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정원도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2전대장
사진 비니 행정팀 정원도 옹
“독도는 내게 자식같은 섬”
57년 전 의용수비대원으로 독도 지켜내 … “민간인 상주, 영토분쟁 끝내야”
“울릉도 주민에게는 자식같은 섬이고 생계를 해결한 텃밭같은 곳이며 바다에서 길잡이가 되는 등대입니다.”
정원도(82·경북 울릉군 울릉읍)씨는 57년 전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스물다섯 혈기왕성한 나이에 독도의용수비대원으로 활동했던 그 시절….
◆전쟁 부상 안고 독도경비 나서 =
그가 요즘엔 뿔이 나 있다. 또다시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 때문이다. 정씨는 “억지 주장을 교과서에 수록해 후세들에게 세뇌교육을 시킬 속셈”이라며 “57년 전 독도에 살면서 섬을 지켜낸 사람들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분하고 속상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아직도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2전대장’이라는 당시 직함을 새긴 명함을 사용하고 있는 그로서는 그럴 만하다.
정씨가 독도의용수비대에 참여한 건 1953년. 1948년 입대해 6.25전쟁에 참전, 총상을 입고 제대한 후 고향 울릉도로 돌아와 쉬고 있던 때였다. 독도 인근 해역으로 조업 나갔던 어민들이 일본 어선과 실습선 등이 독도에 ‘다케시마(竹島)’라는 푯말을 꽂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을 비롯해 서기종씨 등을 포함한 9명이 4톤짜리 동력선을 타고 독도로 향했다. 울릉도 도동항(현 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 8시간 정도 파도와 싸우다보니 독도였다.
물골이 있는 서도와 동도를 순찰한 뒤 동도에 막사를 지어 본격적인 경비에 착수하기로 했다. 현재 동도 전경부대 막사 옆에 막사를 지었고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등으로 무장했다. 식사는 우럭과 미역. 집에서 들고간 된장과 소금 간으로 버텼다.
대원은 곧 33명으로 늘었다. 두 개 조로 나눠 한달씩 교대근무를 시작했다. 정씨는 “교대근무를 끝내고 돌아오다가 뱃길을 잃고 72시간 동안 망망대해를 표류한 적도 있다”고 돌이켰다.
1953년 6월엔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이 독도에 접안하려고 하자 전마선(노를 젓는 소형목선)을 타고 가 경고하며 돌려보냈다. 동도 바위에 ‘한국령(韓國領)’이라는 글을 새겼던 1954년엔 일본의 해안보안청 순시선과 교전을 벌였다. 81㎜박격포와 M1 소총, 경기관총 등을 발포해 일본군이 부상을 입자 이후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에 항의하기도 했다.
그 연유로 1956년 12월 말에 수비대가 독도에서 철수하고 대신 경찰이 정식으로 주둔하게 됐다. 수비대원 중 8명이 경찰로 발령, 20여년 이상 울릉도와 독도에서 근무했다. 정씨 역시 1년 2개월가량 경찰로 재직했다.
◆주민들이 지켜내야 =
“젊은이들이 무장을 하고 독도로 들어갈 때 일부 주민들은 ‘미쳤다’고 놀려대기도 했지요. 그러나 대원들은 영토를 사수해야한다는 애국심에 불타올라 목숨은 염두에도 없었어요”
정씨는 “당시 의용수비대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영토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며 “57년 전 의용수비대처럼 주민들이 거주하며 독도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무인도’가 아닌 ‘사람 사는 섬’, 주민들이 살고 관광객들이 하룻밤이라도 자고 가는 섬이어야 독도를 우리 땅으로 온전히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괭이갈매기 보호보다 국토 사수가 우선 아닌가요. 민간인이 살아야 앞으로도 시빗거리를 없애고 실효적 지배를 할 수 있어요.”
