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은 아련한 동경이다. 낭만과 신화가 가득 쟁여져 있는 곳이다. 섬마을 선생님은 왠지 달콤한 로맨스와 깊은 사연을 지닌 주인공 일 것만 같다. 그래서 섬마을 유람에 나섰다. 섬마을 선생님들의 훈훈한 휴먼스토리와 낙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지면에 담아낼 작정이다. 서해의 백령·연평군도에서 남해 한려수도를 돌아 동해의 울릉도까지….
한 낮의 운동장은 텅 비어있었다. 네 단으로 이루어진 시멘트 스탠드가 우스꽝스럽게 보일만큼 넓고 커 보인다. 한때 까불고 깔깔거리는 아이들로 가득했을 공간이다. 운동회 땐 동네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김밥과 찐빵, 사이다를 마시며 잔치를 벌이던 장소였을 터이다.
그 많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전남 여수군 거문초등학교 동도분교장은 빈 학교처럼 보였다. 이순신장군 동상이 허허로운 교정을 굽어보고 있다. 장군의 철갑도 벌건 녹을 잔뜩 뒤집어쓴 누더기 꼴이다.
갑자기 어디선가 하모니카 소리가 흘러나온다. ‘오, 수재너’의 애잔한 곡조다.
“멀고먼 앨라배마 나의 고향은 그곳, 밴조를 메고 나는 너를 찾아 왔노라! 오, 수재너, 이 노래 부르자!~”
노래 소리를 따라 교사 안으로 들어간다. 중앙현관을 중심으로 양편에 교실 3개씩을 거느린 노란 단층 건물이다. 오른 편 끝 교실에서 학생들 네 명이 둘러 앉아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남학생 한 명에 여학생이 셋이다. 젊은 여선생님 한 분이 간간히 아이들의 틀린 부분을 지적해주고 있었다.
교실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남자 선생님 한 분이 인사를 건네며 다가온다. 선생님이 ‘협의실’이라는 팻말을 매단 교실로 안내를 한다. 잠시 후 하모니카 지도를 하던 여선생님도 협의실 소파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동도분교의 부부교사인 김상현(31), 장혜란(28) 선생님이다. 장 선생님이 귤 몇 알을 내 놓는다. 학교 뒷동산에서 수확한 거란다. 한 알을 까서 입에 넣어보니 달고 신 맛이 입에 가득 밴다.
“내일 학예회가 열립니다. 고도에 있는 거문초등학교에서 본교 학생들과 동도분교, 서도분교, 덕촌분교 학생들과 함께 잔치를 한답니다. 우리 아이들은 하모니카 연주를 하기로 돼 있어요.”(장 선생님)
광주교대 선후배 사이인 두 선생님은 2006년 12월 31일 결혼했다. 2009년 3월 함께 이곳으로 부임을 한 부부는 네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6학년인 김현준과 5학년 조서연은 남편의 반 학생들이고, 자매인 1학년 강래경과 3학년 강승희는 아내의 반 아이들이다. 아직 아기가 없는 부부에겐 이들이 바로 자신의 자녀들인 셈이다.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아이들이랑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다가 바지락 수제비도 해먹고, 바위 들춰서 해삼도 잡아다가 먹고 그런답니다. 현준이가 바다 일에는 프로예요. 낙지도 잘 잡고, 낚시도 선수급 여기 와서 생전처음 아이들과 함께 낚시를 해 봤는데 신기하게 잘 잡히더라고요. 요즘엔 학꽁치가 가장 많이 올라와요. 처음엔 잡힌 물고기를 바늘에서 빼내는 게 어렵더라고요. 워낙 파닥거리는 통에 손을 댈 수가 없었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현준이가 요령을 가르쳐주더군요. 물고기를 바닥에 탁 내동댕이치라는 거예요. 가르쳐 준대로 했더니 물고기가 잠시 기절을 해서 다루기가 쉽더군요. 잡아온 고기는 학생들과 함께 프라이팬에 구워먹고는 합니다.”(김 선생님)
마을 주민들도 두 선생님을 한 식구처럼 살갑게 대한다. 관사 앞엔 누군가 수시로 파김치 배추김치도 갖다놓는다. 장조림이나 멸치볶음 등 밑반찬을 만들어다 주는 분들도 있다. 문어 꽃게 등 해산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가 놓여 있을 때도 있다.
