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례 언론인·번역가
세계적인 시사만화가 홀스트 하이칭거의 아름답고 독설적인 환경만화집 '트로트 델 에르데(지구산책)'는 한면짜리 채색 풍자만화들이 가득한 특대 판형의 전설적인 명저다.
뮌헨 교외의 먼 숲에서 은둔한 채 만화를 그리는 그는 원고청탁차 찾아오는 자동차나 헬기를 금지할만큼 투철한 환경보호주의자로 유명하다. 슈피겔지에 연재하는 흑백 정치풍자만화와 달리 그의 환경만화들은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전 지구적 환경재앙을 기발한 유머와 완성도 높은 채색화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수천 수만대의 자동차들로 이뤄진 해일이 바닷가를 엄습하거나, 리오데자네이로 세계환경회의가 무산되자 이 도시의 상징인 두팔 벌린 예수상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슬픔에 젖는 식이다.
그 만화들을 일간지 1면 한복판에 연재하려고 작업 중이던 어느날 배달된 격월간 '녹색평론' 창간호는 충격적인 '물건'이었다. 우리들의 관심을 기술적인 해외 환경운동으로부터 이 나라의 생태와 농업, 절박한 삶의 문제로 향하게 했고, 지배엘리트의 잘못된 정책 대신 숨어 있던 농민 학자 운동가의 목소리와 대안을 부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녹색평론이 창간된 90년대는 일시적 호황으로 소비만능시대여서, 일간지들조차 광고만 생기면 증면을 하는 통에 신문사마다 섹션 창간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신문들은 나날이 뚱뚱해져 50면이 넘었고 현란한 광고로 도배되어 과소비를 부추겼다.
신문 잡지 할 것 없이 과도한 색채와 이미지, 과다광고와 선정적 편집으로 시선끌기 경쟁을 하는 판에 활자뿐인 '녹색평론'이라니! 불과 160면짜리 여윈 몸매와 '화장기 없는 얼굴'(서 숙 교수 표현)로 등장한 녹색평론의 첫호는 완전 3무 3경( 3無 3驚)이었다.
사진·광고·명사필진 없는 '3무 잡지'
사진이 없고, 광고가 없고, 다른 매체같은 이른바 명사 필진이 없었다. 발행인(문학평론가 영남대 김종철 교수)에 놀랐고, 값싸고 험한 지질에 놀랐고, 무엇보다 그 내용에 놀랐다. 어떤 책과도 다른, 한국에는 없던 이런 잡지가 몇해나 버틸 수 있을까가 모든 사람들의 걱정이자 호기심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는 창간사의 첫머리처럼 이 잡지는 인간생존의 자연적 토대 자체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다는 인식에서 농업중심 사회의 재건, 생태적 사회적 위기와 모순의 척결을 목표로 했다. '세계화'의 구호아래 대기업과 상업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우리들의 삶, 농업적 기반의 붕괴에 대한 정책적 무관심과 농민에 대한 경시를 질타하며 물질만능주의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잡지가 한국에서 장수를 누린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도 20년을 버티어낸 '녹평'은 초기 1000부에서 지금은 정기구독자만 5000명을 넘어섰고 가끔 '완판'되기도 한단다. 유서깊은 문예지 1위 '창작과 비평'과 맞먹는 역할과 부수라는 사람들도 있다. 좋은 교사 이계삼, 좋은 신학자 박경미, 좋은 농부 천규석씨 같은 필자의 글은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사유한 내용으로 독자들의 큰 호응과 존경을 받았다.
이번 20주년 기념호에 김종철 발행인이 처음으로 '원고청탁'을 했다는 천규석씨('쌀과 민주주의'의 저자 )의 글을 보고 한결같이 자주 등장하던 그의 글이 오직 자발적 '기고'였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로 전국 각지의 필자들이 자발적으로 제작에 참여했다. 농업공동체 생태건축 생명공학 등에 관한 글과 반핵, 대안교육, 금융 위기, 지역화폐 같은 이슈도 단골메뉴였다. 최근에는 일본 원전사태와 4대강 사업, 미국발 금융위기, 한미FTA처럼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현안문제들을 다뤄왔고 지역별 독자모임들도 활발해지고 있다.
농촌공동체 중심의 자립적 삶 목표
창간 이후 권두언과 직접 쓴 강연원고들을 모아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란 책을 내기도 했던 김종철 발행인은 광란적인 낭비적 생산과 소비생활의 고삐를 잡지 못하면 인류 파멸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는 '녹평' 10주년 때에도 세계적 폭력과 불평등의 원천이 과소비의 삶, 무제한의 자원낭비를 낳는 미국적 생활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소비주의의 거품을 걷고 자급능력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농촌공동체 중심의 자립적 삶을 목표로 한 '녹색평론'의 승승장구는 현재의 정치상황에선 '기적'에 가깝다. 그 기적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 편집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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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시사만화가 홀스트 하이칭거의 아름답고 독설적인 환경만화집 '트로트 델 에르데(지구산책)'는 한면짜리 채색 풍자만화들이 가득한 특대 판형의 전설적인 명저다.
