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경 신문로

지역내일 2009-12-28
미래가 “어두워~” 보일 때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김이경 2009년 12월 22일 (화) 01:28:57


훌쩍 줄어든 낮, 짧은 해[日] 안에 할 일을 마치려고 종종거리는 사이 어느덧 한 해[年]가 저물고 있습니다. 문득 돌아보니, 그 많은 일들이 다 이 한 해에 일어났던가, 새삼 놀랍습니다. 한때는 잊지 않겠다고, 가슴에 품겠다고 기약했던 사연과 인연들이 어느새 가물가물하기만 합니다. 낯 뜨거운 기억력입니다.
허나 부끄러운 것은 누추한 기억만이 아닙니다. 새해를 코앞에 두고도 걱정밖에는 일구지 못하는 알량함을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역사를 운운하는 거창한 포부는 몰라도 생활을 일신하겠다는 다짐쯤은 있어도 좋으련만, 왜 이리 깜깜절벽인지 모르겠습니다.
쓸데없는 삽질로 세월을 보내는 제 자신도 이 세상도 답이 안 나옵니다. 만약 이 책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를 만나지 않았다면, 남은 날은 물론이요 새해 첫날부터 어느 개그맨처럼 “인생, 어두워~”를 외쳤을지 모릅니다. 기묘한 제목에 홀려 고른 책인데,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술과 약물에 빠져 살던 다니엘 에버렛은 열일곱 살 때 기독교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선교사가 되기로 맘먹은 그는 몇 년 동안 포르투갈 어를 배우고 혹독한 밀림 적응 훈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스물여섯 되던 1978년, 아마존 정글로 들어갑니다. 여러 선교사들이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피다한 부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렇게 시작한 아마존 생활은 30년 동안 이어지며 많은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성경밖에 모르던 외곬의 청년은 세계 언어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중견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가 되었고,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 모든 변화는 그가 반평생을 보낸 피다한 마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미래’를 모르는 피다한 사람들이 그를 바꿔놓은 것입니다.
피다한 마을에 들어간 에버렛이 처음 한 일은 말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들의 말로 성경을 번역해 전도해야 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피다한 마을을 방문한 언어학자, 인류학자, 선교사들은 많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 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말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마치 동물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피다한 말은 모든 점에서 기존의 언어와 달랐습니다.
11개에 불과한 음소(한국어는 약 29개, 영어는 약 40개 음소가 있습니다), 독특하고 복잡한 음조, 단수/복수나 접두사/접미사 따위가 없는 단순한 명사, 무려 6만 가지에 이르는 동사 변이 등등, 피다한 말은 발음도 문법도 색다른 말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피다한 말에는 숫자나 색깔을 나타내는 말이 없으며, ‘고마워’ ‘미안해’ 같은 친교를 위한 말도, ‘신’이니 ‘미래’니 ‘걱정’이니 하는 말들도 없었습니다.
에버렛은 오랜 연구 끝에, 피다한 말의 이런 특징이 ‘경험의 직접성 원칙’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것만을 믿고 말하는 원칙이지요. 인류의 원형이라고 여겨지는 창조신화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인데, 더 원시적인 부족에게도 창조신화가 있는 걸 떠올리면 참으로 믿기 힘든 사실이지요.
책에는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브라질의 한 대학원생이 피다한 문화를 연구하겠다고 나서자 에버렛은 피다한 말을 못하는 그를 위해 그를 소개하는 말을 녹음해줍니다. 마을에 들어간 학생은 녹음기를 틀어준 다음 바로 질문을 던집니다. (대화는 아주 간단한 포르투갈 어로 진행됩니다.)

“학생: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지? 세상 말이야.
피다한 남자: 세상 말이야… (끝말을 그대로 따라한다)
학생: 세상을 누가 만들었어?
피다한 남자: 만들었어…
학생: 처음에 뭐가 있었지?
…긴 침묵. 뒤에서 누군가 말하자 남자가 그 말을 따라한다. ‘바나나.’
학생: 그런 다음에?
뒤에서 다시 ‘빠빠야.’ 마이크 앞의 남자 ‘빠빠야.’”

이어서 피다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에버렛에게 물건을 부탁하고 안부를 전합니다. 녹음기에서 에버렛의 목소리가 나오니까 그가 듣는다고 생각한 거지요. 한편, 피다한 말을 모르는 학생은 그들이 신나서 떠들자 창조신화를 얘기하는 거라고 믿고, 의기양양해서 에버렛에게 선생님이 틀렸다고, 창조신화를 찾았다고 말합니다. 오해가 낳은 이 웃지 못 할 해프닝을 통해 에버렛은 새삼 소통의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가 겪은 문제는 ‘굽은 머리=포르투갈 어’로 ‘곧은 머리=피다한 말’과 소통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우리가 소통을 하면서 늘 직면하는 문제일 뿐이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사장과 직원 사이에서 늘 이런 소통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대화를 면밀히 관찰할 때만 알 수 있다.”
소통의 어려움은 언어만이 아니라 문화의 문제임을 에버렛은 전도 과정에서 또 한번 깨닫습니다. 힘들게 피다한 말을 익힌 에버렛은 열심히 기독교 전파에 나섭니다. 하지만 예수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네가 예수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 그가 한 말은 어떻게 알아?” 하며 고개를 젓습니다. ‘지금 여기’에 충실한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지요.
벽에 부딪힌 에버렛은 자신을 가르친 신학교수를 찾아갑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려면 그들의 삶에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인식을 심어줘라.” 현재가 불행하다는 걸 일깨워 복음을 전하라는 말대로, 에버렛은 피다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오랜 시행착오 끝에 에버렛은 깨닫습니다. “피다한 사람들은 부족함이 없으며, 그들에게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느낌, 타락했다는 느낌, 구원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200년 간 서구의 선교사들이 그토록 애를 썼지만 개종에 실패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에버렛은 피다한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개종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던 자신의 오만과 편견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리고 정작 개종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욕심과 죄의식으로 마음을 어지럽히며 미래를 걱정하는 자신이라고 고백합니다.
새해는 또 무엇을 하며 어찌 살아야 할까 마음이 무거운 오늘, 피다한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조금 먹고 적게 자고 오래 깨어 있는 걸 자랑으로 삼는 사람들, 그래서 잠들기 전 서로에게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라고 인사하는 사람들. 그들 덕분에, 어제와 내일에 저당 잡힌 불쌍한 오늘에게 안녕을 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새해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부터 내 마음에 떠오른 일을 하겠다고 결심합니다.
한 해 동안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담아 인사드립니다. “잠들면 안 돼요. 거기 뱀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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