김 선생님과 장 선생님은 낮에는 동료이고, 밤에는 부부다. 이곳으로 발령을 받기 전까지는 서로 여보, 당신하고 부르던 호칭부터 바꾸어야 했다. 근무시간에는 서로 ‘김 선생님’, ‘장 선생님’하고 깍듯이 존대한다.
“처음엔 신랑보고 ‘김 선생님’ 하고 부르니까 어색하더라고요. 지금은 시댁 가서도 무심코 그렇게 부르다가 혼나는 경우도 있어요. 아무래도 좋은 점이 훨씬 많지요. 외딴 섬에 함께 있으니 정서적으로도 안정이 되고, 학교운영이나 가정경제 측면에서도 좋은 점이 많습니다. 우선 학교 행사 계획 등이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어떤 문제든 스물네 시간 함께 의논을 할 수 있잖아요. 관사를 함께 쓰니 난방비와 전기비 등 학교예산도 절약할 수 있고요.”(장 선생님)
섬으로 들어가자고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장 선생님이었다. 평소 ‘작은 학교 운동’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학교 운동’은 2001년 남한산 초등학교에서 시작됐다. 공교육 안에서 대안적 실험교육을 통해 새로운 학교를 만들려는 교사와 학부모들의 움직임이다. 작은 학교는 교사들에게 관료주의 학교 체제에서 벗어나 교육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경쟁보다는 인간적인 관계가 살아 있는 학교, 아이들의 자발성이 살아 숨 쉬는 학교,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학교가 바로 작은 학교다. 남한산 초등학교에서 시작된 작은 학교 운동은 교사와 학부모들의 호응 속에 거산 초등학교, 삼우 초등학교, 금성 초등학교, 상주남부 초등학교, 세월 초등학교, 별량 초등학교 송산분교장 등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큰 학교에서는 잡무가 너무 많아요. 정작 중요한 아이들 교육에는 몰두할 수가 없습니다. 학급당 학생들 숫자도 많아 어린이 개개인에게 신경을 쓰기도 어렵고요. 작은 학교에 가서 교육적 소신을 펴고 싶었습니다.”(김 선생님)
부부는 독일의 발도로프 교육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시작된 발도로프 교육은 전인교육, 열린 교육, 창의력 위주의 학습방법이다. 똑똑한 아이를 선별해내는 점수 위주 교육이 아니라 내재된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이다.
“학교는 재미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며 꿈을 키우는 행복한 공간이어야 하는 거지요. 발도로프 교육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아이들과 함께 밭도 일구고, 직접 옷 만들기 실습도 합니다. 아침 첫 수업시간은 시 낭송으로 시작합니다. 다양한 독서와 예체능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숨겨진 재능을 밖으로 이끌어 낼 수 있거든요. 바람직한 학교 교육은 ‘마중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장 선생님)
마중물….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였다. 새삼 산골에서 살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펌프질을 처음 시작할 때 필요한 물이 바로 마중물이다. 물을 한 바가지 쯤 펌프의 실린더 안에 붓고는 긴 손잡이를 위 아래로 저으면, 뻑뻑한 공기압이 느껴지면서 물이 따라 올라온다.
당시 시골엔 펌프 우물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우물이 있었다. 물이 지표면으로 드러나 손쉽게 바가지로 뜰 수 있는 박우물이 있는가 하면, 긴 막대기 끝에 매단 타래박으로 풀 수 있는 깊숙한 웅덩이의 물, 땅속 깊이 아득하게 두레박을 늘어트려야 길어 올릴 수 있는 우물물도 있다. 퍼 올리던 수동펌프는 읍내의 부잣집 마당에나 가야 볼 수 있었던 물건이었다.
