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20년이 지나도 그의 탈상을 못했다
20년만에 조영래변호사의 '탈상'을 위해 모였다. 10일, 200여명의 사람들이 서울YWCA연합회관 강당에서 '조영래를 기억한다'라는 이름으로 추모행사를 열었다. 모인 이들은 이제 "탈상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지면서 역설적으로 탈상을 이야기했다.
사회를 맡은 박원순 변호사는 "여전히 바뀌지 않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조영래 변호사가 살아 있었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한다"고 운을 뗐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노동자."로 시작하는 전태일 평전을 지은 사람.
"변호인들은 먼저 이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권양-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국민이 그 이름은 모른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없는 유명인사, 얼굴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로 시작하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 변론요지서'를 쓴 사람.
그리고 70년대의 문장가로 꼽히는 시인 김지하의 '양심선언'을 20대의 나이에 실제로 쓴 사람.
이날 탈상모임에 모인 이들은 "조영래. 43세의 한창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 고작 7년의 변호사활동으로 다른 사람들이 평생을 해도 모자랄 업적을 남긴 사람, 세월이 엄혹할수록 더욱 되살아나는 그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했다.
서울대 역사상 최고의 성적으로 입학한 조영래는 "합격했으면 됐지 톱이 무슨 상관인가"라는 인터뷰로 세상에 첫 흔적을 남겼다. 이 한마디에 담긴 겸손함과 실사구시의 정신이 그의 일생에 일관됐다. 전태일을 한국노동운동의 정신적 표본으로 끌어올린 전태일 평전의 저자가 그라는 사실은 1990년 그가 죽기 직전에야 장기표씨의 증언으로 공개됐다. 김지하의 '양심선언'도 20대의 나이에 그가 대신 썼던 사실을 그의 사후 김지하씨가 공개했다.
그는 요즘 말로 좌와 우에 구애받지 않는 실사구시의 정신이 투철했던 인물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고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1971년 사법연수원 연수 중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걸려 구속 1년반을 감옥생활,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6개월을 수배당했다. 1979년 박정희의 죽음을 알고 주변에 "박정희 분향소에 조문을 가자"고 말해 주변의 민주화투사들을 황당하게 했던 일화 속에 그의 유연한 사고방식이 엿보인다.
오늘날 대형로펌의 상징이 된 김앤장합동변호사 사무실에서 첫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부천서 성고문 변론요지서를 영문으로 작성하는 실력을 보였다.
'인권변호사는 곧 시국사건 변론'으로 등식화되던 80년대에 그는 그 틀에 머물지 않았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밝혀 전두환정권의 종말을 불렀지만, 상봉동 공해피해소송과 여성조기정년제 폐지 소송 망원동 수재민 1만여명의 소송을 승리하여 대규모 집단소송의 가능성을 여는 등 생활과 환경에 걸친 폭넓은 실사구시의 인권변론의 길을 걸었다.
좌와 우를 뛰어넘어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김선수 변호사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함께 좋아했고 법관중에서 괴팍하다가는 평가를 받는 분들도 조변호사에 대해서는 호감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요즘은 변호사들이 말끝마다 '인권'을 올리지만, 전두환 독재정권에서 '인권'을 앞세우는 변호사는 구속을 각오해야 했다. 1985년 대한변호사협회가 처음 인권보고서를 발간해 군사정권의 치부를 공개한 것도 그의 공로였다.
'민주변호사회'의 창립을 주도하고 그 이름을 지은 것도 조영래였다.
그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밤을 꼬박 새며 문장을 다듬어 본질을 바로 파고드는 칼럼을 썼고 변론요지를 썼다. 하룻밤에 담배세갑을 피워가며 한편의 글을 썼다. 글이 그의 삶을 단축시켰다.
1990년에 6개월간 미국에 연수 겸 연구생활을 다녀오면서 걸린 감기가 낫지 않았다. 한동안 동네 약국에서 기관지계통 약을 복용하다 뒤늦게 정밀 검진을 받았다. 폐암으로 세상을 등진 그를 사람들은 '천재의 요절'이라고 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이 그의 개인적 자질로서 천재성을 그리워하는 것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탈상을 못하고 아쉬워하는 이유는 아니다. 사람을 아끼고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위해 살면서 집념을 불태워 온 그의 정신을 못잊기 때문이다.
서울법대 공익인권법센터장 한인섭 교수는 "한편에서는 조영래를 모르는 세대가 압도적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화화되는 경향이 있다"면서 "이제 그의 삶을 모두 기록하는 일에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진병기 기자 j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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