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은 보통 군대와 다르다
문창재 (본지 논설고문)
대한민국 해군은 해방조국의 바다를 지키려는 한 해양인의 열정으로 태어난 사조직 해방병단(海防兵團)을 모태로 한 군대다. 그것이 미군정의 인정을 받아 조선해안경비대가 되었다가, 정부수립 후 해군으로 발전했다. 육군의 모태인 국방경비대보다 출발이 빨랐다.
한국해군의 아버지는 중국 상해 중앙대학 항해과 출신의 젊은 해양인 손원일이었다. 광복과 함께 귀국한 그는 1945년 8월 23일부터 해군 건설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전봇대에 벽보를 붙이고,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끌어 모은 지원자가 70명이었다.
그 인원으로 그해 11월 11일 해방병단을 창설하여, 미 군정청으로부터 해안경비 활동 위탁을 받고 진해로 내려갔다. 8월부터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느라고 사재를 털어넣어, 진해에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여력이 없었다. 군정청에서도 지원이 없어 여관 잠을 자고 굶다시피 하면서 훈련을 강행했다. 끝까지 고생을 참아 이긴 사람 37명이 해군의 전신인 해안경비대 창설멤버였다.
장병들 성금 모아 군함 도입
1946년 6월 15일 조선해안경비대로 바뀌면서부터 군대의 모습을 갖추어, 본격적으로 해안경비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이 탄생한 1948년 8월 15일 비로소 해군이라는 군대가 되었다.
이름은 군대였지만 인원과 장비는 초라했다. 일본군이 쓰던 소해정(JMS) 11척과 미군 소해정(YMS) 17척 등 34척에 불과했다. 독립한 지 4년째 되는 나라의 해군에 전함은 한 척도 없었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이 된 손원일은 자나 깨나 전함 갖는 게 소원이었다. 나라 사정을 뻔히 아는 터에 예산을 요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공격력이 없는 군대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궁리 끝에 짜낸 아이디어가 모금운동이었다. 그는 해군본부에 ‘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라는 임시 조직을 만들어 스스로 위원장이 되었다. 참모회의를 열어 해군장병들이 솔선수범을 보이기로 결의했다. 장교는 봉급의 10%, 병조장은 7%, 하사관과 수병은 5%를 매달 공제해 기금을 불려나갔다.
외출외박 나간 장병들은 반드시 공병이나 고철을 들고 돌아와야 했다. 장교 부인들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수예품 같은 것을 모아 바자회를 열고, 옷감을 끊어다가 작업복을 만들어 판 수입금을 보탰다. 타군과 공무원들도 거들었다. 군과 공무원이 움직이니까 민간에서도 모금을 돕기 시작했다.
4개월 만에 1만5000달러의 기금이 마련되었다. 그 돈을 들고 경무대로 들어가 보고하는 손 참모총장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4만5000달러를 보태 주었다. 우리 기술로는 전함 건조가 어렵다는 보고에, 이 대통령은 “미국 가서 중고전함을 사 오라” 했다.
그렇게 사들인 최초의 전함이 ‘백두산함’이었다. 배가 들어온 것은 1950년 4월 10일. 국민성금으로 산 전투함이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다는 사람이 많았다. 2개월이 넘도록 전국 항구를 돌며 백두산함을 선보이고 진해에 귀항한 것이 6월 24일 오후였다.
이튿날 오전 백두산은 “동해안 묵호 지방에 인민군 특공부대가 상륙하고 있으니 급히 가서 쳐부수라”는 급전을 받고 25일 오후 진해를 떠났다. 항해 중 울산 앞바다에서 괴선박을 적발, 격전 끝에 침몰시키는 수훈을 세웠다. 6월 26일 새벽이었다. 해전 중 기관실에서 적탄을 맞은 두 수병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끝까지 함께 싸우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배는 부산에 상륙시킬 특공대원 600명을 태운 북한 수송선이었다. 그 배를 격침시키지 못했으면 부산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국내외 전사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고 천안함 46용사 합동영결식 날 사이렌에 맞추어 묵념을 하는 동안, 우리 해군에 대한 국민의 남다른 사랑이 떠올랐다. 그렇다. 한국 해군은 보통의 군대가 아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극진한 애정으로 키운 군대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해군은 6·25 전쟁 기간 확실한 제해권을 행사하면서 피란민 수송에 큰 공을 세웠다. 전후에는 주둔지와 도서지방 봉사사업 등으로 그 사랑에 보답했다.
강한 군대로 거듭 태어나야
분향소마다 넘쳐나던 조문객과 성금 기탁자들, 살아남은 장병의 마음을 헤아려 참아 둔 그 많은 의문들, 구조 중 순직한 사람들 가족까지 영결식에 달려와 분향한 극진한 사랑 앞에 2010년의 해군은 분명한 말로 지금의 심정을 말해야 한다. 극진한 애정에 보답해야 한다.