사람의 재능을 끌어내는 방법도 이와 비슷하다는 게 장 선생님의 지론이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서로 다른 자신만의 달란트를 타고 나지만 저마다의 달란트는 내면 깊숙이 숨겨진 채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숨겨진 아이들의 달란트를 발견하고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게 바로 교사의 소임 아닐까요?”
작은 학교에서 작지 않은 기쁨을 발견했지만 고만고만한 고민거리도 생겨났다. 우선 두 개 학년을 묶어 한 개 학급으로 운영하는 복식수업은 그리 녹녹한 게 아니었다.
“한 쪽 학년을 지도하는 동안 다른 학년들은 자습을 해야 합니다. 한 학년 지도를 끝낸 뒤 익힘 문제를 내주고, 다른 학년을 지도해야 합니다. 적지 않은 요령이 필요해요. 이제 곧 6학년 현준이가 졸업하고 나면 교사 한명을 줄이게 될 겁니다. 그러면 5학년 서연이, 3학년 승희, 1학년 래경이 등 삼복식 수업을 해야 합니다. 학생은 세 명뿐이라지만 모두 다른 학년의 학생들을 동시에 가르치는 게 가능한 일인지….”
교육의 역할이 마중물을 넣고 펌프질을 하는 거라고 했던가? 양손으로 두 개의 펌프질을 하는 건 가능하지만 어떻게 한꺼번에 세 개의 펌프질을 할 수 있을까? 손이 세 개 달린 선생님이 있다면 혹 모르겠지만.
작별인사를 한 뒤 운동장으로 나섰다. 처음 들어올 때와는 달리 운동장이 그리 썰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두 선생님과 아이들이 뿜어내는 열정과 따스함에 나그네의 마음이 덥혀졌기 때문일까?
박상주 오지여행가
서도·동도·고도로 이루어진 삼형제섬
거문도는 삼형제 섬이다. 큰 형인 서도가 남북으로 길게 뻗친 형태로 둘째인 동도와 막내 섬인 고도를 품고 있다. 고도는 두 형님들 사이에 폭 안겨 있다. 서도와 고도는 다리로 연결돼 있다. 삼호교란 이름의 이 연도교는 파도에 떠밀려 갈세라 막내를 꼭 붙잡고 있는 큰 형의 손처럼 보인다. 그래도 여객선 터미널과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등 주요 행정기관은 모두 고도에 몰려 있다.
그러나 고도에서 바로 지척인 동도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개인 배를 불러야 했다. 모텔 주인이 가르쳐준 휴대전화로 연결을 했더니 10여분 만에 달려온다. 거문호라는 이름의 작은 배다. 서도와 동도, 고도 사이를 오가는 ‘바다 택시’인 셈이다.
서도 장촌포구에서 배를 내렸다. 작은 어선 10여 척이 어깨를 맞댄 채 정박해 있다. 막 고기잡이를 끝내고 들어온 배가 한 척 있었다. 중년의 부부가 잡아온 고기들을 상자 속에 가지런히 정리한다. 작업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더니 아주머니가 큼지막한 물고기 한 마리를 들고 포즈를 취해준다. 족히 40cm가 넘어 보이는 참돔이다. 펄떡거리는 저 놈이 올라왔을 때 어부 부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해안도로를 따라 길게 들어선 마을이 장촌(長村)이다. 길쭉한 마을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선착장 앞에 커다란 돌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돌 한 가운데에는 ‘장촌’이라는 마을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새겨져 있고, 그를 받치는 대리석 받침대 위엔 시 한편이 음각돼 있었다.
