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초대 대법원장의 손자다. 전두환 정권 시절 민정당 국회의원 8년, 노태우 정부 시절 장관과 청와대 수석. 민자당 국회의원을 지내다 비리혐의로 1994년 사직. 2004년 구민주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2011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2012년 박근혜 후보 캠프 선대위원장. 대단한 스펙이고, 놀라운 생명력이다. 김종인 전 의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며칠 전 어떤 칼럼에서 남재희 전 장관은 '김종인 프레임'이란 표현을 썼다. 그가 헌법 119조 2항에 경제민주화란 '낱말'을 집어넣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경제민주화의 원조라는 인식이 과연 합당한 것일까?
그가 헌법 조항에 '경제의 민주화'란 단어를 넣은 건 맞다. 하지만 사실 그 이전 헌법에도 경제민주화를 담은 조항은 있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5공 헌법에도 '경제 민주화' 들어 있어
1948년의 제헌헌법 제84조에 이런 조항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 이 조항은 비록 문구가 조금 바뀌긴 했지만 1963년 개정이나 심지어 쿠데타로 집권한 5공 헌법에도 들어 있다.
1987년에 개정된 헌법의 제119조 제2항은 이렇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전과 비교할 때 그리 나아진 것 같지 않다. 키워드가 사회정의에서 경제민주화로 바뀐 것은 내용상 후퇴다.
요컨대 없던 걸 새로 넣은 것도 아니고, 더 강화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헌법개정 당시 특위의 야당 간사를 지낸 박찬종 전 의원은 경제민주화 조항이 이미 야당의 초안에 담겨 있었고, 김 전 의원이 속한 민정당의 반대를 꺾고 관철시켰다고 한다. 따라서 헌법 119조 2항을 근거로 김종인 전 의원에게 경제민주화 아젠다의 소유권이 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김 전 의원이 경제민주화의 전도사로 알려지게 된 배경에는 노태우정권 당시 재벌들을 상대로 한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 조치를 주도했다는 사정이 있다. 노태우정권이 재벌들에게 베푼 특혜가 얼마인데 이것만 따로 떼어내 경제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고 하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김 전 의원이 모름지기 경제민주화를 필생의 염원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줄기차게 이걸 위해 노력했어야 한다. 하지만 10년 만인 17대 국회에서 다시 법안발의 권한을 쥐었으나 그가 경제민주화의 입법을 위해 분투했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없다.
더 심각한 것은 그의 접근방식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대통령의 귀를 잡고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일종의 포고령(decree) 정치다. 경제민주화도 결국 권력관계의 민주화다. 다시 말해 재벌 대기업의 권력을 제도적으로 제어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대항권력을 육성함으로써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압에 의한 민주화는 형용모순이다.
이런 사람에게 경제민주화 이슈 빼앗기다니
김종인 전 의원은 '경제민주화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을 공천한 것이 못마땅해 비상대책위원 자리를 내놓았다. 그런 그가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다시 박근혜 의원 곁에 섰다. 해명 한줄 없다. 줄·푸·세와 경제민주화가 큰 틀에서 같다고 하는 박 의원과 더불어 개혁을 도모한다니 더욱 가당찮다. 게다가 최근 자신은 재벌개혁에 대해 말해 본 적이 없다고 하니 그가 말하는 경제민주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해진다.
오죽하면 남 전 장관이 "머리를 한대 맞은 듯 멍한 느낌"이라고 할까. 이런 사람에게 경제민주화의 이슈 오너십을 빼앗기고, 어영부영하는 민주당이나 드잡이하는 통합진보당을 쳐다보면 답답함을 넘어 화가 치민다. 2012년 여름, 참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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