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가 되려던 은퇴기자가 쓴 소설 … 사랑만이 어둠 벗어나게 한다
민병택 지음/뿌리깊은나무/1만8천원
이 소설에는 어둠이 배어있다. 동굴의 어둠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동굴’처럼 그림자의 벽은 빛 세상의 가능성을 반어(反語)로 품고 있다.
작가 민병택 씨는 ‘진혼일기’에서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 영혼과 물질의 대결이라는 오래된 주제다. 그것은 유사 이래 인간을 줄곧 따라다닌 낡은 질문이지만 우리 사회가 물질주의의 광란 속에 사로잡힌 뒤 망각한 질문이기도 하다.
원초적인 것에는 강렬함이 있다. 이 소설은 강렬한 조명에 못 박힌 고정된 세트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과장된 동작과 치열한 대사가 울려 퍼지는 연극무대를 연상시킨다. 캐릭터들의 충돌, 운명처럼 엮여져 가는 사건의 진행, 모두 그렇다.
소설은 그 첫 문장부터 응축된 에너지를 뿜어내듯 거친 숨소리를 낸다. “만용 하나만을 밑천 삼아 무작정 악마의 소굴로 투신해야 할까, 발을 빼야 하나?” 인습과 독선에 맞서던 주인공 김준수 신부는 “교구에서 가장 악지가 드세며 섬뜩하고 께름칙한 귀양지로 된서리 맞은 두메산골 본당”으로 전근이 되자 격렬한 회의에 빠진다.
그가 서슴지 않고 ‘악마의 소굴’로 규정한 새 임지가 이 소설의 무대다. 병인박해 때 수백 명의 순교자가 기꺼이 목숨을 버렸던 성지는 이제 소작농, 하루살이의 신세로 떨어진 그 후손들이 죽음을 앞둔 대지주의 딸 정금녀의 유산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지옥도가 펼쳐지는 곳으로 변했다.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우리가 망각 속으로 떠밀었던 악몽의 파편들이다.
그 악몽의 태피스트리는 국토분단, 좌우대립, 골육상잔을 벌였던 내전의 뒤끝이라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직조한다. 그것은 경제개발의 진군나팔 속에 우리 시대가 편리하게 과거 속에 낙오시킨 장면들이다.
그 과거 파묻기는 우리의 현재를 규정짓는 과거의 모습들을 함께 매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홀로그래피의 망령들은 우리의 눈먼 현재, 부동산 가격이 삶의 정보를 모두 구성하는 듯싶은 현재의 메마른 인간들에게서 어떤 원형적 인간의 모습을 봉합해 내기 위해 필요한 초혼의 춤을 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영화론에서 20세기의 대중문화를 의안(義眼)과 의수, 그리고 의족의 문화로 규정한 바 있지만 현대인은 물질의 광기 속에 자신의 모습도 이웃의 모습도 모두 마이다스의 황금처럼 화석화시켜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이런 시대적 상황의 배경 복사를 떠올리더라도 이 소설에서 악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물질과 육욕 밖에 모르는 듯싶은 하녀 인자의 모습에는 생명의 기운이 흐른다. 신부를 향한 그녀의 대담한 유혹과 증오 속에는 생명력이 숨 쉰다. 거기에는 이미 지상을 떠난 존재처럼 지순한 지주의 딸을 압도하는 치열한 힘이 있다. 이 두 사람의 사랑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신의 사랑 사이에 흔들리며 현실의 문제를 풀어가려는 신부의 고뇌가 소설의 기본 줄기를 이룬다.