“희비(喜悲)의 세월은 ‘사리처’다
가슴에 묻고 엎드려
장촌인(長村人)의 발아래
등을 내 맡긴지/어언 사백년
문명이란 편리로
덮어 버리기엔/너무 무상하여
여기/이 돌을 세워/영원히 기념하노라.“
첫 문장이 뭉클하다. 희비로 얼룩진 모든 인생은 결국 영겁의 세월 속에 묻히고 마는 것을! 나머지 부분은 알쏭달쏭한 내용이다. 나그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곡절이 있을 터였다.
아침을 거른 탓인지 시장기가 몰려온다. 식당과 민박 간판을 함께 걸어놓은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런데 영업을 하지 않는단다. 이곳저곳 대 여섯 집을 들렀는데도 하나같이 여름 성수기에만 영업을 할 뿐 겨울엔 예약 손님만 받는다고 했다. 자칫 밥을 굶게 된 상황이었다.
마지막 한 곳을 더 들러보기로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기 굽는 냄새가 고소하게 후각을 자극한다. 손님 10여명이 둘러 앉아 지글지글 삼겹살을 구우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 데 주방에서 바쁘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던 주인아줌마가 고개를 빼고는 큰 소리로 말한다.
“오늘 손님 안 받아요!”
장사를 할 음식이 없다고 했다. 삼겹살을 굽고 있는 분들은 어촌계 모임으로 미리 예약을 한 손님들이라고 했다. 오전에 멍게 작업을 끝낸 뒤 점심 회식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물러나면 꼼짝없이 점심을 굶게 될 형편이었다.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 주시면 안 될까요?”
통사정을 하는 나그네의 모습이 안돼 보였던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일찍이 이렇게 맛있는 라면을 먹어 본 기억이 없다. 맥주 한병을 시켜 반주로 마셨다. 삽겹살을 굽고 있는 옆 테이블의 한 어른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포구 앞에 돌 비석이 하나 서 있던데, 무슨 사연이라도….”
“아, 그거. 우리 마을 개천에 놓여있던 징검다리 돌이요. 2000년 봄에 시멘트 다리가 생기면서 징검다리 돌들을 치웠지. 그 중에 가장 큰 놈을 비석으로 세운거야. 400년 동안 마을 사람들 물 건너 주느라고 고생했다고 치하하는 의미지. 정들었던 옛것이 자꾸 잊혀져 가는 게 서운하기도 했고….”
잊혀지는 게 어디 징검다리뿐이랴. 400년 세월 동안 저 징검다리 돌을 밟고 지났던 숱한 인생들은 이미 백골을 건너 진토(塵土)로 변했을 터. 거문도 뱃노래 자랑을 늘어놓는 어른들의 말씀을 한 동안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오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전 내내 잔뜩 찌푸리고 있던 하늘이 끝내 울음보를 터트리고 만 것이다. 방수 재킷의 모자를 덮어 썼다. 섬 북쪽으로 길을 잡았다. 거문초등학교 서도분교를 지나 왼편으로 구부러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오솔길은 왼편으로 이금포 해수욕장을 내려다보면서 한갓지게 뻗어있다. 멀리 그 길의 끝에 하얀 등대 하나가 비를 흠뻑 맞으며 외롭게 서 있다. 거문도 최북단에 위치한 녹산등대다. 등대지기마저 없는 무인등대여서 사무친 외로움을 안고 서 있는 등대다.
녹산등대에서 길을 되짚어 걸었다. 서도의 남단으로 나 있는 해안도로를 걷는다. 섬 남단의 중심인 덕촌 마을까지 6km의 거리다. 덕촌 마을은 한말 의병장 임병찬 의사(1851∼1916)가 단식 끝에 돌아가신 곳이다. 전북 옥구 출신 임 의사는 1914년 항일의병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돼 거문도로 유배됐다. 덕촌마을 앞에는 임 선생의 순지비(殉趾碑)가 서있다.
