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년 지나도 생생한 천재의 숨결

새벽에 홀로 깨어
최치원 선집. 김수영 편역
돌베개. 8500원
최치원 시 선집을 펴들고 있는 나의 앞에 세 가지 문제가 놓여있다.
아득한 9세기 통일신라말의 천재 학자, 시인인 고운 최치원의 한시(漢詩)를 고전으로 읽을 것인가, 그냥 시집으로 읽을 것인가. 당나라에 조기 유학을 가서 하급관리, 유랑시인, 프리랜서 격문담당자를 거친뒤 귀국했고 개혁정치를 펴려다 좌절하는 등 파란많은 그의 삶과 시대상에 주목할 것인가, 그의 아름다운 시문과 잔잔한 기록문에만 집중할 것인가. 지금 2011년에 왜 고려와 조선을 뛰어넘어 857년생 신라 최치원이 호감의 대상인가, 이 조그만 시집이 출간 1년이 못돼서 10쇄를 거듭할 만큼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등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대답은 나의 질문 안에 들어있고 열쇄는 그의 시문 안에 들어있다. 정답은 '그냥 읽으면 된다'이다. 느낌이 올 것이다. 그의 시와 문장에 집중하되, 꼼꼼하게 붙여놓은 역주도 꼭 함께 읽는다. 시 속에 등장하는 산과 계곡이 중국의 산하이며 활짝 핀 접시꽃이 당나라에 핀 꽃임을 알고 나면, 외국에서 이름을 떨쳤으나 곤고하기 짝이 없던 그의 삶과 시대상이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고운(孤雲 또는 海雲 )최치원의 대중적 인기는 누구나 다 아는 친숙한 이름이며, 한국문학 최초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온전한 시문의 작자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계원필경집'의 저자, 중국 황소의 난 시기에 쓴 뛰어난 명문"토황소격문"의 필자 등. 이름과 제목은 알았지만 작품을 접해본 적 없던 많은 독자들은 그의 시작품과 여러 글에 나타난 뛰어난 감수성과 정신세계를 접하면서, 1300년을 뛰어넘어 옆집 아저씨처럼 바로 곁에 다가온 그의 숨결과 언어, 우리와 똑같이 기쁨과 한탄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느꼈을 것이다.
국어교육과 국문학사 교육이 구별되지 않는 교과과정을 거친 나 같은 독자들은 대개 시험공부 하듯 원문의 한 글자 한 글자를 찾아 한시를 읽는다. 번역자도 고전문이란 부담과 위대한 역사인물 관련 글의 엄숙주의에서 자유롭기가 어렵다. 시 특유의 운(韻)을 맞추기는 고사하고 어미를 '하였노라''하였다' '하였네'로 선택하는 것조차 껄끄러운 작업이다. 그래서 읽는 이들은 시로써 '느끼기' 보다는 철학이나 사상을 탐색하게 되고 ,'생각하기'를 더 많이 한다. 현대시를 대할 때 독자들은 시인의 멋진 언어와 느낌에 더 집중하며, 활기차고 발랄한 어휘에서 새로운 흥미를 느낀다. 두가지를 조화시켜 되도록 원문의 느낌과 의미를 살리고 표현이나 음운은 현대인이 읽고 맛보기 좋게 다듬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제2의 창작을 지향하는 번역자의 이상이라 할 것이다. 이 시집'새벽에 홀로 깨어'는 '가능한 한 쉬운 말로 최치원의 다채로운 작품세계를 골고루 선보이고자'했다는 젊은 편역자의 말대로 그 경지에 상당히 접근하고 있다.
부산 해운대나 가야산 계곡 바위등 전국 곳곳에 최치원의 시, 최치원의 글씨라고 알려져있는 한시가 두루 새겨져 있지만, 그 진위는 고증할 방법이 없다. 더구나 한문 해독능력이 없는 사람은 새겨진 건 글씨, 매끈한건 바위라는 것 밖에 알 길이 없을 것이다. 그 중 한 수를 그냥 읽어보자. 편역자가 분류한 " 새벽에 홀로 깨어"란 장에 실린 '새벽 풍경'이다.
" 바람도 산마루 보드라운 구름 차마 못 흩고 / 햇볕도 언덕머리 푹 쌓인 눈 녹이지 못하네./ 홀로 풍경 읊으니 이 마음 아득한데 / 바닷가 갈매기와 쓸쓸히 벗하네."
역자는 제목이 없는 그의 시작품들에 일일이 걸맞는 제목을 붙여서 이해하기 쉽게 했다. 이를테면 동풍(東風)을 노래한 시는 '봄바람'으로 하고 봄에 동쪽에서 부는, 고향 신라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최치원의 심경을 표현했음을 밝혔다.