국민의 사랑으로 태어나고 자란 군대는 결코 국민에게 감추려 하지 않겠으며, 강하고 떳떳한 군대로 거듭 태어나겠다고 맹서하고 다짐해야 한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문창재 (본지 논설고문)
대한민국 해군은 해방조국의 바다를 지키려는 한 해양인의 열정으로 태어난 사조직 해방병단(海防兵團)을 모태로 한 군대다. 그것이 미군정의 인정을 받아 조선해안경비대가 되었다가, 정부수립 후 해군으로 발전했다. 육군의 모태인 국방경비대보다 출발이 빨랐다.
한국해군의 아버지는 중국 상해 중앙대학 항해과 출신의 젊은 해양인 손원일이었다. 광복과 함께 귀국한 그는 1945년 8월 23일부터 해군 건설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전봇대에 벽보를 붙이고,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끌어 모은 지원자가 70명이었다.
그 인원으로 그해 11월 11일 해방병단을 창설하여, 미 군정청으로부터 해안경비 활동 위탁을 받고 진해로 내려갔다. 8월부터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느라고 사재를 털어넣어, 진해에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여력이 없었다. 군정청에서도 지원이 없어 여관 잠을 자고 굶다시피 하면서 훈련을 강행했다. 끝까지 고생을 참아 이긴 사람 37명이 해군의 전신인 해안경비대 창설멤버였다.
장병들 성금 모아 군함 도입
1946년 6월 15일 조선해안경비대로 바뀌면서부터 군대의 모습을 갖추어, 본격적으로 해안경비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이 탄생한 1948년 8월 15일 비로소 해군이라는 군대가 되었다.
이름은 군대였지만 인원과 장비는 초라했다. 일본군이 쓰던 소해정(JMS) 11척과 미군 소해정(YMS) 17척 등 34척에 불과했다. 독립한 지 4년째 되는 나라의 해군에 전함은 한 척도 없었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이 된 손원일은 자나 깨나 전함 갖는 게 소원이었다. 나라 사정을 뻔히 아는 터에 예산을 요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공격력이 없는 군대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궁리 끝에 짜낸 아이디어가 모금운동이었다. 그는 해군본부에 ‘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라는 임시 조직을 만들어 스스로 위원장이 되었다. 참모회의를 열어 해군장병들이 솔선수범을 보이기로 결의했다. 장교는 봉급의 10%, 병조장은 7%, 하사관과 수병은 5%를 매달 공제해 기금을 불려나갔다.
외출외박 나간 장병들은 반드시 공병이나 고철을 들고 돌아와야 했다. 장교 부인들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수예품 같은 것을 모아 바자회를 열고, 옷감을 끊어다가 작업복을 만들어 판 수입금을 보탰다. 타군과 공무원들도 거들었다. 군과 공무원이 움직이니까 민간에서도 모금을 돕기 시작했다.
4개월 만에 1만5000달러의 기금이 마련되었다. 그 돈을 들고 경무대로 들어가 보고하는 손 참모총장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4만5000달러를 보태 주었다. 우리 기술로는 전함 건조가 어렵다는 보고에, 이 대통령은 “미국 가서 중고전함을 사 오라” 했다.
그렇게 사들인 최초의 전함이 ‘백두산함’이었다. 배가 들어온 것은 1950년 4월 10일. 국민성금으로 산 전투함이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다는 사람이 많았다. 2개월이 넘도록 전국 항구를 돌며 백두산함을 선보이고 진해에 귀항한 것이 6월 24일 오후였다.
이튿날 오전 백두산은 “동해안 묵호 지방에 인민군 특공부대가 상륙하고 있으니 급히 가서 쳐부수라”는 급전을 받고 25일 오후 진해를 떠났다. 항해 중 울산 앞바다에서 괴선박을 적발, 격전 끝에 침몰시키는 수훈을 세웠다. 6월 26일 새벽이었다. 해전 중 기관실에서 적탄을 맞은 두 수병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끝까지 함께 싸우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배는 부산에 상륙시킬 특공대원 600명을 태운 북한 수송선이었다. 그 배를 격침시키지 못했으면 부산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국내외 전사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고 천안함 46용사 합동영결식 날 사이렌에 맞추어 묵념을 하는 동안, 우리 해군에 대한 국민의 남다른 사랑이 떠올랐다. 그렇다. 한국 해군은 보통의 군대가 아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극진한 애정으로 키운 군대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해군은 6·25 전쟁 기간 확실한 제해권을 행사하면서 피란민 수송에 큰 공을 세웠다. 전후에는 주둔지와 도서지방 봉사사업 등으로 그 사랑에 보답했다.
강한 군대로 거듭 태어나야
분향소마다 넘쳐나던 조문객과 성금 기탁자들, 살아남은 장병의 마음을 헤아려 참아 둔 그 많은 의문들, 구조 중 순직한 사람들 가족까지 영결식에 달려와 분향한 극진한 사랑 앞에 2010년의 해군은 분명한 말로 지금의 심정을 말해야 한다. 극진한 애정에 보답해야 한다.
국민의 사랑으로 태어나고 자란 군대는 결코 국민에게 감추려 하지 않겠으며, 강하고 떳떳한 군대로 거듭 태어나겠다고 맹서하고 다짐해야 한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