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원대 실용음악과 녹음실에서 만난 톱밴드 송홍섭 심사위원장.
최근 가요계는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이다. 보는 음악보다 듣는 음악의 결핍, 댄스 음악 위주의 다양성 부족이 낳은 과열일까. '슈퍼스타K'를 비롯, '위대한 탄생'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 등을 비롯해 아나운서 선발과 개그 프로그램에서마저 오디션 패러디가 나올 정도다. 그 중 최고 5명 구성의 밴드팀이 출전하는 한국 가요사상 가장 큰 규모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밴드오디션 '톱밴드' 시즌1이었다. 국내 밴드음악의 전성기를 이끌던 로커들이 귀환해 이 프로그램과 잘 어우러졌다. 시나위의 신대철, 백두산의 김도균 등 레전드급 밴드마스터들이 참여했다. 5개월간(6월 4일~10월 15일) 수많은 밴드들과 밴드 음악을 사랑하는 팬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시즌1을 마친 톱밴드는 팬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이제 막 자신을 세상에 알리는 순수한 열정, 유년시절 밴드 추억 대리만족, 록이 갖는 순수한 진정성을 표현하면서 순전히 실력으로만 대결한 최고의 프로였다"고 회고하는 심사위원장 송홍섭씨(57)를 만났다.
"톱밴드 프로그램은 일류 프로젝트"
왜 톱밴드인가? 심사위원장 송흥섭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사실 이같은 질문도 필요없다. 그의 음악인생의 출발점은 밴드다. 열여섯 고등학교 때 문득 밴드가 하고 싶어 시작했다. 전설적인 그룹 사랑과 평화 및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기타리스트, 한영애 '누구없소'와 조용필 7집 프로듀싱, 김현식의 '내 사랑 내곁에'의 음반 프로듀싱 등 41년 음악 경력을 통해 밴드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한다.
송위원장은 "밴드 출신들은 원초적으로 음악의 프로세스를 잘 안다. 생명력이 있다"며 "그래서 밴드 출신은 평생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품고 산다"고 말했다. 물론 밴드 생활의 반은 노가다다. 악기를 들고 가야 하는 일부터 미리 가서 준비하는 것 등등 이동 자체가 중노동이다.
그는 5개월간 진행해온 톱밴드 프로그램에 대한 애착이 크고 심사위원장으로서 내세우는 기준도 높았다. 그의 주문은 차원이 높았다. "카피 수준이 아니라 지역적 오리지널을 원한다." 다시 말하면 "팝과 록의 본고장에 내놓을 만한 로컬화된 음악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는 톱밴드의 목표에 대해 "지역적 오리지널리티를 갖추고 글로벌로 진출하는 일들은 대개 슈퍼스타들이 해낸다. 앞으로 톱밴드에서 그런 사람이 나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시즌1에 대해서 "중반까지 산만하고 집중도가 떨어지는 등 시행착오는 많았지만 진지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밴드의 진정성을 지켰다. 마니아도 생겼다"며 "시즌2에서도 이걸 지키면 이 오디션 프로그램이 없더라도 장기적으로 '정신'의 핵심이 계승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심각한 기준을 내세우는 이유도 명확했다. "선배이기도 하고 그렇게 해야 예능으로 가려다 되돌아온다." 출연자들에 대해서는 "그렇지만 지금 나온 사람들에 대해 극찬은 못하겠다. 더 잘하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커서다"고 특유의 독설을 쏟아냈다.
▲ 밴드 오디션 톱밴드 엠블렘
시즌1과 시즌2의 차이? "아마와 프로 나눈다"
톱밴드 시즌1을 마친 그에게 톱밴드의 강점과 매력에 대해 물었다.
"심사위원장으로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구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참가자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 있다. 톱밴드의 강점은 노래만 보는 오디션이 아니라는 거다. 탑밴드는 순간에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그로인해 중반까지 산만하고 집중도가 떨어지는 등 시행착오가 많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진정성 생겼다. 톱밴드는 1등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계속할 사람을 뽑는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 가장 성공한 대목 같다."
