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름다운 길 지안재·오도재
학창시절 이후 실로 20년을 훌쩍 넘겨 다시 지리산을 찾았다. 인맥을 총동원해 성수기에는 예약이 힘들다는 H리조트로의 2박 3일 일정. 딱히 뭘 하겠다는 계획 없이 그저 쉬다 먹다 놀다오겠다며 떠난 길이었다. 리포터에게 지리산은, 멋들어진 산세와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지만 변화무쌍한 날씨, 언제 넘쳐날지 모르는 계곡물, 구조대를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공존하는 곳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어김없이 내내 비로 불어난 계곡물이 세차게 흘러 내렸다.
지리산 맑은 계곡
산에서 즐기는 만찬 돼지고기 바비큐와 가리비 구이
마지막 성수기라 그런지 가는 길목마다 여행객들로 넘쳐났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도착한 곳은 마천면 소재 H리조트. 여장을 풀자마자 바로 풀장으로 향했다. 자그마한 풀장 물은 계곡물로 채워져 엄청 차가웠지만 신이 난 우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놀이를 시작했다.
여행지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바비큐 파티다. 마련된 돌판 위에 두툼하고 육질 좋은 고기를 얹고 다른 쪽에는 알 굵고 물 좋은 가리비를 올렸다. 돼지고기야 기본 준비물이지만 가리비는 흔치 않은 먹을거리라 다른 객들이 오며가며 부러운 듯 힐끔힐끔 쳐다봤다. 저물어 가는 저녁 내내 이어진 가족들과의 식사는 맛도 일품이거니와 도란도란 흥겨운 대화가 있어 더욱 좋았다.
밤은 깊어 가자 공기 맑은 산에서 만날 수 있는 층층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별들의 잔치를 즐기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웬걸, 날이 흐려 별 하나 볼 수가 없었다. 쏟아질 듯 촘촘히 박힌 별을 바라보며 행복감에 빠지는 것이 가장 기대하는 이벤트였는데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대신 세찬 물소리와 호젓한 밤 길 산책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유유자적 흘러가는 지리산 운해
한국의 아름다운 길 지안재·오도재
지리산은 예전과 다름없이 날씨 변화가 심했다. 개었나 싶으면 또다시 비가 내리고 밤사이 천둥 번개가 요란했다. 일요일에는 오락가락하는 비와 함께 하루 종일 풀장에서 공놀이를 하고 탁구장에서 몸을 풀었다. 우리가 묵은 리조트는 펜션과 리조트의 중간 정도 규모로 물놀이 시설을 포함해 탁구장, 족구장, 연회 시설 등 편의 시설이 구비되어 있어 날씨에 상관없이 즐기기에 충분한 장소라 좋았다.
늦은 오후, 월요일에 출근하는 신랑을 배웅하기 위해 동생과 함께 함양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가는 길을 잘 몰라 최단 거리를 선택했는데 아뿔싸, 굽이굽이 산 하나를 넘어가는 길이었다. 초행길이라 바짝 긴장해서 운전에만 신경 쓰며 달렸던 길이 알고 보니 한국의 아름다운 길에 선정된 ‘지안재·오도재 길’이었으니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우리는 아름다운 경치는 커녕 길을 잘못 선택했다며 돌아올 때는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우를 범했다. 이번 여행에서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었다.
서암정사 석굴법당
산자락에 걸린 운해 지리산 자연휴양림
지리산에서 마지막 밤은 그야말로 난리법석이었다. 밤 늦게부터 내리기 시작한 세찬 비와 잦은 번개에 고립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씨가 엉망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고맙게도 너무나도 맑은 하늘과 깨끗한 공기가 세찬 비바람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떠나는 날 아침 또 비가 내릴 새라 서둘러 지리산 자연휴양림 산책에 나섰다. 밤새 내린 비로 계곡물은 더욱 불어나 마치 폭포처럼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 산자락에 걸쳐진 운해가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릿느릿 흘러가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는 행운도 누렸다.
서걱 이는 바람소리,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 상쾌한 풀 냄새, 느리게 느리게 자신의 길을 가는 달팽이까지. 산의 아침은 조용하면서도 활기차게 시작되고 있었다.
공놀이는 즐거워
신비로운 석굴법당 서암정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가장 먼저 칠선계곡 옆 서암정사에 들렀다. 서암정사는 벽송사의 부속 암자로 주위의 천연의 암석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응 스님이 자연 암반에 무수한 불상을 조각하고 불교의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극락세계를 그린 조각법당을 10여 년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일주문격인 대방광문을 지나니 석굴법당이 보였다. 부처님을 모신 석굴법당은 촬영 금지여서 신비롭고 기이한 조각을 눈에 담아 올 수밖에 없었다. 조성해놓은 연못도 아기자기하니 참 예뻤고 빼어난 경관도 눈과 마음을 즐겁게 했다. 지리산에 가면 꼭 한 번 들러보라고 추천한다.
전망공원에서 바라본 지리산 전경
두리번두리번 정겨운 둘레길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고 해서 지리산(智異山)이라고 한단다.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6.77m)을 주봉으로 하는 지리산은 서쪽 끝의 노고단(1507m), 서쪽 중앙의 반야봉(1751m) 등 3봉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100여 리의 거대한 산악군을 형성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지리산이 새로이 주목받게 된 이유는 ‘둘레길’ 덕분이다. 지리산 길(둘레길)은 지리산 둘레 3개 도(전북, 전남, 경남), 5개 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16개 읍·면 80여개 마을을 잇는 300여km의 장거리 도보길이다. 2011년까지 각종 자원 조사와 정비를 통해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環)형으로 연결할 예정에 있다. 현재 걸을 수 있는 구간은 전체 300km 중 전북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에서 경남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까지 이어지는 71km 구간이다.
우리가 찾은 월요일은 지리산숲길 안내센터 휴관일이었다. 몰랐던 몇몇 여행객들이 홍보책자만 가지고 돌아섰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을과 마을이 이어지는 길에서 누군가는 마음의 위로를, 누군가는 동행과의 정겨운 수다를 또 누군가는 찬찬히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빠르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각박한 마음에 지친 이들이 일부러 느림을 선택하는 길. 속도가 중시되는 요즘 참 자유를,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다는 소망이 모여 길을 만든 게 아닐까? 묵묵히 걸어가다 보면 복잡한 마음 한 켠 힘이 되는 위안을 담아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진 제공 및 도움말 : 함양 군청, 서암정사, 지리산 숲길 안내센터
이수정 리포터 cccc09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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