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사변을 통해 보는 ‘사람의 계급’

서동석의 옛날 간날 안동에선

지역내일 2001-12-05
이제 이야기 될 서류(庶類)사변은 1884년 11월에서 1886년 12월까지 약 2년간에 걸쳐 예안의 도산서원에서 전개되었는데 사건의 개요는《서류사변시일기(庶類事變時日記)》로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일기는 서원 측에서 서류들의 행위의 부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건의 전개과정을 추적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서류 측에 의해 작성된 일기와 상호 비교·검토가 필요하나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재를 이야기하는 것은 안동에서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양반스러운 일만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물론 지금의 생각으로 비추어보건데…

계급 충돌의 잠재적 불씨
도산서원은 영남 남인계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이황을 봉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에 도전하는 세력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황의 제자인 월천 조목의 도산서원 배향은 퇴계와 남명 조식으로 대표되는 영남 사림 남·북인 사이의 정치적 갈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19세기에는 신생 노론에 의해 예안에 서인계 서원이 설립되기도 하였으며,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서인의 관권과 도산서원 측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예안에서는 선현 또는 선조의 문자 시비가 잦았다. 이런 시비는 19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 더욱 그 정도가 심해지는데 김부필의 문순(文純)이라는 시호 문제를 두고 진성이씨와 광산김씨 사이에 향전이 있었으며, 이황과 농암 이현보의 학문적 전수관계를 두고는 진성이씨와 영천이씨 사이에 심각한 분쟁이 발생하여 도산서원의 유안(儒案)에서 영천이씨가 모두 삭제되는 일도 있었다.
이런 향전의 기본적인 방향은 이른바 신향의 등장으로 인한 신분계층간의 갈등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가속화 된 조선 왕조의 사회·경제적 변화 추세 속에서 이른바 신향이라 불리는 중인·서얼 등의 신분계층이 새롭게 성장하면서 기존사족들의 향촌지배는 점차 위축되어 갔다. 신향들의 도전으로 기존 사족들은 일정 부분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17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각지에서 향안 입록과 향임의 선임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분쟁이 발생하고 있었다. 기존의 사족들은 향안에의 입록을 기피하였고, 향교에서는 교안이 분화되어 기존의 사족들은 따로 청금록을 작성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런 현상은 신향들이 향교와 서원 운영에 참여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래와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는 것만은 확실하다. 서원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실질적인 주체인 원임(원장·유사)·원생의 자격에 대해서는 각 서원의 원규에 나타나고 있다. 각 서원의 제반조건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중인이나 서얼 등 비사족층의 참여는 원칙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도산서원의 서류사변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경주 진사 이능모(李能模)의 상소로 옥산서원에서의 서류들에 대한 원임직 소통이 허락됨으로써 발단하였다. 옥산서원은 이전에도 같은 유의 사건이 있었는데, 정조가 반포한 정유절목 이후 향례시에 서얼에게도 일부 참여가 허락되었다. 그러나 서류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원임직 전체에 대한 소통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 상소가 있은 지 2개월 후인 1884년 11월에는 도산서원에도 서류 소통의 관문이 왔는데, 이 관문을 계기로 12월 12일 분천(영천 이씨) 이규섭·월애(횡천 조씨) 조양식·단사(진성 이씨) 이만홍이 서원에 들어와 관문에 따라 분임을 청하였다. 이에 서원 측에서는 원규에 따라 그럴 수는 없다고 물리쳤으나, 12월 20일에 바로 안동 풍산의 서류들이 통문을 보내어 강경한 입장을 표시하였다.
이듬해에도 앞서와 같은 주장을 서류들이 하게 되었으나 서원 측에서는 번번이 거절하였고, 마침내는 1886년 1월 5일에 서류들이 무력을 사용하여 피가 튀고 옷이 찢기며 머리가 산발이 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 전에도 사당 참배 요구를 거부한다고 하여 90세의 전임에게 몰매를 퍼부은 일이 있었다.
2월 10일에는 분천의 이익현(李翊鉉)이 그 자제 및 마을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서원 사람들을 구타하였고, 퇴계 주손의 이름을 거명하며 욕을 하였다. 저녁 무렵에는 서원 사람들이 나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퇴계 주손의 숙부인 이만응(李晩鷹)을 잡아서 구타하였다. 그리고 마을 사람 30인∼40인을 모아서 횃불을 켜고 몽둥이를 들고 서원에 난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류들의 폭력성에 반대하여 같은 서류들끼리도 내분이 발생하였다. 서류 소통에 대한 기본입장은 같았으나 그들이 행한 폭력은 폐습으로 같이 하지 못할 행동이라 하여 동참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연이은 서류들의 분발에 도산서원이나 진성이씨 측에서도 반박의 통문을 돌리고, 5월 22일에는 장문의 상소를 올리니 결국에는 조정에서도 도산서원의 서류사변을 알게 되었다.
결국에는 서원의 원임을 선발하는데 있어서 서얼들에 대한 소통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임을 지적하면서 지방관으로 하여금 새로운 제도를 따르도록 조처하였다. 도산서원의 원임직 소통에 대한 서얼들의 요구는 조정의 개입으로 서류들의 승리로 결말이 났지만 실제로 도산서원 원임 선출에 그대로 적용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아직도 양반? 서자?
도산서원 원임직을 둘러 싼 적자들과 서자들의 싸움은 단순히 도산서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19세기의 사회적·정치적 문제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서원은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원임과 교육활동의 대상이 되는 입원생이 중요한 인적구성이 되는데, 여기에는 각각 원임안·입원록이 작성되어 그 등록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다. 영남지방은 그 특유의 보수성 때문에 서류들의 서원운영 참여에 소극적이었으며, 더욱이 도산서원은 영남 사림의 총 본산으로 가장 보수적인 태도로 이 문제를 대처해 나갔던 곳이다. 때문에 실제야 어떻든 간에 위와 같은 결정이 난 것은 조선 중기적 사족의 향촌지배가 완전히 무너지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인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왜구의 침략을 겪으면서 사회는 분화되었고, 여기에 따라 새로운 힘을 가진 세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가치체계를 가지고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돌고 도는 패션의 경향처럼 역사도 순환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가 처한 입장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나서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으며 거기에 따라 행동양식도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저 위에서 맑은 공기만 먹고사는 사람들은 양반이냐 서자냐를 따지면서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1세기는 변화의 시대. 하지만 어떻게 변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는 하지만 그 새 부대라고 하는 것이 술이 새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이었으면 좋겠다.