책의 구성은 표제어 외에 비오는 가을밤, 은거를 꿈꾸며 , 밭갈고 김매는 마음으로 , 신라의 위대한 고승, 참 이상한 이야기등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총 192편의 글을 수록하였다. 계원필경집 서문, 역적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 토황소격문), 한식날 전사한 장병을 애도하며 , 예부상서께 드리는 편지 등 그의 성격과 지조, 문장력 등을 잘 드러내는 주옥같은 글들이다. 당나라에서 문명을 크게 떨쳤던 그는 귀국 후 국정에 참여하여 신라사회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좌절되자 세상을 등지고 은거했다. 유·불·선에 두루 통달했던 최고의 지성인이자 선비정신의 사표였던 그는 상당한 유머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했던것 같다. 산에서 만난 어느 스님이 그 산이 기막히게 좋다고 하자 고운은 "그렇게 좋으면 당신은 왜 내려오느냐?"고 한방 먹인다. "이보시오 청산이 좋다는 말 마오 / 정말로 산이 좋으면 뭣하러 나오시오? / 두고보오 나의 훗날 자취를 /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니."( '산에사는 중에게' 全文)
한국에서 중국 고전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 출판으로 연결된 역사는 길지만, 우리 고전문학에 관한 대중 목록은 흔치 않았다. 특히 조악한 번역과 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책들이 독자들을 한국 고전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80년대 출판계에서 여강출판사, 국립도서관장 출신이 설립한 아세아문화사등이 학자들의 해제를 제대로 붙인 희귀 고전영인본들을 발간했지만 일반 독자들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농서( 農書)'전질과 관보(官報) 영인본 같은 문헌들, 실학파 학자들의 저술들이 그 이후 상당부분 출간되었고 특히 다산관련 서적의 인기가 높아서 많은 책이 나왔다.
실학파의 사회부 기자라 할만한 연암 박지원의 중국기행문'열하일기'는 60년대 문고판 5권으로 나온 이래 여러 판이 거듭나왔지만 아직도 대중독서물은 아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정신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재정권의 총애(?)까지 받은 '목민심서'를 비롯해서 가장 많은 시선집과 연구서들이 출간되었다. 최치원의 '새벽에 홀로 깨어'는 '우리 고전 100선'시리즈로 정식 기획된 책들중 일곱 번째로, 우리 고전번역서의 연대를 문학사의 맨 앞장으로 휙 끌어올렸다. 기획자인 서울대 박희병교수가 간행사에서 밝힌 것처럼 "21세기적 전망에서 한국의 고전을 새롭게 재구축하는 작업"이 100권까지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랄 뿐이다.
차미례 번역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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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홀로 깨어
최치원 선집. 김수영 편역
돌베개. 8500원
최치원 시 선집을 펴들고 있는 나의 앞에 세 가지 문제가 놓여있다.
아득한 9세기 통일신라말의 천재 학자, 시인인 고운 최치원의 한시(漢詩)를 고전으로 읽을 것인가, 그냥 시집으로 읽을 것인가. 당나라에 조기 유학을 가서 하급관리, 유랑시인, 프리랜서 격문담당자를 거친뒤 귀국했고 개혁정치를 펴려다 좌절하는 등 파란많은 그의 삶과 시대상에 주목할 것인가, 그의 아름다운 시문과 잔잔한 기록문에만 집중할 것인가. 지금 2011년에 왜 고려와 조선을 뛰어넘어 857년생 신라 최치원이 호감의 대상인가, 이 조그만 시집이 출간 1년이 못돼서 10쇄를 거듭할 만큼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등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대답은 나의 질문 안에 들어있고 열쇄는 그의 시문 안에 들어있다. 정답은 '그냥 읽으면 된다'이다. 느낌이 올 것이다. 그의 시와 문장에 집중하되, 꼼꼼하게 붙여놓은 역주도 꼭 함께 읽는다. 시 속에 등장하는 산과 계곡이 중국의 산하이며 활짝 핀 접시꽃이 당나라에 핀 꽃임을 알고 나면, 외국에서 이름을 떨쳤으나 곤고하기 짝이 없던 그의 삶과 시대상이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고운(孤雲 또는 海雲 )최치원의 대중적 인기는 누구나 다 아는 친숙한 이름이며, 한국문학 최초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온전한 시문의 작자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계원필경집'의 저자, 중국 황소의 난 시기에 쓴 뛰어난 명문"토황소격문"의 필자 등. 이름과 제목은 알았지만 작품을 접해본 적 없던 많은 독자들은 그의 시작품과 여러 글에 나타난 뛰어난 감수성과 정신세계를 접하면서, 1300년을 뛰어넘어 옆집 아저씨처럼 바로 곁에 다가온 그의 숨결과 언어, 우리와 똑같이 기쁨과 한탄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느꼈을 것이다.
