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이니셜은 사회적 병폐
서종택 (소설가·고려대 명예교수)
신문을 읽고 있노라면 낯선 용어나 신조어를 만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어떤 것은 용어해설이나 부연설명이 없으면 해독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매일매일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읽기에는 따라가야 할 공부도 많아졌다. 가령 FBI나 NATO나 AIDS는 등장한 지가 오래되어서 곧바로 미연방수사국, 북대서양조약기구, 후천성면역결핍증 따위로 해석이 되지만 최근의 ‘아프간 한국 PRT 로켓포 피격’ 같은 기사는 PRT에 ‘지방재건팀’이라는 설명을 곁들이지 않으면 뉴스가 생소해진다.
이처럼 쏟아져 나오는 신용어나 신조어는 우리에게 점점 친숙해지면서 우리를 훈련시키고 있다. 그래서 가령 ‘유럽공동체’보다는 ‘EC’가 이제는 낯익고 ‘국제원자력기구’보다는 ‘IAEA’가 더 친숙해졌다. 언어는 이처럼 단어는 물론 용어까지도 읽고 쓰고 말하기 쉬운 쪽으로 태어나서 변화하고 없어지는 생태적 활동을 반복한다. 언어가 사회적 현상의 반영인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특정 지역이나 인사에게 영어이니셜을 붙여 표기하는 야릇한 버릇을 이어오고 있다. 이 또한 기형적 언어행태의 하나요 사회심리현상으로서의 언어적 국면이다. 가령 ‘DJ와 YS의 화해’ ‘TK와 PK의 힘겨루기’에서 보이는 약호(略號) 들은 읽기에 불온하다.
정치적 의도·사회적 편견 존재
DJ YS TK PK 같은 표기는 김대중씨, 김영삼측, 대구경북지역, 부산경남쪽 등을 지칭하는 약호로서 그렇게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의 정치적 의도나 사회적 편견이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비무장지대를 DMZ로 표기하는 기호와는 다른 문제이며 특정 정치인의 책략과 이해집단으로서의 특정지역을 가리키는 약호, 혹은 암호이다.
일부 스포츠맨이나 연예인에게 애칭으로나 불러질 수도 있을 이 이니셜이 유독 특정 정치인이나 특정지역을 표현하는 대목에 붙여지는 한국적 현상은 사회적 병폐의 언어적 표현이다.
이러한 이니셜들은 용어가 아니라 암호로서 존재하며 인명과 지명을 기호화하고 이를 쫓는 경향은 본명과 실명이 제몫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 가명과 차명과 암호가 판을 치던, 지나간 오랜 독재시절의 관행들이 정보와 책략의 세월과 결탁한 흔적에 다름 아니다.
이름이란 그렇게 불러줌으로서 그렇게 존재하기 시작한다. 이름이 사람과 사물을 구속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그렇게 불리워지기를 요구하고 있으므로 스스로 자유롭다. 사람이나 사물이 자신의 독자성을 주창하는 이름이란 세상에 대하여 내세우는 자신의 절대성에 대한 표상이며 그 존립의 근거일 것이다.
이름이란 이처럼 자신의 이상을 담은 하나의 환상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이 추구하는 바 가치이다. ‘명전자성’(名銓自性)의 논리란 바로 이러한 지경의 정점이 될 것이다.
사람은 생명은 빼앗겨도 이름은 빼앗기지 않는다. 이를 뒤집으면 사람이 자신의 이름에 부응하며 살기가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가를 말해준다.
정치실명화로 정의 실현해야
과거 “JP를 사이에 두고 DJ가 YS와 협상하고 TK와 PK의 관계를 강화”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MJ가 MB를 독대하고 DY를…”하던 구시대는 아니다. 최근의 신문들은 ‘이명박’을 ‘MB’로 표기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기호인가 약호인가. 시청 앞 광장의 ‘MB OUT’이라고 쓰인 피켓은 그것이 결코 애칭은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익명화 차명화 가명화된 시대의 암호들을 불러내 이제는 그들을 실명을 호명(呼名)해 주어야 한다. 금융실명제가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첫걸음이듯이 정치실명화야말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지름길이다. 이명박은 일차적으로 그에게 명명되었던 이름이었음에 반해, 역사적 소명으로서의 MB는 지금 실명이냐고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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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소설가·고려대 명예교수)
신문을 읽고 있노라면 낯선 용어나 신조어를 만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어떤 것은 용어해설이나 부연설명이 없으면 해독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매일매일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읽기에는 따라가야 할 공부도 많아졌다. 가령 FBI나 NATO나 AIDS는 등장한 지가 오래되어서 곧바로 미연방수사국, 북대서양조약기구, 후천성면역결핍증 따위로 해석이 되지만 최근의 ‘아프간 한국 PRT 로켓포 피격’ 같은 기사는 PRT에 ‘지방재건팀’이라는 설명을 곁들이지 않으면 뉴스가 생소해진다.