그런데 고야가 말년에 그렸던 충격적인 ‘검은 그림들’을 연상시키는 이런 무대의 강렬함은 단절과 집중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이 소설은 그 외딴 장소의 설정이 그대로 외부 사회, 시대적 상황과의 단절을 수반하고 있다. 하지만 괴테의 말을 빌린다면 “소설이란 특유하고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작품이든 그것이 작가의 일생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면 작가를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경험은 나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가 긴 사회생활을 저널리스트로 보내고 은퇴 후 10년 이상을 이 작품에 쏟았다는 사실은 내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모든 문학작품이 그렇겠지만 집필기간은 사연의 일부만을 들려줄 뿐이다. 작가 민병택 씨는 젊은 시절 사제의 길을 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폐병으로 죽게 되었다는 사형선고”였다. 7년 뒤 완치가 된 그는 현실이 열어 주는 신문기자의 길을 택했고 30년 세월이 흐른 뒤 젊은 날의 꿈을 이 소설을 통해 전개시켰다.
이렇게 보면 나 같은 문외한에게도 다소 미흡하게 보이는 기법이나 표현상의 문제는 사소한 문제로 물러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본인 나름의 엄숙하고 장엄한 성소를 세웠다는 느낌이 든다. 성과 속, 폭력과 희생, 미로와 빛의 비장한 아름다움이 내비치는 스테인드글라스들이 장치된 내밀의 장소 같은.
거기 깊은 속에서 하나의 선율이 흐느끼며 흘러간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이다. 생과 사의 세계를 넘나드는 것 같은 지주의 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며 신부는 깊은 상념 속에 잠긴다. 그는 “영혼을 성화시키려는 진혼곡의 위안을 통해 천상의 사랑을 일구겠다는 소망이” 부푼다.
악의 길을 끝까지 달려간 하녀에 대해서도 그는 서슴없이 천상의 사랑을 택한다. 소설의 대단원에서 그는 하녀의 죄과를 남김없이 뇌리서 삭제해버렸다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 모두는 죄의 올가미를 자발적으로 차고 버둥대는 치졸한 바보들입니다. 죄는 필요악이지만 구원으로 이끄는 지름길이기도 하답니다.”
중세의 무대를 울리던 진부한 대사 같더라도 결국 사랑만이, 천상의 사랑만이 인간 조건의 어둠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인 것인가? 그런 지도 모르겠다.
박순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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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택 지음/뿌리깊은나무/1만8천원
이 소설에는 어둠이 배어있다. 동굴의 어둠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동굴’처럼 그림자의 벽은 빛 세상의 가능성을 반어(反語)로 품고 있다.
작가 민병택 씨는 ‘진혼일기’에서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 영혼과 물질의 대결이라는 오래된 주제다. 그것은 유사 이래 인간을 줄곧 따라다닌 낡은 질문이지만 우리 사회가 물질주의의 광란 속에 사로잡힌 뒤 망각한 질문이기도 하다.
원초적인 것에는 강렬함이 있다. 이 소설은 강렬한 조명에 못 박힌 고정된 세트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과장된 동작과 치열한 대사가 울려 퍼지는 연극무대를 연상시킨다. 캐릭터들의 충돌, 운명처럼 엮여져 가는 사건의 진행, 모두 그렇다.
소설은 그 첫 문장부터 응축된 에너지를 뿜어내듯 거친 숨소리를 낸다. “만용 하나만을 밑천 삼아 무작정 악마의 소굴로 투신해야 할까, 발을 빼야 하나?” 인습과 독선에 맞서던 주인공 김준수 신부는 “교구에서 가장 악지가 드세며 섬뜩하고 께름칙한 귀양지로 된서리 맞은 두메산골 본당”으로 전근이 되자 격렬한 회의에 빠진다.
그가 서슴지 않고 ‘악마의 소굴’로 규정한 새 임지가 이 소설의 무대다. 병인박해 때 수백 명의 순교자가 기꺼이 목숨을 버렸던 성지는 이제 소작농, 하루살이의 신세로 떨어진 그 후손들이 죽음을 앞둔 대지주의 딸 정금녀의 유산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지옥도가 펼쳐지는 곳으로 변했다.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우리가 망각 속으로 떠밀었던 악몽의 파편들이다.
