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례 언론인, 번역가
영국의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은 '사이코 ' '새' 같은 소름끼치는 괴기영화들을 대표작으로 남겼을뿐 아니라, 기행(奇行)을 일삼는 괴짜였다. 관객들의 심리적 불안을 폭발 직전까지 극대화했고 화면의 미술적 요소를 악마적으로 이용했다. 런던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그는 미술보다 성악에 자신이 대단했다. 오랜 친구인 성대전문의사 피치 박사가 임상경험상 환자에게 "아~" 하라고 시키면 직업성악가가 아닌데도 훨씬 더 소질을 보이는 사람이 많아서, 오페라에 데뷔시켜준 일도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히치콕이 인간본성을 다룬 가장 무서운 미국단편들을 직접 골라 출판한 '관 (棺)이야기'의 서문에는 새로운 길을 가려고 매일 오페라 아리아를 연습한 경험담이 나온다. 고교시절 '라보엠'의 주역을 맡은 적도 있는 그는 매일 아파트에서 샤워중에 아리아를 불렀다. 폐쇄공간의 근사한 음향효과 때문이었다. 그러다 위층에 사는 우유배달 청년이 새벽배달을 마치면 낮에 자야 하니 노래를 삼가달라고 거센 항의를 해왔다. 미안해진 히치콕은 피치 박사의 이론을 설명해주면서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청년이 성악연습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힘차고 화려했으며 나날이 기량이 발전했지만, 곧 그 위층 사람의 거센 항의를 받기 시작했다. 우유배달청년은 히치콕에게 위층 사람의 음악에 대한 몰이해를 하소연했다.
히치콕은 '그건 시기심 때문이며 당신 노래는 프로의 경지에 가깝다'고 격려했다. 신이 난 청년의 노래는 더욱 힘차고 빈번해졌고 위층 사람이 항의로 욕실바닥을 쿵쿵 때리는 소리도 커져갔다. 그러다가 어느날 샤워중 '피가로'의 아리아를 열창하던 청년이 조용해졌다. 격분한 위층 남자가 대형해머로 바닥을 치는 바람에 무너진 천정에 맞아 숨진 것이다.
어제의 생각 깡그리 잊는 종은 인간뿐
인간의 부정적 속성을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던 히치콕은 그 청년이 아래층의 노래에서 느꼈던 짜증과 분노를 잊지 않고 위층을 배려했더라도 죽게됐을까 반문하면서 건망증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악덕이라고 지적했다.
전체 동물계에서 오직 인간만이 어제의 느낌과 생각, 오늘의 입장과 주장을 깡그리 잊거나 바꿀 수 있는 종이라는 거다. 그건 정치권력과 계급이 존재하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의 약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찌된 셈일까. 요즘 한국 사회에는 최근 '집단 건망증' 비슷한 것이 빈발하고 있다. 그 특징은 속도가 빠르다는 것, 어떤 사람이 발언중 주제를 까먹듯이 중요 의제가 중도 실종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영화 '도가니'를 보고 격분한 국민들 덕에 여야가 모두 성범죄처벌을 위한 이른바 '도가니법'을 제정하겠다고 나섰지만 '성폭력 처벌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은 이미 3년 전 국회법사위에 제출된 채 상정조차 안되고 있었다.
영화 '도가니' 이후 여야가 장애인 대상 성범죄 관련 법안을 3개나 상정했지만 교통정리와 시급한 통과가 필요하다. 또 국회에 획기적인 개혁 법안이 상정될 때마다 회기중 처리되지 않아 폐회와 함께 폐기된 것도 모르고 법안이 통과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임시국회, 정기국회 구별없이 연중 국회가 열려 있고 법안에 관한 심의나 표결도 시한을 정해서 빨리빨리 처리한다면 뜨거운 법안이 자동폐기·증발돼 버리는 일은 없을 것 아닌가.
주제의 핵심을 놓쳐 결과적으로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정부가 논란이 많던 '추가 부자감세'를 철회하기로 하면서 고소득자에 대한 세금공제액의 축소안도 함께 없애는 바람에 고소득자의 세부담이 오히려 줄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데 성공한 '술수의 승리'였다. 겉으로는 '부자감세'를 철회한다고 하면서 억대 연봉자들의 세금을 오히려 깎아줬는데도 국민들은 세법개정안의 내막을 파악하지 못했다.
오세훈의 전비(前非)는 잊은 채…
건망증에서 깨어나는 방법은 한가지다. 한건 한건의 추이를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며 결말이 맺어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는거다. 순간을 모면하더라도 결과적 책임은 모면할 수 없다는 전례를 수북이 쌓아가야 한다.