뮌헨 교외의 먼 숲에서 은둔한 채 만화를 그리는 그는 원고청탁차 찾아오는 자동차나 헬기를 금지할만큼 투철한 환경보호주의자로 유명하다. 슈피겔지에 연재하는 흑백 정치풍자만화와 달리 그의 환경만화들은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전 지구적 환경재앙을 기발한 유머와 완성도 높은 채색화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수천 수만대의 자동차들로 이뤄진 해일이 바닷가를 엄습하거나, 리오데자네이로 세계환경회의가 무산되자 이 도시의 상징인 두팔 벌린 예수상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슬픔에 젖는 식이다.
그 만화들을 일간지 1면 한복판에 연재하려고 작업 중이던 어느날 배달된 격월간 '녹색평론' 창간호는 충격적인 '물건'이었다. 우리들의 관심을 기술적인 해외 환경운동으로부터 이 나라의 생태와 농업, 절박한 삶의 문제로 향하게 했고, 지배엘리트의 잘못된 정책 대신 숨어 있던 농민 학자 운동가의 목소리와 대안을 부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녹색평론이 창간된 90년대는 일시적 호황으로 소비만능시대여서, 일간지들조차 광고만 생기면 증면을 하는 통에 신문사마다 섹션 창간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신문들은 나날이 뚱뚱해져 50면이 넘었고 현란한 광고로 도배되어 과소비를 부추겼다.
신문 잡지 할 것 없이 과도한 색채와 이미지, 과다광고와 선정적 편집으로 시선끌기 경쟁을 하는 판에 활자뿐인 '녹색평론'이라니! 불과 160면짜리 여윈 몸매와 '화장기 없는 얼굴'(서 숙 교수 표현)로 등장한 녹색평론의 첫호는 완전 3무 3경( 3無 3驚)이었다.
사진·광고·명사필진 없는 '3무 잡지'
사진이 없고, 광고가 없고, 다른 매체같은 이른바 명사 필진이 없었다. 발행인(문학평론가 영남대 김종철 교수)에 놀랐고, 값싸고 험한 지질에 놀랐고, 무엇보다 그 내용에 놀랐다. 어떤 책과도 다른, 한국에는 없던 이런 잡지가 몇해나 버틸 수 있을까가 모든 사람들의 걱정이자 호기심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는 창간사의 첫머리처럼 이 잡지는 인간생존의 자연적 토대 자체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다는 인식에서 농업중심 사회의 재건, 생태적 사회적 위기와 모순의 척결을 목표로 했다. '세계화'의 구호아래 대기업과 상업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우리들의 삶, 농업적 기반의 붕괴에 대한 정책적 무관심과 농민에 대한 경시를 질타하며 물질만능주의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잡지가 한국에서 장수를 누린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도 20년을 버티어낸 '녹평'은 초기 1000부에서 지금은 정기구독자만 5000명을 넘어섰고 가끔 '완판'되기도 한단다. 유서깊은 문예지 1위 '창작과 비평'과 맞먹는 역할과 부수라는 사람들도 있다. 좋은 교사 이계삼, 좋은 신학자 박경미, 좋은 농부 천규석씨 같은 필자의 글은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사유한 내용으로 독자들의 큰 호응과 존경을 받았다.
이번 20주년 기념호에 김종철 발행인이 처음으로 '원고청탁'을 했다는 천규석씨('쌀과 민주주의'의 저자 )의 글을 보고 한결같이 자주 등장하던 그의 글이 오직 자발적 '기고'였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로 전국 각지의 필자들이 자발적으로 제작에 참여했다. 농업공동체 생태건축 생명공학 등에 관한 글과 반핵, 대안교육, 금융 위기, 지역화폐 같은 이슈도 단골메뉴였다. 최근에는 일본 원전사태와 4대강 사업, 미국발 금융위기, 한미FTA처럼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현안문제들을 다뤄왔고 지역별 독자모임들도 활발해지고 있다.
농촌공동체 중심의 자립적 삶 목표
창간 이후 권두언과 직접 쓴 강연원고들을 모아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란 책을 내기도 했던 김종철 발행인은 광란적인 낭비적 생산과 소비생활의 고삐를 잡지 못하면 인류 파멸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는 '녹평' 10주년 때에도 세계적 폭력과 불평등의 원천이 과소비의 삶, 무제한의 자원낭비를 낳는 미국적 생활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소비주의의 거품을 걷고 자급능력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농촌공동체 중심의 자립적 삶을 목표로 한 '녹색평론'의 승승장구는 현재의 정치상황에선 '기적'에 가깝다. 그 기적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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