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간행물윤리위원장
요즘 '뜨는' 개그 가운데 '왕년에' 시리즈라는 게 있다.
"내가 말이야, 왕년에는 어마어마했거든…"이라며 시작하는 이 엉뚱한 코미디는 과대망상증 화자(話者)의 기발한 자기자랑으로 청중들의 폭소를 이끌어낸다.
가령 이런 식이다. 웃기기로 유명한 자신이 떴다 하면 공항이건 식당이건 사람들이 쫙 줄을 선단다. 닭 돼지 등 동물들이 배를 잡고 뒹굴거나 날갯짓을 하는가 하면 뻐꾸기시계의 뻐꾸기는 시간마다 얼굴을 내밀어 얘기를 더해달라고 조른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항용 벌어지는 일을 마치 제 인기가 높아 생긴 일인 양 천연덕스럽게 떠벌리니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발을 구른다.
사실 현실이 못마땅하고 생각만큼 풀리지 않을 때 "왕년에 내가…"라고 회상하며 입맛을 다시는 사람이 어디 그 개그맨뿐이겠는가. 팍팍한 현실에 털퍼덕 주저앉는 게 두려워 추억의 끈이라도 붙잡고 마음을 추스르는 게 요즘 서민의 삶이란 얘기다.
일본의 대지진 참화와 뒤이은 원전 공포로 잠시 잊은 것 같지만 지금 우리네 일상은 그야말로 '왕년의 영화'나 읊조리는 것 외에 아무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전세 값은 무려 100주 연속 치솟기만 했다. 구제역 파동으로 뛴 식료품 값은 설렁탕 한 그릇을 1만원선으로 훌쩍 올려놓았다. 일일이 이름을 대기도 숨찬 물가폭탄이 서민가계를 융단폭격해 주부들은 장바구니에 한숨만 가득 담아오기 일쑤다. 청년실업도 여전히 안개속이고 경기회복의 기대 또한 현재로선 난망이다.
추억의 끈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거의 손을 놓은 것처럼 보인다. 아니, 그냥 손을 놓고만 있으면 좋을 것을 마치 나라와 서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양 생색내기에만 바쁘다.
친서민 중도실용 구호는 창고 속에 팽개친 게 분명한데, 잊을 만하면 꺼내 먼지를 털고 읊조려 서민의 복장을 뒤집어 놓는다.
대통령부터 그렇다. 이명박 대통령은 며칠 전 "세계 여러 정상 중 내가 제일 열심히 일을 한다"고 진지하게 말해 많은 국민을 놀라게 했다. 그는 "12월 31일 밤늦게 관사에 와 지금까지 일하는 정상이 있을까 싶어 인터넷을 찾아봤더니 1월 1일 하루만 쉬고 2일부터 바로 일하는 대통령은 나밖에 없더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이 대통령의 말솜씨는 익히 알려져 있다. 과거 여러 일을 많이 겪어서인지 "내가 해봐서 아는데…" 등 전제를 붙여 일사천리로 주장을 내세운다. '민주화운동'을 해보고 '비정규직 노동자'에다 '환경미화원'을 해봤을 뿐 아니라 "배도 만들어 봤다"는 대통령의 '경험칙 주장'은 하도 유명해 코미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주로 왕년의 경험을 말하던 대통령의 화법이 현재형으로, 그것도 "지금 일을 많이 한다"는 만족과 자신감으로 바뀐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다만 그것이 국민 모두가 뿌듯하게, 자랑으로 삼을 수 있는 지경의 것인지는 별개 문제다. 이미 말했듯 구제역 같은 재앙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고 통화정책도 부실해 물가폭탄을 맞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국내 정황을 보면 자랑은커녕 부끄러워할 일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사과하고 고개를 숙여야 할 일을 거꾸로 공치사를 하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가령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로 곤욕을 치른 게 언젠데 또 직전 총리가 "기관으로부터 미행을 당했느니, 아니니" 구설을 만들어내느냐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뿐 아니다. 임기 후반을 맞아 회전문, 측근인사를 삼가달라는 국민 요구에 귀를 막고 이른바 '서열 3위'에게 6년짜리 연임 카드를 내주고 인사청문회마저 힘으로 밀어붙였다는 지적도 있다. 경험도 없는 캠프 인사를 주요 공관장으로 내보내 '불륜의 덫' '비자 장사'에 '직원 간 암투'를 초래해 '국격'을 추락시켰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은 초라하고 별볼일 없는 신세
최근엔 장관에 특보를 거친 측근을 금융지주회사 회장으로 만들고 그도 모자라 "국내 최고 연봉을 주겠다"며 국민 부아를 돋우다 슬쩍 물러선 일도 있었다. 정말 이렇게 한줌도 안 되는 '끼리끼리' 인사를 위해 "제일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면 그런 일은 안 하는 편이 훨씬 낫다.
"왕년에 어마어마했다"는 개그는 달리 생각하면 지금은 초라하고 별볼일 없는 신세라는 얘기와 같다. 앞으로 남은 2년이 어떤 '왕년'으로 기억될지 생각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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