 잡히는 디 사람들이 찾지를 않는 고기여. 돈 되는 돔이나 농어 같은 놈들은 조금씩만 잡히고…. 이곳 뻘에서 잡히는 낙지는 알아주지라. 여그서 요 옆 옥도까지 전부 뻘로 연결돼 있응께. 아, 옥도낙지라고 안 들어봤소.”
망망하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기를 잡아도, 또 잡아도 어족자원이 고갈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워낙 극성스럽게 구석구석 훑어대니까 연안에서는 어획량이 크게 줄어드는 모양이다.
그래서 바닷가 사람들이 시작한 것이 양식업이다. 기도 사람들은 대부분 김 양식을 한다. 신안 김은 맛과 품질 모두 알아주는 제품이다. 섬 둘레에 설치된 김 양식장의 지주대들이 마치 무슨 설치 예술작품이라도 되는 듯 멋스럽다.
저녁을 먹고 난 뒤 김 농사를 짓는 상준이 아버지 박옥남씨와 마주 앉았다. 김 농사를 짓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안 김이야 세상이 알아주는 맛과 품질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어민들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너무 박해요. 유통과정이 너무 왜곡돼 있어요.”
상준이 아버지도 한 때 섬마을 탈출을 꿈꾸었다고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서울로 올라와 용산 시장과 영등포 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배웠다. 밭떼기로 채소를 사서는 서울의 큰 시장으로 넘기면서 쏠쏠한 재미도 보았다. 그런 그를 다시 고향으로 불러 내린 것은 김이었다. 군 입대 문제 때문에 고향에 잠깐 내려왔던 상준이 아버지는 당시 ‘금값’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치솟던 김 값을 보고는 다시 고향에 주저앉았던 것이다.
“한동안은 교사 월급 2~3만원 할 때 한 달 10만원씩 벌었다오. 야채 과일 장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요. 그때 생각하면 요즘은 참 속상합니다. 그래도 우리 상준이 때문에 행복합니다. 더군다나 상준이가 섬 생활을 참아하거든요. 목포나 서울보다 여기가 더 좋대요.”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운 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상준이 어느 틈엔가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상준이가 언제까지 섬 생활을 즐거워할까. 나중에 더 큰 뒤에도 뭍보다 섬을 더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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