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번역가
1975년 4월 9일, 봄날 답지않은 험악한 날씨. 컴컴한 하늘에 흙바람이 몰아치는 일요일이었지만 입사 1~2년의 20대 신문기자 7명은 회사 앞에 이른 아침부터 모였다. 몇 달을 벼르던 야유회장소로 감시없이 떠들 수 있는 송도 해변을 정했다. 그런데 고참 한명이 두 시간이 넘게 나타나지 않았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대여서 마냥 기다리는데 혼비백산한 그가 나타났다. 사회부기자인 그는 인혁당 8명의 사형이 지난밤 갑자기 집행돼서 기사를 써야 하니 자기는 못 갈 것 같다고 말했다.
인혁당! 아니, 바로 어제 대법원 사형판결이 내려진 그 사람들 아닌가. 1974년 박정희유신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세력을 대대적으로 검거, '민청학련사건'을 엮은 뒤 이들의 배후조직이라며 1964년 이미 조작된 '인혁당'사건으로 형을 치르고 죄값(?)을 다한 이들을 다시 잡아다 모진 고문 끝에 사형에 처한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일사부재리의 원칙'같은 것조차 무시한, 선고 후 하루도 못돼 전원을 한꺼번에 처형한 '사법살인'으로 세계적 악명을 날린, 같은 죄명으로 같은 사람들을 두 번 죽인 악독한 사건이었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으로 우리는 송도로 갔지만 모래사장마저 회오리 바람이 몰아쳤고 마셔대는 소주잔에는 모래가 고였다. 울분을 토해도 눈물을 흘려도, 바다를 향해 소리쳐도 소위 '기자라는 것들'의 무력감과 죄책감을 씻어낼수는 없었다. 날씨도 마음도 장례 모드여서 전부 고주망태가 되어 귀가하는 걸로 끝났지만, 그 기억은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그렇다. 60년대 70년대를 젊은이로 살았던 사람들에게 '유신'은 대학캠퍼스를 짓밟은 탱크와 계엄령, 강제입대한 동기들, 숱하게 감옥과 법정에 끌려가거나 살해당한 많은 사람들의 아픈 기억으로 다가온다.
유신정권의 만행은 국민적 상처
비록 일면식도 없는 분들이지만 '인혁당'하면 고문의 흔적을 숨기려고 면회는 물론 시신조차 유족에게 주지 않았던, 외국인신부(시노트)가 운구차 밑에 들어가 저지투쟁을 하다 추방당한 악랄한 정권의 기억이 살아난다. 과음으로 쓰라린 속, 퉁퉁부은 두눈의 육체적 아픔으로 되살아온다.
2010년 한 통계에 따르면 1960년대에 시작된 미국이민 붐은 경제적 이유(65%) 반공법이나 인권무시등이 없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에 살고 싶은(22%), 유학(13%)을 원하는 사람들의 아메리칸 드림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들은 고급학력의 이민이 주류인 '엘리트 이민'이기도 했지만 '실망이민'으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1963년 대선에서 박정희대통령이 당선된 뒤, 70년대의 혹독한 긴급조치시대에 내 주변에서도 많이 이민을 갔다.
5·16이후 재벌의 성장과 함께 빈곤은 심화되고 많은 공장노동자들이 혹독한 저임금 속에서 고생을 하는 불안한 사회였다.
그리고 2012년. 유신찬가의 회귀 속에서 한국경제의 토대를 이룩했다며 군사정권예찬까지 나오는 판이지만 재벌의 성장과 부익부 빈익빈은 그 때보다 극에 달했다. 경제민주화 구호만 무성한 요즘 세태속에서 나는 당시의 그림자를 본다.
국민 다수는 입을 다물고 있지만 인터넷의 반응을 보면 '갑자기 군사정권의 악몽이 되살아난' 사람들도 많다는 게 드러난다.
2012년 지금은 실망이민도 가기 어렵다. 나의 친구나 형제들처럼 대학을 다니다 장학금으로 맨손유학을 가기도 어렵다. 미국의 사정도 각박해졌지만 무엇보다도 이민을 갈 기본 자금조차 마련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80년대 이후로는 역이민이 늘었으니 부유층이 살기좋은 나라가 한국임은 분명하다.
'인혁당 사법살인' 악몽 떠올라
하지만 희망잃은 저소득층 젊은이들과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내려앉은 숱한 사람들의 절망과 분노는 갈수록 커져간다.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의 '절망범죄'까지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개인의 범죄소양 탓으로 돌리는 듯한 '묻지마 범죄'대신 사회의 책임을 묻는 '절망범죄'란 용어를 쓰는 것은 옳지만, 최근엔 65세이상 고령층 소득불평등까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는 통계도 있다.
이런 판에 인혁당논란이 다시 나왔다. 당시에 매우 행복했던 '과거의 꿈'을 가진 대선후보도 나왔다. 당시보다 더 살기 힘든 양극화 속에서 불안한 초고령화 사회로 달리고 있는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할까. 포효하는 태풍 산바의 소리가 심상치않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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