그것은 오세훈의 전비(前非)를 잊은 채 경마식 지지율 중계와 '인간대결'로 치닫고 있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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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은 '사이코 ' '새' 같은 소름끼치는 괴기영화들을 대표작으로 남겼을뿐 아니라, 기행(奇行)을 일삼는 괴짜였다. 관객들의 심리적 불안을 폭발 직전까지 극대화했고 화면의 미술적 요소를 악마적으로 이용했다. 런던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그는 미술보다 성악에 자신이 대단했다. 오랜 친구인 성대전문의사 피치 박사가 임상경험상 환자에게 "아~" 하라고 시키면 직업성악가가 아닌데도 훨씬 더 소질을 보이는 사람이 많아서, 오페라에 데뷔시켜준 일도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히치콕이 인간본성을 다룬 가장 무서운 미국단편들을 직접 골라 출판한 '관 (棺)이야기'의 서문에는 새로운 길을 가려고 매일 오페라 아리아를 연습한 경험담이 나온다. 고교시절 '라보엠'의 주역을 맡은 적도 있는 그는 매일 아파트에서 샤워중에 아리아를 불렀다. 폐쇄공간의 근사한 음향효과 때문이었다. 그러다 위층에 사는 우유배달 청년이 새벽배달을 마치면 낮에 자야 하니 노래를 삼가달라고 거센 항의를 해왔다. 미안해진 히치콕은 피치 박사의 이론을 설명해주면서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청년이 성악연습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힘차고 화려했으며 나날이 기량이 발전했지만, 곧 그 위층 사람의 거센 항의를 받기 시작했다. 우유배달청년은 히치콕에게 위층 사람의 음악에 대한 몰이해를 하소연했다.
히치콕은 '그건 시기심 때문이며 당신 노래는 프로의 경지에 가깝다'고 격려했다. 신이 난 청년의 노래는 더욱 힘차고 빈번해졌고 위층 사람이 항의로 욕실바닥을 쿵쿵 때리는 소리도 커져갔다. 그러다가 어느날 샤워중 '피가로'의 아리아를 열창하던 청년이 조용해졌다. 격분한 위층 남자가 대형해머로 바닥을 치는 바람에 무너진 천정에 맞아 숨진 것이다.
어제의 생각 깡그리 잊는 종은 인간뿐
인간의 부정적 속성을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던 히치콕은 그 청년이 아래층의 노래에서 느꼈던 짜증과 분노를 잊지 않고 위층을 배려했더라도 죽게됐을까 반문하면서 건망증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악덕이라고 지적했다.
전체 동물계에서 오직 인간만이 어제의 느낌과 생각, 오늘의 입장과 주장을 깡그리 잊거나 바꿀 수 있는 종이라는 거다. 그건 정치권력과 계급이 존재하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의 약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찌된 셈일까. 요즘 한국 사회에는 최근 '집단 건망증' 비슷한 것이 빈발하고 있다. 그 특징은 속도가 빠르다는 것, 어떤 사람이 발언중 주제를 까먹듯이 중요 의제가 중도 실종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영화 '도가니'를 보고 격분한 국민들 덕에 여야가 모두 성범죄처벌을 위한 이른바 '도가니법'을 제정하겠다고 나섰지만 '성폭력 처벌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은 이미 3년 전 국회법사위에 제출된 채 상정조차 안되고 있었다.
영화 '도가니' 이후 여야가 장애인 대상 성범죄 관련 법안을 3개나 상정했지만 교통정리와 시급한 통과가 필요하다. 또 국회에 획기적인 개혁 법안이 상정될 때마다 회기중 처리되지 않아 폐회와 함께 폐기된 것도 모르고 법안이 통과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임시국회, 정기국회 구별없이 연중 국회가 열려 있고 법안에 관한 심의나 표결도 시한을 정해서 빨리빨리 처리한다면 뜨거운 법안이 자동폐기·증발돼 버리는 일은 없을 것 아닌가.
주제의 핵심을 놓쳐 결과적으로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정부가 논란이 많던 '추가 부자감세'를 철회하기로 하면서 고소득자에 대한 세금공제액의 축소안도 함께 없애는 바람에 고소득자의 세부담이 오히려 줄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데 성공한 '술수의 승리'였다. 겉으로는 '부자감세'를 철회한다고 하면서 억대 연봉자들의 세금을 오히려 깎아줬는데도 국민들은 세법개정안의 내막을 파악하지 못했다.
오세훈의 전비(前非)는 잊은 채…
건망증에서 깨어나는 방법은 한가지다. 한건 한건의 추이를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며 결말이 맺어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는거다. 순간을 모면하더라도 결과적 책임은 모면할 수 없다는 전례를 수북이 쌓아가야 한다.
그것은 오세훈의 전비(前非)를 잊은 채 경마식 지지율 중계와 '인간대결'로 치닫고 있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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