빗줄기가 강해지고 있었다. 바지의 방수력이 약한 탓인지 속옷으로 축축함이 배어들기 시작한다. 그래도 남도의 겨울비는 따뜻하다. 택시를 부를까 하다가 다시 걷는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한 집 두 집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바다 건너편 동도와 고도를 밝히는 빗속의 불빛이 보석처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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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낮의 운동장은 텅 비어있었다. 네 단으로 이루어진 시멘트 스탠드가 우스꽝스럽게 보일만큼 넓고 커 보인다. 한때 까불고 깔깔거리는 아이들로 가득했을 공간이다. 운동회 땐 동네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김밥과 찐빵, 사이다를 마시며 잔치를 벌이던 장소였을 터이다.
그 많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전남 여수군 거문초등학교 동도분교장은 빈 학교처럼 보였다. 이순신장군 동상이 허허로운 교정을 굽어보고 있다. 장군의 철갑도 벌건 녹을 잔뜩 뒤집어쓴 누더기 꼴이다.
갑자기 어디선가 하모니카 소리가 흘러나온다. ‘오, 수재너’의 애잔한 곡조다.
“멀고먼 앨라배마 나의 고향은 그곳, 밴조를 메고 나는 너를 찾아 왔노라! 오, 수재너, 이 노래 부르자!~”
노래 소리를 따라 교사 안으로 들어간다. 중앙현관을 중심으로 양편에 교실 3개씩을 거느린 노란 단층 건물이다. 오른 편 끝 교실에서 학생들 네 명이 둘러 앉아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남학생 한 명에 여학생이 셋이다. 젊은 여선생님 한 분이 간간히 아이들의 틀린 부분을 지적해주고 있었다.
교실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남자 선생님 한 분이 인사를 건네며 다가온다. 선생님이 ‘협의실’이라는 팻말을 매단 교실로 안내를 한다. 잠시 후 하모니카 지도를 하던 여선생님도 협의실 소파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동도분교의 부부교사인 김상현(31), 장혜란(28) 선생님이다. 장 선생님이 귤 몇 알을 내 놓는다. 학교 뒷동산에서 수확한 거란다. 한 알을 까서 입에 넣어보니 달고 신 맛이 입에 가득 밴다.
“내일 학예회가 열립니다. 고도에 있는 거문초등학교에서 본교 학생들과 동도분교, 서도분교, 덕촌분교 학생들과 함께 잔치를 한답니다. 우리 아이들은 하모니카 연주를 하기로 돼 있어요.”(장 선생님)
광주교대 선후배 사이인 두 선생님은 2006년 12월 31일 결혼했다. 2009년 3월 함께 이곳으로 부임을 한 부부는 네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6학년인 김현준과 5학년 조서연은 남편의 반 학생들이고, 자매인 1학년 강래경과 3학년 강승희는 아내의 반 아이들이다. 아직 아기가 없는 부부에겐 이들이 바로 자신의 자녀들인 셈이다.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아이들이랑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다가 바지락 수제비도 해먹고, 바위 들춰서 해삼도 잡아다가 먹고 그런답니다. 현준이가 바다 일에는 프로예요. 낙지도 잘 잡고, 낚시도 선수급 여기 와서 생전처음 아이들과 함께 낚시를 해 봤는데 신기하게 잘 잡히더라고요. 요즘엔 학꽁치가 가장 많이 올라와요. 처음엔 잡힌 물고기를 바늘에서 빼내는 게 어렵더라고요. 워낙 파닥거리는 통에 손을 댈 수가 없었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현준이가 요령을 가르쳐주더군요. 물고기를 바닥에 탁 내동댕이치라는 거예요. 가르쳐 준대로 했더니 물고기가 잠시 기절을 해서 다루기가 쉽더군요. 잡아온 고기는 학생들과 함께 프라이팬에 구워먹고는 합니다.”(김 선생님)
마을 주민들도 두 선생님을 한 식구처럼 살갑게 대한다. 관사 앞엔 누군가 수시로 파김치 배추김치도 갖다놓는다. 장조림이나 멸치볶음 등 밑반찬을 만들어다 주는 분들도 있다. 문어 꽃게 등 해산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가 놓여 있을 때도 있다.
