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희/서울사이버대 교수/부동산학
정치가를 위한 정치. 은행·자본가를 위한 은행, 국가를 위한 국민, 종교가를 위한 종교, 교육자를 위한 교육, 공직 종사자를 위한 행정, 언론기관을 위한 언론, 농협을 위한 농민 … . 정말 이렇게 가면 곤란하다. 수단이 목적을 넘어서면 곤란하다.
2002년 기존 제2 금융권의 대명사였던 '신용금고'가 '은행'이란 이름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리고 2006년 부동산투자의 길도 정치가들의 깊은 배려 속에 제공되었다.
과연 누구를 위한 개명이고 투기업무 확장이던가. 은행과 금고의 경계를 허물어 금고가 은행과 함께 자유롭게 활동하게 한 것은 과연 예금자를 위한 조치였던가. 금융자본가를 위한 조치였던가. 예금의 주인(예금자)보다는 관리인(은행주)의 재량을 확대하고 문패를 바꿔달게 해준 것은 과연 국민의 대표기관인, 서민의 대변인인 법을 만들고 고치는 그 분들의 깊고 넓은 아량 때문 아니였던가.
문패를 바꿔주고 영업권을 확장해줄 때 그 위험성을 알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분들의 자질에 관한 문제이다. 만일 이러한 이들이 금융자본가과 정치권의 야합이였다면 국민은 누굴 바라보아야 하나.
연일 터지고 있는 저축은행의 사건들을 보면서 몇 백억, 몇 천억의 금전이 아무런 제제 없이 금융자본가의 개인적 의사대로 무제한 사용된 것을 보면서, 참으로 씁쓸한 생각을 하게 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금융자본주의의 위기
이 사회 구조의 취약성과 그 취약성을 만들어준 분들의 대담성과 혹은 무지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치유책이라고 만든 것이 참으로 근시안적이고 즉시적인 대안이라 과연 이분들은 무슨 생각들은 하시는지 이제는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다.
표 앞에서 이성을 잃어버리는 정서불안증 환자로 보인다. 사실 지금도 진행 중인 혹은 밝혀지지 않은 불편한 숨은 진실들은 얼마나 많을까.
나아가 금융자본주의는 또 어떤가, 좀 과하게 표현하면 현재 자본주의의 산실인 유럽은 휘청거리고 있고, 미국은 망연자실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는 금융자본주의의 위기이다, 그동안 숫한 금융이론 들, 경제 논리들은 과연 무슨 소용이 있었나. 얕은 꾀만을 개발하고 가르쳐온 것이 금융권의 지난 실적이 아니었던가.
금융과 실물이 서로 나뉘면서, 물물교환의 원시적 시장을 지나 현대사회의 이기물인 금융의 탄생은 이제 그 화려한 기법들에게 되려 공격을 받아 자본주의가 깊은 협곡(크레바스)에가 빠져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금융의 발달, 파생상품의 개발, 공매도, 선매도, 리츠…. 금융과 부동산의 첨단기법들은 이제 첨단의 역습을 자본시장에 가하고 있다. 마치 편리한 화석연료의 개발과 사용이 지구 환경을 파괴하듯이.
제조업과 농업과 육체적 근로를 기반으로 하는 어쩌면 정직한 노동을 기반으로 발전해온 자본주의가 이제 수단이 목적을 전도하는, 노동이 노동화하고, 기업이 기업화하고, 조직이 조직화하는, 그래서 본질이 변형되어 가는 듯하다.
구조 바꾸고 틀 다시 만들고 포맷해야
모든 것의 원인과 처방은 결국 구조적인 접근과 해법만이 답이다. 사회구조, 자본구조, 의식구조…. 구조를 바꾸고 틀을 다시 만들고 포맷을 다시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제자리 찾기를 해야 하다.
정치가를 위한 정치. 은행·자본가를 위한 은행, 국가를 위한 국민, 종교가를 위한 종교, 교육자를 위한 교육, 공직 종사자를 위한 행정, 언론기관을 위한 언론, 농협을 위한 농민 … . 정말 이렇게 가면 곤란하다.
수단이 목적을 넘어서면 곤란하다. 필요에 의해 결성된 조직과 구조가 토양과 토대를 위협하고 이용하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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