이처럼 쏟아져 나오는 신용어나 신조어는 우리에게 점점 친숙해지면서 우리를 훈련시키고 있다. 그래서 가령 ‘유럽공동체’보다는 ‘EC’가 이제는 낯익고 ‘국제원자력기구’보다는 ‘IAEA’가 더 친숙해졌다. 언어는 이처럼 단어는 물론 용어까지도 읽고 쓰고 말하기 쉬운 쪽으로 태어나서 변화하고 없어지는 생태적 활동을 반복한다. 언어가 사회적 현상의 반영인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특정 지역이나 인사에게 영어이니셜을 붙여 표기하는 야릇한 버릇을 이어오고 있다. 이 또한 기형적 언어행태의 하나요 사회심리현상으로서의 언어적 국면이다. 가령 ‘DJ와 YS의 화해’ ‘TK와 PK의 힘겨루기’에서 보이는 약호(略號) 들은 읽기에 불온하다.
정치적 의도·사회적 편견 존재
DJ YS TK PK 같은 표기는 김대중씨, 김영삼측, 대구경북지역, 부산경남쪽 등을 지칭하는 약호로서 그렇게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의 정치적 의도나 사회적 편견이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비무장지대를 DMZ로 표기하는 기호와는 다른 문제이며 특정 정치인의 책략과 이해집단으로서의 특정지역을 가리키는 약호, 혹은 암호이다.
일부 스포츠맨이나 연예인에게 애칭으로나 불러질 수도 있을 이 이니셜이 유독 특정 정치인이나 특정지역을 표현하는 대목에 붙여지는 한국적 현상은 사회적 병폐의 언어적 표현이다.
이러한 이니셜들은 용어가 아니라 암호로서 존재하며 인명과 지명을 기호화하고 이를 쫓는 경향은 본명과 실명이 제몫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 가명과 차명과 암호가 판을 치던, 지나간 오랜 독재시절의 관행들이 정보와 책략의 세월과 결탁한 흔적에 다름 아니다.
이름이란 그렇게 불러줌으로서 그렇게 존재하기 시작한다. 이름이 사람과 사물을 구속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그렇게 불리워지기를 요구하고 있으므로 스스로 자유롭다. 사람이나 사물이 자신의 독자성을 주창하는 이름이란 세상에 대하여 내세우는 자신의 절대성에 대한 표상이며 그 존립의 근거일 것이다.
이름이란 이처럼 자신의 이상을 담은 하나의 환상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이 추구하는 바 가치이다. ‘명전자성’(名銓自性)의 논리란 바로 이러한 지경의 정점이 될 것이다.
사람은 생명은 빼앗겨도 이름은 빼앗기지 않는다. 이를 뒤집으면 사람이 자신의 이름에 부응하며 살기가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가를 말해준다.
정치실명화로 정의 실현해야
과거 “JP를 사이에 두고 DJ가 YS와 협상하고 TK와 PK의 관계를 강화”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MJ가 MB를 독대하고 DY를…”하던 구시대는 아니다. 최근의 신문들은 ‘이명박’을 ‘MB’로 표기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기호인가 약호인가. 시청 앞 광장의 ‘MB OUT’이라고 쓰인 피켓은 그것이 결코 애칭은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익명화 차명화 가명화된 시대의 암호들을 불러내 이제는 그들을 실명을 호명(呼名)해 주어야 한다. 금융실명제가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첫걸음이듯이 정치실명화야말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지름길이다. 이명박은 일차적으로 그에게 명명되었던 이름이었음에 반해, 역사적 소명으로서의 MB는 지금 실명이냐고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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