김 선생님과 장 선생님은 낮에는 동료이고, 밤에는 부부다. 이곳으로 발령을 받기 전까지는 서로 여보, 당신하고 부르던 호칭부터 바꾸어야 했다. 근무시간에는 서로 ‘김 선생님’, ‘장 선생님’하고 깍듯이 존대한다.
“처음엔 신랑보고 ‘김 선생님’ 하고 부르니까 어색하더라고요. 지금은 시댁 가서도 무심코 그렇게 부르다가 혼나는 경우도 있어요. 아무래도 좋은 점이 훨씬 많지요. 외딴 섬에 함께 있으니 정서적으로도 안정이 되고, 학교운영이나 가정경제 측면에서도 좋은 점이 많습니다. 우선 학교 행사 계획 등이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어떤 문제든 스물네 시간 함께 의논을 할 수 있잖아요. 관사를 함께 쓰니 난방비와 전기비 등 학교예산도 절약할 수 있고요.”(장 선생님)
섬으로 들어가자고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장 선생님이었다. 평소 ‘작은 학교 운동’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학교 운동’은 2001년 남한산 초등학교에서 시작됐다. 공교육 안에서 대안적 실험교육을 통해 새로운 학교를 만들려는 교사와 학부모들의 움직임이다. 작은 학교는 교사들에게 관료주의 학교 체제에서 벗어나 교육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경쟁보다는 인간적인 관계가 살아 있는 학교, 아이들의 자발성이 살아 숨 쉬는 학교,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학교가 바로 작은 학교다. 남한산 초등학교에서 시작된 작은 학교 운동은 교사와 학부모들의 호응 속에 거산 초등학교, 삼우 초등학교, 금성 초등학교, 상주남부 초등학교, 세월 초등학교, 별량 초등학교 송산분교장 등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큰 학교에서는 잡무가 너무 많아요. 정작 중요한 아이들 교육에는 몰두할 수가 없습니다. 학급당 학생들 숫자도 많아 어린이 개개인에게 신경을 쓰기도 어렵고요. 작은 학교에 가서 교육적 소신을 펴고 싶었습니다.”(김 선생님)
부부는 독일의 발도로프 교육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시작된 발도로프 교육은 전인교육, 열린 교육, 창의력 위주의 학습방법이다. 똑똑한 아이를 선별해내는 점수 위주 교육이 아니라 내재된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이다.
“학교는 재미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며 꿈을 키우는 행복한 공간이어야 하는 거지요. 발도로프 교육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아이들과 함께 밭도 일구고, 직접 옷 만들기 실습도 합니다. 아침 첫 수업시간은 시 낭송으로 시작합니다. 다양한 독서와 예체능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숨겨진 재능을 밖으로 이끌어 낼 수 있거든요. 바람직한 학교 교육은 ‘마중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장 선생님)
마중물….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였다. 새삼 산골에서 살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펌프질을 처음 시작할 때 필요한 물이 바로 마중물이다. 물을 한 바가지 쯤 펌프의 실린더 안에 붓고는 긴 손잡이를 위 아래로 저으면, 뻑뻑한 공기압이 느껴지면서 물이 따라 올라온다.
당시 시골엔 펌프 우물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우물이 있었다. 물이 지표면으로 드러나 손쉽게 바가지로 뜰 수 있는 박우물이 있는가 하면, 긴 막대기 끝에 매단 타래박으로 풀 수 있는 깊숙한 웅덩이의 물, 땅속 깊이 아득하게 두레박을 늘어트려야 길어 올릴 수 있는 우물물도 있다. 퍼 올리던 수동펌프는 읍내의 부잣집 마당에나 가야 볼 수 있었던 물건이었다.