그 악몽의 태피스트리는 국토분단, 좌우대립, 골육상잔을 벌였던 내전의 뒤끝이라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직조한다. 그것은 경제개발의 진군나팔 속에 우리 시대가 편리하게 과거 속에 낙오시킨 장면들이다.
그 과거 파묻기는 우리의 현재를 규정짓는 과거의 모습들을 함께 매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홀로그래피의 망령들은 우리의 눈먼 현재, 부동산 가격이 삶의 정보를 모두 구성하는 듯싶은 현재의 메마른 인간들에게서 어떤 원형적 인간의 모습을 봉합해 내기 위해 필요한 초혼의 춤을 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영화론에서 20세기의 대중문화를 의안(義眼)과 의수, 그리고 의족의 문화로 규정한 바 있지만 현대인은 물질의 광기 속에 자신의 모습도 이웃의 모습도 모두 마이다스의 황금처럼 화석화시켜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이런 시대적 상황의 배경 복사를 떠올리더라도 이 소설에서 악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물질과 육욕 밖에 모르는 듯싶은 하녀 인자의 모습에는 생명의 기운이 흐른다. 신부를 향한 그녀의 대담한 유혹과 증오 속에는 생명력이 숨 쉰다. 거기에는 이미 지상을 떠난 존재처럼 지순한 지주의 딸을 압도하는 치열한 힘이 있다. 이 두 사람의 사랑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신의 사랑 사이에 흔들리며 현실의 문제를 풀어가려는 신부의 고뇌가 소설의 기본 줄기를 이룬다.
그런데 고야가 말년에 그렸던 충격적인 ‘검은 그림들’을 연상시키는 이런 무대의 강렬함은 단절과 집중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이 소설은 그 외딴 장소의 설정이 그대로 외부 사회, 시대적 상황과의 단절을 수반하고 있다. 하지만 괴테의 말을 빌린다면 “소설이란 특유하고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작품이든 그것이 작가의 일생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면 작가를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경험은 나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가 긴 사회생활을 저널리스트로 보내고 은퇴 후 10년 이상을 이 작품에 쏟았다는 사실은 내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모든 문학작품이 그렇겠지만 집필기간은 사연의 일부만을 들려줄 뿐이다. 작가 민병택 씨는 젊은 시절 사제의 길을 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폐병으로 죽게 되었다는 사형선고”였다. 7년 뒤 완치가 된 그는 현실이 열어 주는 신문기자의 길을 택했고 30년 세월이 흐른 뒤 젊은 날의 꿈을 이 소설을 통해 전개시켰다.
이렇게 보면 나 같은 문외한에게도 다소 미흡하게 보이는 기법이나 표현상의 문제는 사소한 문제로 물러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본인 나름의 엄숙하고 장엄한 성소를 세웠다는 느낌이 든다. 성과 속, 폭력과 희생, 미로와 빛의 비장한 아름다움이 내비치는 스테인드글라스들이 장치된 내밀의 장소 같은.
거기 깊은 속에서 하나의 선율이 흐느끼며 흘러간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이다. 생과 사의 세계를 넘나드는 것 같은 지주의 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며 신부는 깊은 상념 속에 잠긴다. 그는 “영혼을 성화시키려는 진혼곡의 위안을 통해 천상의 사랑을 일구겠다는 소망이” 부푼다.
악의 길을 끝까지 달려간 하녀에 대해서도 그는 서슴없이 천상의 사랑을 택한다. 소설의 대단원에서 그는 하녀의 죄과를 남김없이 뇌리서 삭제해버렸다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 모두는 죄의 올가미를 자발적으로 차고 버둥대는 치졸한 바보들입니다. 죄는 필요악이지만 구원으로 이끄는 지름길이기도 하답니다.”
중세의 무대를 울리던 진부한 대사 같더라도 결국 사랑만이, 천상의 사랑만이 인간 조건의 어둠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인 것인가? 그런 지도 모르겠다.
박순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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