국어교육과 국문학사 교육이 구별되지 않는 교과과정을 거친 나 같은 독자들은 대개 시험공부 하듯 원문의 한 글자 한 글자를 찾아 한시를 읽는다. 번역자도 고전문이란 부담과 위대한 역사인물 관련 글의 엄숙주의에서 자유롭기가 어렵다. 시 특유의 운(韻)을 맞추기는 고사하고 어미를 '하였노라''하였다' '하였네'로 선택하는 것조차 껄끄러운 작업이다. 그래서 읽는 이들은 시로써 '느끼기' 보다는 철학이나 사상을 탐색하게 되고 ,'생각하기'를 더 많이 한다. 현대시를 대할 때 독자들은 시인의 멋진 언어와 느낌에 더 집중하며, 활기차고 발랄한 어휘에서 새로운 흥미를 느낀다. 두가지를 조화시켜 되도록 원문의 느낌과 의미를 살리고 표현이나 음운은 현대인이 읽고 맛보기 좋게 다듬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제2의 창작을 지향하는 번역자의 이상이라 할 것이다. 이 시집'새벽에 홀로 깨어'는 '가능한 한 쉬운 말로 최치원의 다채로운 작품세계를 골고루 선보이고자'했다는 젊은 편역자의 말대로 그 경지에 상당히 접근하고 있다.
부산 해운대나 가야산 계곡 바위등 전국 곳곳에 최치원의 시, 최치원의 글씨라고 알려져있는 한시가 두루 새겨져 있지만, 그 진위는 고증할 방법이 없다. 더구나 한문 해독능력이 없는 사람은 새겨진 건 글씨, 매끈한건 바위라는 것 밖에 알 길이 없을 것이다. 그 중 한 수를 그냥 읽어보자. 편역자가 분류한 " 새벽에 홀로 깨어"란 장에 실린 '새벽 풍경'이다.
" 바람도 산마루 보드라운 구름 차마 못 흩고 / 햇볕도 언덕머리 푹 쌓인 눈 녹이지 못하네./ 홀로 풍경 읊으니 이 마음 아득한데 / 바닷가 갈매기와 쓸쓸히 벗하네."
역자는 제목이 없는 그의 시작품들에 일일이 걸맞는 제목을 붙여서 이해하기 쉽게 했다. 이를테면 동풍(東風)을 노래한 시는 '봄바람'으로 하고 봄에 동쪽에서 부는, 고향 신라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최치원의 심경을 표현했음을 밝혔다.
책의 구성은 표제어 외에 비오는 가을밤, 은거를 꿈꾸며 , 밭갈고 김매는 마음으로 , 신라의 위대한 고승, 참 이상한 이야기등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총 192편의 글을 수록하였다. 계원필경집 서문, 역적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 토황소격문), 한식날 전사한 장병을 애도하며 , 예부상서께 드리는 편지 등 그의 성격과 지조, 문장력 등을 잘 드러내는 주옥같은 글들이다. 당나라에서 문명을 크게 떨쳤던 그는 귀국 후 국정에 참여하여 신라사회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좌절되자 세상을 등지고 은거했다. 유·불·선에 두루 통달했던 최고의 지성인이자 선비정신의 사표였던 그는 상당한 유머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했던것 같다. 산에서 만난 어느 스님이 그 산이 기막히게 좋다고 하자 고운은 "그렇게 좋으면 당신은 왜 내려오느냐?"고 한방 먹인다. "이보시오 청산이 좋다는 말 마오 / 정말로 산이 좋으면 뭣하러 나오시오? / 두고보오 나의 훗날 자취를 /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니."( '산에사는 중에게' 全文)
한국에서 중국 고전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 출판으로 연결된 역사는 길지만, 우리 고전문학에 관한 대중 목록은 흔치 않았다. 특히 조악한 번역과 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책들이 독자들을 한국 고전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80년대 출판계에서 여강출판사, 국립도서관장 출신이 설립한 아세아문화사등이 학자들의 해제를 제대로 붙인 희귀 고전영인본들을 발간했지만 일반 독자들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농서( 農書)'전질과 관보(官報) 영인본 같은 문헌들, 실학파 학자들의 저술들이 그 이후 상당부분 출간되었고 특히 다산관련 서적의 인기가 높아서 많은 책이 나왔다.
실학파의 사회부 기자라 할만한 연암 박지원의 중국기행문'열하일기'는 60년대 문고판 5권으로 나온 이래 여러 판이 거듭나왔지만 아직도 대중독서물은 아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정신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재정권의 총애(?)까지 받은 '목민심서'를 비롯해서 가장 많은 시선집과 연구서들이 출간되었다. 최치원의 '새벽에 홀로 깨어'는 '우리 고전 100선'시리즈로 정식 기획된 책들중 일곱 번째로, 우리 고전번역서의 연대를 문학사의 맨 앞장으로 휙 끌어올렸다. 기획자인 서울대 박희병교수가 간행사에서 밝힌 것처럼 "21세기적 전망에서 한국의 고전을 새롭게 재구축하는 작업"이 100권까지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랄 뿐이다.
차미례 번역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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