사람의 재능을 끌어내는 방법도 이와 비슷하다는 게 장 선생님의 지론이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서로 다른 자신만의 달란트를 타고 나지만 저마다의 달란트는 내면 깊숙이 숨겨진 채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숨겨진 아이들의 달란트를 발견하고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게 바로 교사의 소임 아닐까요?”
작은 학교에서 작지 않은 기쁨을 발견했지만 고만고만한 고민거리도 생겨났다. 우선 두 개 학년을 묶어 한 개 학급으로 운영하는 복식수업은 그리 녹녹한 게 아니었다.
“한 쪽 학년을 지도하는 동안 다른 학년들은 자습을 해야 합니다. 한 학년 지도를 끝낸 뒤 익힘 문제를 내주고, 다른 학년을 지도해야 합니다. 적지 않은 요령이 필요해요. 이제 곧 6학년 현준이가 졸업하고 나면 교사 한명을 줄이게 될 겁니다. 그러면 5학년 서연이, 3학년 승희, 1학년 래경이 등 삼복식 수업을 해야 합니다. 학생은 세 명뿐이라지만 모두 다른 학년의 학생들을 동시에 가르치는 게 가능한 일인지….”
교육의 역할이 마중물을 넣고 펌프질을 하는 거라고 했던가? 양손으로 두 개의 펌프질을 하는 건 가능하지만 어떻게 한꺼번에 세 개의 펌프질을 할 수 있을까? 손이 세 개 달린 선생님이 있다면 혹 모르겠지만.
작별인사를 한 뒤 운동장으로 나섰다. 처음 들어올 때와는 달리 운동장이 그리 썰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두 선생님과 아이들이 뿜어내는 열정과 따스함에 나그네의 마음이 덥혀졌기 때문일까?
박상주 오지여행가
서도·동도·고도로 이루어진 삼형제섬
거문도는 삼형제 섬이다. 큰 형인 서도가 남북으로 길게 뻗친 형태로 둘째인 동도와 막내 섬인 고도를 품고 있다. 고도는 두 형님들 사이에 폭 안겨 있다. 서도와 고도는 다리로 연결돼 있다. 삼호교란 이름의 이 연도교는 파도에 떠밀려 갈세라 막내를 꼭 붙잡고 있는 큰 형의 손처럼 보인다. 그래도 여객선 터미널과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등 주요 행정기관은 모두 고도에 몰려 있다.
그러나 고도에서 바로 지척인 동도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개인 배를 불러야 했다. 모텔 주인이 가르쳐준 휴대전화로 연결을 했더니 10여분 만에 달려온다. 거문호라는 이름의 작은 배다. 서도와 동도, 고도 사이를 오가는 ‘바다 택시’인 셈이다.
서도 장촌포구에서 배를 내렸다. 작은 어선 10여 척이 어깨를 맞댄 채 정박해 있다. 막 고기잡이를 끝내고 들어온 배가 한 척 있었다. 중년의 부부가 잡아온 고기들을 상자 속에 가지런히 정리한다. 작업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더니 아주머니가 큼지막한 물고기 한 마리를 들고 포즈를 취해준다. 족히 40cm가 넘어 보이는 참돔이다. 펄떡거리는 저 놈이 올라왔을 때 어부 부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해안도로를 따라 길게 들어선 마을이 장촌(長村)이다. 길쭉한 마을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선착장 앞에 커다란 돌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돌 한 가운데에는 ‘장촌’이라는 마을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새겨져 있고, 그를 받치는 대리석 받침대 위엔 시 한편이 음각돼 있었다.
“희비(喜悲)의 세월은 ‘사리처’다
가슴에 묻고 엎드려
장촌인(長村人)의 발아래
등을 내 맡긴지/어언 사백년
문명이란 편리로
덮어 버리기엔/너무 무상하여
여기/이 돌을 세워/영원히 기념하노라.“
첫 문장이 뭉클하다. 희비로 얼룩진 모든 인생은 결국 영겁의 세월 속에 묻히고 마는 것을! 나머지 부분은 알쏭달쏭한 내용이다. 나그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곡절이 있을 터였다.
