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한나라당은 하루 종일 시끄러웠다. 당일 정치일정도 일정이었지만 아침부터 의원회관에 돌기 시작한 소위 '살생부'로 불린 명단 때문이었다. 이름을 올린 국회의원은 42명.
서울과 경기, 영남 등 지역별 38명 의원의 명단에 '예비명단'이라며 친절하게 4명을 덧붙인 형식이었다. 살생(殺生)에는 '죽인다'는 뜻도 '살린다'는 뜻도 포함돼 있는데, 이날 나돈 살생부에는 '죽인다'는 뜻만 있어 더욱 살벌했다.
살생부에 이름을 올린 해당 의원과 보좌진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일부 의원실에서는 "누가 만든 것이냐"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조용하게 출처 추적에 나선 의원실도 있었다.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뿌렸을 것인데, 여러 살생부에 똑같은 이름이 반복되면 불리하다"라는 이야기와 "누군가 자기가 싫어하는 의원의 이름을 나열한 장난질"같은 말이 떠돌았다.
사실 살생부는 매번 공천 때마다 유령처럼 출몰했다. 그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18대 총선 공천이 진행 중이던 2008년 2~3월에도 한나라당 안팎에서는 어김없이 살생부가 돌았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조차 당시 기자회견에서 "오로지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공정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BBK 이야기를 한 사람은 공천에 안 된다는 둥 살생부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아니다"고 지적했을까.
살생부가 힘을 발휘하는 조건은 '불안'이다. 자신이 가진 정보만으로는 현재와 미래를 판단할 수 없을 때 불안은 도둑처럼 다가와 존재를 뒤흔든다.
그것이 구체적인, 예를 들어 명단 같은 형태가 될 때 뒤흔드는 힘은 배가 된다.
반면 살생부가 무력해지는 조건은 '예측가능성'과 '무관심'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떤 기준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처리될 지가 명확하면 루머도, 루머 같은 살생부도 힘을 잃는다.
관심을 갖지 않는 쪽은 살생부를 생산하는 쪽의 의도를 무력화 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살생부가 떠들썩했던 26일, 그날 한나라당 사정은 살생부에 힘을 싣는 쪽이었을 따름이다.
허신열 기자 syhe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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