이 원고는 <도산서원 원임직="" 소통을="" 둘러싼="" 적·서간의="" 향전="" -="" 1884년="" 《서류사변시일기》를="" 중심으로=""> 이수환, 『민족문화논총』 제 12집,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1.을 정리한 것입니다.

서동석 안동문화실무지킴이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닫기
(주)내일엘엠씨(이하 '회사'라 함)은 개인정보보호법을 준수하고 있으며, 지역내일 미디어 사이트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개인정보 수집∙이용(제공)에 대한 귀하의 동의를 받고자 합니다. 내용을 자세히 읽으신 후 동의 여부를 결정하여 주십시오. [관련법령 개인정보보호법 제15조, 제17조, 제22조, 제23조, 제24조] 회사는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중요시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인정보보호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개인정보처리방침을 통하여 회사가 이용자로부터 제공받은 개인정보를 어떠한 용도와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어떠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알려드립니다.


1) 수집 방법
지역내일 미디어 기사제보

2) 수집하는 개인정보의 이용 목적
기사 제보 확인 및 운영

3) 수집 항목
필수 : 이름, 이메일 / 제보내용
선택 : 휴대폰
※인터넷 서비스 이용과정에서 아래 개인정보 항목이 자동으로 생성되어 수집될 수 있습니다. (IP 주소, 쿠키, MAC 주소, 서비스 이용 기록, 방문 기록, 불량 이용 기록 등)

4) 보유 및 이용기간
① 회사는 정보주체에게 동의 받은 개인정보 보유기간이 경과하거나 개인정보의 처리 목적이 달성된 경우 지체 없이 개인정보를 복구·재생 할 수 없도록 파기합니다. 다만, 다른 법률에 따라 개인정보를 보존하여야 하는 경우에는 해당 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존합니다.
② 처리목적에 따른 개인정보의 보유기간은 다음과 같습니다.
- 문의 등록일로부터 3개월

※ 관계 법령
이용자의 인터넷 로그 등 로그 기록 / 이용자의 접속자 추적 자료 : 3개월 (통신비밀보호법)

5) 수집 거부의 권리
귀하는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동의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다만, 수집 거부 시 문의하기 기능이 제한됩니다.
이름*
휴대폰
이메일*
제목*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