아침을 거른 탓인지 시장기가 몰려온다. 식당과 민박 간판을 함께 걸어놓은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런데 영업을 하지 않는단다. 이곳저곳 대 여섯 집을 들렀는데도 하나같이 여름 성수기에만 영업을 할 뿐 겨울엔 예약 손님만 받는다고 했다. 자칫 밥을 굶게 된 상황이었다.
마지막 한 곳을 더 들러보기로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기 굽는 냄새가 고소하게 후각을 자극한다. 손님 10여명이 둘러 앉아 지글지글 삼겹살을 구우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 데 주방에서 바쁘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던 주인아줌마가 고개를 빼고는 큰 소리로 말한다.
“오늘 손님 안 받아요!”
장사를 할 음식이 없다고 했다. 삼겹살을 굽고 있는 분들은 어촌계 모임으로 미리 예약을 한 손님들이라고 했다. 오전에 멍게 작업을 끝낸 뒤 점심 회식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물러나면 꼼짝없이 점심을 굶게 될 형편이었다.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 주시면 안 될까요?”
통사정을 하는 나그네의 모습이 안돼 보였던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일찍이 이렇게 맛있는 라면을 먹어 본 기억이 없다. 맥주 한병을 시켜 반주로 마셨다. 삽겹살을 굽고 있는 옆 테이블의 한 어른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포구 앞에 돌 비석이 하나 서 있던데, 무슨 사연이라도….”
“아, 그거. 우리 마을 개천에 놓여있던 징검다리 돌이요. 2000년 봄에 시멘트 다리가 생기면서 징검다리 돌들을 치웠지. 그 중에 가장 큰 놈을 비석으로 세운거야. 400년 동안 마을 사람들 물 건너 주느라고 고생했다고 치하하는 의미지. 정들었던 옛것이 자꾸 잊혀져 가는 게 서운하기도 했고….”
잊혀지는 게 어디 징검다리뿐이랴. 400년 세월 동안 저 징검다리 돌을 밟고 지났던 숱한 인생들은 이미 백골을 건너 진토(塵土)로 변했을 터. 거문도 뱃노래 자랑을 늘어놓는 어른들의 말씀을 한 동안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오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전 내내 잔뜩 찌푸리고 있던 하늘이 끝내 울음보를 터트리고 만 것이다. 방수 재킷의 모자를 덮어 썼다. 섬 북쪽으로 길을 잡았다. 거문초등학교 서도분교를 지나 왼편으로 구부러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오솔길은 왼편으로 이금포 해수욕장을 내려다보면서 한갓지게 뻗어있다. 멀리 그 길의 끝에 하얀 등대 하나가 비를 흠뻑 맞으며 외롭게 서 있다. 거문도 최북단에 위치한 녹산등대다. 등대지기마저 없는 무인등대여서 사무친 외로움을 안고 서 있는 등대다.
녹산등대에서 길을 되짚어 걸었다. 서도의 남단으로 나 있는 해안도로를 걷는다. 섬 남단의 중심인 덕촌 마을까지 6km의 거리다. 덕촌 마을은 한말 의병장 임병찬 의사(1851∼1916)가 단식 끝에 돌아가신 곳이다. 전북 옥구 출신 임 의사는 1914년 항일의병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돼 거문도로 유배됐다. 덕촌마을 앞에는 임 선생의 순지비(殉趾碑)가 서있다.
빗줄기가 강해지고 있었다. 바지의 방수력이 약한 탓인지 속옷으로 축축함이 배어들기 시작한다. 그래도 남도의 겨울비는 따뜻하다. 택시를 부를까 하다가 다시 걷는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한 집 두 집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바다 건너편 동도와 고도를 밝히는 빗속의 불빛이 보석처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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