시즌2가 궁금했다. 그는 "시즌2는 아마추어와 프로를 분리해 출발한 다음 나중에 같이 합치는 컨셉이라고 들었다. 중간 과정을 디테일하게 준비 하는 것 같다"라며 "참가자들을 데리고 주류 팝음악 장소에서 연주를 비교하며 시작하는 것을 비롯한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다. 해외밴드를 참여시켜 '비교'해보는 것도 화두 중 하나"라고 귀띔했다.
오디션은 오락과 실력의 균형점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최근 범람하는 오디션들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참가하기로 한 이상 감수해야할 부분이 있다. 싫으면 안 나오면 된다. 일단 기회가 왔으니 자기 하기 나름 아닌가"라고 답했다.
"홍대 앞 인디요? 음반 내려고 해도 낼 게 없다"
그는 이 프로에서 '솔트(Salt)'로 통했다. 점수를 짜게 주어 '짠소금'이었다. 그의 홍대 앞을 비롯한 인디음악에 대한 점수도 짰다.
그는 "삐삐밴드와 유앤미블루 등의 음반 제작도 해봤다. 그래서 음반을 만들기 위해 홍대 앞에 수없이 다녀봤다. 그러나 그들 실력을 보면 100전 100패다. 간신히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라며 모두 자신의 기준미달이었다고 소개했다.
그의 밴드음악에 대한 기준이 도대체 뭔지 궁금했다. "외국 음악가들은 성공하기 전 까지는 아주 가난한생활을 한다. 자기 음악을 하느라 사이드 잡을 해가며 힘들 게 산다.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이 미국공연을 마치고 일본 공연을 할 때 팀이 깨져 몇 명이 필요했다. 급하게 일본 현지에 밴드를 알아보고 사람을 구해 공연을 했는데 아주 잘했고 편하게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A급, 글로벌로 치면 B+급 정도였다. 그에게 평소 뭘 하느냐고 물어보니 책방 점원과 접시닦이를 한다고 했다."
그는 아직 한국의 밴드를 '우물 안 개구리'로 본다. "하루에 8~10시간 10년 정도 소리 내보지 않았으면 판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어느 분야든 전문가가 되려면 1만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1만시간의 법칙'과 비슷한 논리다. 한국 인디밴드에 대해서도 "홍대 앞 인디 정도로는 함량미달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고 짠소금 같은 진단을 내렸다.
▲ 밴드 오디션 톱밴드 송홍섭 심사위원장
"좋은 음악은 치장이 아니라 정직해야 한다"
그는 고1 때 밴드를 시작했다. 16살이었다. 인천 부두의 시멘스타운 클럽에서 무대에 섰다. 때론 동두천 앞 클럽까지 진출했다. 군에서 제대하고 '한동안 뜸했었지'로 레전드가 된 한국 밴드 2세대 사랑과 평화 1집을 통해 데뷔했고, 2집까지 냈다.
이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NHK 실황을 비롯해 9~15집에 참여했다. 이후 주로 앨범활동을 많이 했다. 41년째 밴드를 통해 현장에서 배우고 익힌 그의 음악에 대한 기준은 뚜렷했다. "치장을 경계하고 정직해야 좋은 음악이다." 그는 "치장이 나쁘지는 않지만 너무 조미료를 많이 치면 안 좋다. 생명력이 짧다"고 했다.
그의 좋은 음악에 대한 가치와 그렇지 못한 음악에 대한 질타는 거침이 없었다. "밴드는 기본적으로 4~5명이다. 컴퓨터에 의존하다보면 앙상블을 경험하지 못하고 음악이 만들어지는 프로세싱을 모른다. 음악이 잘못 만들어지면 공해다. 심하면 병난다. 안 좋은 음악은 두통 같은 것을 일으킨다."
그는 "음악가는 타의에 의해 긴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반응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이라며 "게으르고 나태해지면 음악 못한다. 순수하게 반응하면서 만든 음악들만 사람들이 돈내고 산다"고 강조했다. 최근 음악의 힘이 떨어진 것에 대해 컴퓨터에 너무 많이 의존하기 때문이라는 진단도 내놨다.