정씨는 “현대 건축기술이라면 동도의 자갈지역 해안과 서도 일부 지역에 10여가구 이상 얼마든지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울릉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사진설명
57년 전 독도사수에 나섰던 정원도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2전대장이 울릉도 저동항 방파제에서 독도 방향을 가리키며 당시 활동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최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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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비니 행정팀 정원도 옹
“독도는 내게 자식같은 섬”
57년 전 의용수비대원으로 독도 지켜내 … “민간인 상주, 영토분쟁 끝내야”
“울릉도 주민에게는 자식같은 섬이고 생계를 해결한 텃밭같은 곳이며 바다에서 길잡이가 되는 등대입니다.”
정원도(82·경북 울릉군 울릉읍)씨는 57년 전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스물다섯 혈기왕성한 나이에 독도의용수비대원으로 활동했던 그 시절….
◆전쟁 부상 안고 독도경비 나서 =
그가 요즘엔 뿔이 나 있다. 또다시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 때문이다. 정씨는 “억지 주장을 교과서에 수록해 후세들에게 세뇌교육을 시킬 속셈”이라며 “57년 전 독도에 살면서 섬을 지켜낸 사람들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분하고 속상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아직도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2전대장’이라는 당시 직함을 새긴 명함을 사용하고 있는 그로서는 그럴 만하다.
정씨가 독도의용수비대에 참여한 건 1953년. 1948년 입대해 6.25전쟁에 참전, 총상을 입고 제대한 후 고향 울릉도로 돌아와 쉬고 있던 때였다. 독도 인근 해역으로 조업 나갔던 어민들이 일본 어선과 실습선 등이 독도에 ‘다케시마(竹島)’라는 푯말을 꽂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을 비롯해 서기종씨 등을 포함한 9명이 4톤짜리 동력선을 타고 독도로 향했다. 울릉도 도동항(현 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 8시간 정도 파도와 싸우다보니 독도였다.
물골이 있는 서도와 동도를 순찰한 뒤 동도에 막사를 지어 본격적인 경비에 착수하기로 했다. 현재 동도 전경부대 막사 옆에 막사를 지었고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등으로 무장했다. 식사는 우럭과 미역. 집에서 들고간 된장과 소금 간으로 버텼다.
대원은 곧 33명으로 늘었다. 두 개 조로 나눠 한달씩 교대근무를 시작했다. 정씨는 “교대근무를 끝내고 돌아오다가 뱃길을 잃고 72시간 동안 망망대해를 표류한 적도 있다”고 돌이켰다.
1953년 6월엔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이 독도에 접안하려고 하자 전마선(노를 젓는 소형목선)을 타고 가 경고하며 돌려보냈다. 동도 바위에 ‘한국령(韓國領)’이라는 글을 새겼던 1954년엔 일본의 해안보안청 순시선과 교전을 벌였다. 81㎜박격포와 M1 소총, 경기관총 등을 발포해 일본군이 부상을 입자 이후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에 항의하기도 했다.
그 연유로 1956년 12월 말에 수비대가 독도에서 철수하고 대신 경찰이 정식으로 주둔하게 됐다. 수비대원 중 8명이 경찰로 발령, 20여년 이상 울릉도와 독도에서 근무했다. 정씨 역시 1년 2개월가량 경찰로 재직했다.
◆주민들이 지켜내야 =
“젊은이들이 무장을 하고 독도로 들어갈 때 일부 주민들은 ‘미쳤다’고 놀려대기도 했지요. 그러나 대원들은 영토를 사수해야한다는 애국심에 불타올라 목숨은 염두에도 없었어요”
정씨는 “당시 의용수비대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영토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며 “57년 전 의용수비대처럼 주민들이 거주하며 독도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무인도’가 아닌 ‘사람 사는 섬’, 주민들이 살고 관광객들이 하룻밤이라도 자고 가는 섬이어야 독도를 우리 땅으로 온전히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괭이갈매기 보호보다 국토 사수가 우선 아닌가요. 민간인이 살아야 앞으로도 시빗거리를 없애고 실효적 지배를 할 수 있어요.”
정씨는 “현대 건축기술이라면 동도의 자갈지역 해안과 서도 일부 지역에 10여가구 이상 얼마든지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울릉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사진설명
57년 전 독도사수에 나섰던 정원도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2전대장이 울릉도 저동항 방파제에서 독도 방향을 가리키며 당시 활동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최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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