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량 깎아주겠다" 가족회유 증언대 세워 … 법원 사형선고
과거 군부정권 "한국말 잘하고 민족의식 강하다" 간첩 혐의
'두 개의 조국'으로 갈린 모국에서 한국어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간첩으로 몰리던 시대가 있었다. 이헌치(59)씨. 13일 서울고등법원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15년간 옥살이를 했던 세월은 되돌릴 수 없었다.
이씨는 1952년 일본 오사카 출생 재일교포 2세다. 전범국 일본에서 어려서부터 차별을 겪었다. 민족의식을 소중히 여긴 재일교포들일수록 차별이 심했다. 그는 모국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한국어를 능숙히 배웠다. 그리고 1977년 한국에 들어와서 79년엔 삼성전자에 특채됐다.
1980년 국군보안사령부. 전두환의 쿠데타와 군부독재정권을 떠받친 공포의 권력기관이었다. 보안사 간부들은 검찰이나 중앙정보부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했다. 보안사 출신들이 정권실세로 위세를 날렸다.
보안사는 '재일본 조총련 교포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 출신, 국어실력이 출중한 학생, 민족의식이 강한 학생'을 간첩혐의 중점대상자로 찍고 감시했다.
이씨는 세가지 요건에 맞았다. 1981년 영장없이 보안사로 연행됐다. 19일간 불법구금된 채로 고문을 당했다. 한해 전 결혼한 부인도 끌려갔다. 양수가 터져 실려 갔고, 병원에서 첫아이를 낳았다. 보안사 수사관들은 갓 태어난 아이를 5분간 보여준 뒤 "아이를 빨리 보고 싶으면 자백하라"고 회유했다.
"형량을 깎아주겠다"는 회유에 넘어간 형이 이씨의 간첩혐의를 입증 진술하는 비인도적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보안사의 형량회유는 사기였다. 이씨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수사검사는 정형근 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이씨가 검찰조사에서 혐의를 부인하자 정 검사는 그를 다시 보안사로 돌려보냈다. 다시 가혹행위가 이어졌다. 정형근의 행위는 다른 검사들보다 유별났다. 지난해 말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전주비빔밥 주인 간첩사건의 경우 보안사 수사관이 구치소로 면회를 와 압박했다. 혐의를 부인했을 때 다른 검사는 피의자를 다시 수사기관에 돌려보내진 않았다.
대법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은 이씨는 두차례 옥중자살을 기도했다. 96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진술이 강요됐고 유죄증거가 불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서울고법 형사9부(최상열 부장판사)는 "불법 체포와 감금을 당한 상태에서 한 진술의 임의성을 인정하기 어렵고, 제출된 증거 중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있는 것들이 없어 범죄 증명이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20여일간 밀입북해 교육을 받은 뒤 한국 기업체에 취직, 국가기밀 등을 탐지해 보고했다는 덮어씌워진 혐의가 벗겨졌다. 이씨는 재판 직후 "실감이 나지 않고 꿈만 같다"고 말했다. 1970~80년대 군부독재정권이 발표한 재일교포 간첩은 줄잡아 100여명. 해방되자마자 두동강 난 반쪽 조국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재일교포들은 분단세력의 눈에는 공안취약세력이었다. 일본에 있는 '재일한국인 양심수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회'는 13일 "국가보안법으로 만들어진 재일동포희생자는 100명이 넘지만 명예회복을 한 이들은 재심무죄판결을 받은 3명에 불과하다"며 "활동이 종료된 진실화해위를 대신할 국가기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내에서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지난해 12월 재일동포재심변호인단을 꾸려 활동하고 있다.
진병기 기자 jin@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과거 군부정권 "한국말 잘하고 민족의식 강하다" 간첩 혐의
'두 개의 조국'으로 갈린 모국에서 한국어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간첩으로 몰리던 시대가 있었다. 이헌치(59)씨. 13일 서울고등법원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15년간 옥살이를 했던 세월은 되돌릴 수 없었다.
이씨는 1952년 일본 오사카 출생 재일교포 2세다. 전범국 일본에서 어려서부터 차별을 겪었다. 민족의식을 소중히 여긴 재일교포들일수록 차별이 심했다. 그는 모국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한국어를 능숙히 배웠다. 그리고 1977년 한국에 들어와서 79년엔 삼성전자에 특채됐다.
1980년 국군보안사령부. 전두환의 쿠데타와 군부독재정권을 떠받친 공포의 권력기관이었다. 보안사 간부들은 검찰이나 중앙정보부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했다. 보안사 출신들이 정권실세로 위세를 날렸다.
보안사는 '재일본 조총련 교포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 출신, 국어실력이 출중한 학생, 민족의식이 강한 학생'을 간첩혐의 중점대상자로 찍고 감시했다.
이씨는 세가지 요건에 맞았다. 1981년 영장없이 보안사로 연행됐다. 19일간 불법구금된 채로 고문을 당했다. 한해 전 결혼한 부인도 끌려갔다. 양수가 터져 실려 갔고, 병원에서 첫아이를 낳았다. 보안사 수사관들은 갓 태어난 아이를 5분간 보여준 뒤 "아이를 빨리 보고 싶으면 자백하라"고 회유했다.
"형량을 깎아주겠다"는 회유에 넘어간 형이 이씨의 간첩혐의를 입증 진술하는 비인도적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보안사의 형량회유는 사기였다. 이씨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수사검사는 정형근 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이씨가 검찰조사에서 혐의를 부인하자 정 검사는 그를 다시 보안사로 돌려보냈다. 다시 가혹행위가 이어졌다. 정형근의 행위는 다른 검사들보다 유별났다. 지난해 말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전주비빔밥 주인 간첩사건의 경우 보안사 수사관이 구치소로 면회를 와 압박했다. 혐의를 부인했을 때 다른 검사는 피의자를 다시 수사기관에 돌려보내진 않았다.
대법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은 이씨는 두차례 옥중자살을 기도했다. 96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진술이 강요됐고 유죄증거가 불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서울고법 형사9부(최상열 부장판사)는 "불법 체포와 감금을 당한 상태에서 한 진술의 임의성을 인정하기 어렵고, 제출된 증거 중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있는 것들이 없어 범죄 증명이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20여일간 밀입북해 교육을 받은 뒤 한국 기업체에 취직, 국가기밀 등을 탐지해 보고했다는 덮어씌워진 혐의가 벗겨졌다. 이씨는 재판 직후 "실감이 나지 않고 꿈만 같다"고 말했다. 1970~80년대 군부독재정권이 발표한 재일교포 간첩은 줄잡아 100여명. 해방되자마자 두동강 난 반쪽 조국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재일교포들은 분단세력의 눈에는 공안취약세력이었다. 일본에 있는 '재일한국인 양심수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회'는 13일 "국가보안법으로 만들어진 재일동포희생자는 100명이 넘지만 명예회복을 한 이들은 재심무죄판결을 받은 3명에 불과하다"며 "활동이 종료된 진실화해위를 대신할 국가기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내에서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지난해 12월 재일동포재심변호인단을 꾸려 활동하고 있다.
진병기 기자 jin@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