오디션이 너무 범람하는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해 그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수그러들 수도 있다. 쉽게 질려버릴 수 있다. 그래서 오디션이란 이름 안 쓰고 다른 용어를 쓰며 형태를 변화시켜갈 것이다. 하지만 심지만 정확하면 그 프로그램은 오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톱밴드를 통해 "한국 록이나 음악이 주류팝에 편입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톱밴드를 통해 그런 가능성이 있는 밴드가 배출되었으면 하는 게 심사위원장으로서의 최대 희망"이라는 것. 아직 역량이 있는 밴드가 드러나지 않는 현실에서 "톱밴드가 그런 자생적 토양과 온실을 마련해주었으면 한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 호원대 실용음학과 녹음실 드럼 앞에선 송홍섭 톱밴드 심사위원장.
"톱밴드되려면 10년 고생 각오해야"
그는 음악가가 되는 과정의 고통스러움에 대해 말했다. "예술가 되는 것은 고통스럽다. 가난할 각오를 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형 동생하는 정서가 있다. 이런 정서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외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관대한 정서이다. 이것은 좋은 면도 있지만, 이런 것이 같고 있는 단점을 알아낼 수 있는 현명함과 함께 10년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속된 말로 '밥 못먹을 각오'가 필요하다."
밴드는 2명이 될 수도 있고, 5~6명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2인 이상이면 밴드다. 그는 "서로의 소리를 들으면서 감정을 교류하고, 앙상블을 이루어 음악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밴드다"라고 설명했다.
밴드의 성공은 절대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다. 공연의 성공이 순간에 좌우되는 것도 밴드다. 그는 "누구 하나 순간적으로 자기 잘난 척하면 망한다. 틀리면 안된다. 철저히 준비 안하면 망한다. 한번 오면 안 오는 지문과 같다"
물론 인디 밴드의 설 곳이라곤 홍대가 유일한 것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표시했다. "대학로 연극로처럼 상설로 공연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안타깝다."
밴드 생활과 함께 편곡만 1000여곡을 한 그는 현재 4년째 호원대 실용음악과 교수이기도 하다. 따라서 학교의 학생들에게 자주 이야기한다. "음악이란 어느 순간 느껴 시작하는 것이지 왜?는 없다. 그리고 10년을 고생할 각오를 해라"는 것이다.
고향 춘천 귀향, "요새야 음식이 맛있는 줄 알았다"
그는 최근 고향 춘천으로 귀향했다. 건강이 나빠져서다. 아내랑 매일 등산을 해 체중 12kg을 뺐다. 체중을 줄였더니 지구력이 3시간 늘어난 것 같다. 대신 일하는 시간이 3시간 늘었다.
그는 "살면서 늘 시간이 아까웠다. 얼마나 오랫동안 집중하느냐에 성패가 달렸으니까 밥먹는 일을 등한시 했다. 한끼 먹으면 머리가 3시간 동안 탁해져서 였다. 3~4시간씩 시간이 허비되는 것이 아까워 일이 끝날 때까지 안먹고 안자고를 반복했다"며 "그러다보니 심근경색, 췌장암 등 중환자실만 3번 갔다. 이제 운동을 하면서 몸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웠다. 요새야 음식이 맛있는 줄 알게 되었다"고 웃었다.
정신이 탁해져 30년 동안 술을 전혀 안먹었던 그는 중환자실에 갔다오고 난 이후 담배를 끊었고 지금은 1주일에 한번 정도 와인 1~2병 정도 즐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인 아내 외에 방임주의로 키운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문예창작가를 나와 글을 쓰며 IT 관련일을 하고 있고, 중학생때까지 연주가 지망생이었던 딸은 '능력이 없다'며 어느날 포기하고 현재 프랑스대사관에 인턴으로 근무중이다.
음악을 하지 않았으면 과학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그는 애플 음악관련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페이스북으로 사람도 만나고 트위터로 주로 소식을 듣는 신세대 교수님이다. 그는 가족을 소개하며 "딸이 재능의 한계를 알고 빨리 그만 둔 것은 굉장히 잘한 것이다. 음악가의 길을 지망하는 사람 중에 그걸 판단 못하는 사람이 많다"며 웃었다. [연예부 박명기 기자]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