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 익어가는 소리 들어보셨나요?분당구 이매동 작은 언덕배기 마당에는 옹기종기 항아리가 모인 곳이 있다.
아침 동이 틀 무렵부터 늦은 저녁, 지는 햇살까지 꼬박 하루 볕을 온전히 받아 묵묵히 익어가는 장을 품은 항아리들. 그렇게 숨 쉬는 항아리들 속에는 된장과 고추장, 간장이 세월을 견디어 내고 있다.
이런 항아리들을 매일 쓰다듬고 매만지는 이가 있으니 지역 주부들에게 전통 장을 전수해 주고 있는 허숙경(68ㆍ이매동)씨다.
시어머니의 장맛이 일품으로 꼽히던 집에 시집와 자연스레 장맛의 비결을 배울 수 있었다는 그이. 그렇게 농사짓고 아이들 키우며 살아온 세월이 언 50년, 이제는 어엿하게 장성한 자식들 출가시키고 ‘장 익는 소리’에 낙을 삼아 인생을 즐긴다는 그이의 장독 같은 인생을 들여다보았다.
된장과 고추씨로 시어머니 솜씨 닮아가
“남편이 아직까지 농사를 짓고 있어요. 2천 평가량 되는데 콩 농사를 주로 하죠. 그러니 저는 장 담구는 일이 아예 천직이 돼버렸지요.”
직접 농사지은 우리 콩으로 공기 좋고 볕 좋은 마당에서 메주를 삶을 때면 마음 한가득 넉넉한 기운이 솟는다는 허숙경씨.
“시어머니가 늘 말씀하셨어요. ‘아가, 누구든 된장을 찾으면 속에 있는 노란 된장을 떠서 줘라’ 라고요. 된장, 간장은 발효 식품이라 숙성되면서 생기는 거품이나 미생물이 위로 올라오죠. 거무튀튀한 그것을 걷어 내면 안에 노랗고 빛 좋은 된장이 반기고 있어요.”
그렇게 배운 손맛, 마음 맛을 닮아 그이도 지금은 된장을 담굴 때 고추씨를 뿌리며 시어머니를 닮아 가고 있다.
“고추씨는 영양가도 좋고 또 천연 방부제의 역할도 해줘요. 그래서 장을 담그고 맨 위에 뚜껑처럼 고추씨를 뿌려주면 그 안으로 나쁜 기운이 다 모여 나중엔 고추씨만 모두 걷어내 버리고 안에 노란 빛의 된장만 쓰는 거예요. 정말 맛나지요.”
주부들, 허숙경 장맛에 반하다
그렇게 장을 담궈 온 지 오래, 지역의 전통 장인으로 이름도 꽤 알렸다.
지난 10월 마지막 주 성남시농업기술센터에서 진행한 고추장 강좌에는 40명 정원에 70명이 몰려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마트에 쌓여있는 무수한 고추장을 마다하고 전통 장을 담그려는 주부들이 많아지고 있어 그이는 그저 반갑다. 그이가 성남시 농업기술센터와 연을 맺은 것은 아직은 새댁이라 불리던 무렵, 이매동 인근에서 농사를 짓던 주부 50명으로 구성된 ‘성남시생활개선회’의 초대 회장 자리를 맡으면서 부터다. 그렇게 조직된 개선회는 좀더 과학적으로 농사짓는 법, 장 담그는 법, 생활에 도움이 되는 영농법들을 배우고 익혀왔다.
“장 담그는 것도 시어머니는 정말 옛날 방식이지만 기술센터에서 지금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새로운 방법들을 연구하고 배워왔어요. 예전 된장엔 콩과 소금뿐이었지만 지금은 달달한 맛이 나게 찹쌀도 넣고 메주 가루도 넣고 한다우. 아무리 몸에 좋은 거라 해도 사람들 입맛에 안 맞아 외면당하면 소용없잖아요.”
그래서인지 그이가 담군 장은 재래된장이면서도 현대식 기법이 동원돼 신세대 주부들에게도 어필되는 인기 품목. 목요일마다 성남 농협중앙회에서 운영되는 직거래 장터에서도 역시 그이의 된장, 고추장은 꾸준한 수요층이 확보돼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이가 철저히 고집하는 원칙은 있다.
“직접 농사지은 우리 콩에 신안 천일염을 해마다 30포대씩 구입해와 2년간 간수를 뺀 포슬포슬한 놈으로 장을 담궈요. 그것만은 철저히 지켜야 우리 집 장맛이 유지되죠.”
장이 맛있게 익으려면 햇볕이 좋아야
이쯤에서 장맛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좋은 재료와 햇볕입니다. 장은 아침부터 저녁에 해가 넘어갈 때까지 볕을 봐야 해요. 그래야 발효가 잘 되고 곰팡이도 덜 피어 맛있는 장으로 익어가죠.”
허 씨의 마당은 그런 점에선 천혜의 조건. 작은 야산 밑에 위치한 뒷마당은 햇볕이 늘 고르게 드는 요새다.
성남시 농업기술센터에서도 허씨의 마당을 이용해 장을 담글 정도.
장은 주로 정월에 담궈야 소금이 덜 들어가 짜지 않고 봄 햇살을 많이 받아 잘 익게 된다. 그래서 해마다 정월이 되면 그이의 마당으로 장을 담그려는 수강생들이 몰려온다.
30대 새댁부터 40~50대 중년 주부, 더러는 60대의 주부들도 그이의 장맛을 배우러 온단다.
“요즘은 죄다 아파트에 살잖아요. 그래서 햇볕 받기가 쉽지 않죠. 여기 와서 장을 담그고 가을 무렵 장이 익어 가면 가지고 가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어찌 보면 참 대견한 분들이에요. 부러 힘들고 손 많이 가는 장을 담궈 먹는 분들이니 말이죠.”
허 씨는 앞으로도 이런 분들의 기대에 맞게 장을 계속 가르치고 보급할 생각이다. 얼마 전에는 그이의 이름으로 특허를 낸 ‘남한산성 허숙경 재래된장’ 브랜드에도 책임을 느끼며 열심히 장을 만들어 볼 참이다.
“막내딸에게 전수를 해 줘 우리의 좋은 장을 널리 알릴 생각이에요. 된장, 고추장이 맛 좋으면 다른 반찬은 필요 없잖아요. 하하하”
권미영 리포터 myk31@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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