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E.H. 카 평전’

지역내일 2012-04-27
'역사' 통해 냉전시대 고발한 반항아

차미례 언론인·번역가

"역사책을 읽을 때 그 책에 실린 사실보다는 그 책을 쓴 역사가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

삼천리/조너선 해슬럼지음/박원용 옮김/35000원

지식인의 필독서로 손꼽히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명성에 비하면 오히려 저자인 E.H.카(에드워드 핼릿 카: 1892~1982)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그가 단순한 역사가가 아니라 외교관, 언론인, 정치학자, 저술가로 살아간 한 평생은 말 그대로 20세기의 가장 역동적인 한 시기였다.

영국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냉전시대를 역사가로 살았던 죄(?)로 그는 누구보다도 왕성한 저술과 활동을 하면서도 언제나 보수적인 영국 사회의 냉대와 비난 속에서 반항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역사책을 읽을 때 그 책에 실린 사실보다는 그 책을 쓴 역사가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지금 이 시대의 우리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사실을 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진보에 대한 신념 , "역사란 무엇인가"

그러나 "역사란 무엇인가"가 쓰여진 배경이나, 냉전시대임에도 그가 러시아문학과 러시아 혁명에 깊이 감동하고 심취하여 방대한 "소비에트 러시아사"(전14권) 같은 대표적 저작물을 남긴 사정이 한국에서는 좀 덜 알려졌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70년대 이후 서슬 퍼런 군사독재 권위주의 한국사회에서 그의 책이 한결같이 대학들의 권장도서 목록이나 국민적(?) 필독서 목록에 오를 수 있었을까. 필독서 목록에 논어 맹자 성경 명심보감 같은 고전들과 명저들의 타이틀이 세습적으로 올라가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말이다.

저자 조너선 캐슬럼은 케임브릿지대 역사학부 교수이며 이 대학에서 EH카의 지도를 받았던 제자다. 버밍엄에서 소비에트 외교정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예일, 하버드, 스탠퍼드, 프린스턴대와 연구소 초빙교수를 지낸 그는 "정확함과 성실함"을 병적으로 밀고나가던 스승의 학자, 언론인, 논쟁가로서의 면모를 기록하고 싶어했다.

이 책의 원제가 '성실함의 해악'인 것도 너무 정확하고 성실했지만 그 누구와도 타협을 몰랐던 EH 카의 인간적 면모를 함축한 것이다. '성격이 운명'이란 말은 맞는 것 같다. 그의 불같은 성격과 자기중심적이고 때로는 비정하기까지 한 인간관계, 가족 관계, 개인사에서 드러난 복잡한 인간성은 때로는 '악마'적인 느낌이 들 정도였고 그렇게 불리기도 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동원한 자료에는 스승의 저작과 논문, 1925년부터 1960년까지의 비망록과 육필 기록들 뿐 아니라 사적인 편지들, 가족과 동료들의 회고록등 사생활에 관한 많은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집필에만 10년 이상이 걸린 방대한 분량으로, 카의 어린시절부터 러시아 파견 외무부 임시직원시절, 저널리스트와 국제정치학 교수생활, 동서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좌우파로부터 비판받던 시대, 말년의 신좌파 논쟁에 이르기까지를 망라하고 있다.

책의 9장 "화려한 명성, 불행한 개인사"처럼 사생활에 관련된 인물들을 인터뷰하거나 증언이나 편지를 통해 그의 삶을 재구성한 부분도 흥미를 끈다. 1961년 카는 논쟁적 라이벌이었던 이사야 벌린을 비롯한 보수 논객들에게 한방 먹이기 위해 그가 1961년부터 케임브릿지 대학에서 진행했던 트레벨리언 강연을 묶어 책으로 낸다. 그 책이 바로 '역사란 무엇인가'였고, 즉각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그는 대중적 인기와 명성을 누리며 저술가로서의 생애를 살게 된 셈이다.

그의 강연은 '진보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린 영국사회에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2차대전 종전후 지식인사회의 비관주의와 냉전적 태도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강해서 적잖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카의 왕성한 저작활동은 '낭만의 망명객들'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평전' '카를 마르크스' '나폴레옹에서 스탈린까지' 같은 명저들을 많이 생산했다.

하지만 1944년에 집필을 시작해서 33년만에 완간한 14권짜리 '소비에트 러시아사'는 대표저작물임에도 하필 러시아 역사를 썼다는 이유로 평가절하 되었다.

저자 해슬럼이 기록하고 묘사한 카의 개인사는 인간적인 면에선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다.

특히 저술에 관련, 교유하거나 작업을 같이 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희생을 강요당했다. 평전 치고는 세밀하게 묘사된 사생활은 세 번이나 결혼했지만 사회성이 부족하고 이기적이며 인간미 없는 결벽주의자였던 그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특히 카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집필자료의 정리와 사료의 발굴등 많은 작업을 도맡았던 아이작과 타마라 도이처 부부는 자신들도 학자이면서 끊임없이 카의 도발로 구체적인 논쟁에 말려들었고 그의 이기적인 지시와 요구에 시달렸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카의 독특한 집필방식이었다고 해슬럼은 기록하고 있다.

H 카의 모든 저작활동과 개인사 집대성

E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안에서 자신만의 서술방법을 설명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일반적인 역사가들은 작업의 단계를 첫째, 자료를 읽으면서 자기 연구노트를 역사적 사실로 채우는 오랜 준비기간을 거치고 둘째, 읽은 자료는 치우고 연구노트를 보며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써내려간다.

그러나 나는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몇가지 자료를 확보해놓고 내 주장에 따라 곧바로 쓰기 시작한다. 그 다음부터 읽기와 쓰기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그 과정에서 습득한 지식과 그 의미에 따라 내용을 첨삭하거나 집필방향도 수정해나간다."

그처럼 치밀했던 학자 EH 카가 단 한번도 대학에서 정식 교수로 일한 적이 없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는 친 정부적인 '더 타임스'지의 편집부국장으로 일하면서 도전적인 '미운 오리새끼'로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윈스턴 처칠의 정책을 사사건건 비판하다가 결국 사표를 던진 비타협적 인물이었다. 그는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밀어 부쳤다. 그런 성격과 태도가 당대에는 새롭고 혁신적인 새로운 논객으로 관심과 인기를 끈 것도 사실이다.

640쪽의 이 방대한 E.H.카 평전은 소비에트사를 전공한 서양사학자 박원용교수(부경대)의 정밀한 완역으로 출간되었다. "위대한 사람들의 미숙함은 보통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이다"라는 EH 카 자신의 말처럼, 책에 담긴 굴곡 많은 그의 삶은 우리에게 독서의 재미를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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