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번역가
80년대 군부에 의한 언론통폐합과 무더기 기자해직 이후 한국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을 대신한 것은 출판계였다. 많은 해직기자들이 단순한 생계 대책으로서가 아니라 직업적 사명감으로 출판에 뛰어들었고 새로운 기획과 확실한 비전으로 출판문화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
비판적 목소리를 내거나 사회현상을 진단하는 수많은 양서들이 쏟아져 나오자 정부는 무자비한 탄압으로 출판계를 짓밟았다. 말도 안되는 이유로 수십명의 출판인이 구속되기도 했고 최고 700여권의 책들이 '금지도서'의 낙인이 찍혀 판매금지되고 파지로 변했다.
책을 내는 것 자체가 출판 '운동'인 시절이었고 '문제 출판사의 문제 도서'라도 어떻게든 신문지면에 실으려던 기자에게는 그건 작전이 필요한 '거사'였다. 하지만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출판인들은 탄압에 굽히지 않고 책들을 냈고 성명을 통한 목소리와 항의시위를 통해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일조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 당시 요즘처럼 청명한 가을의 어느날 '독서의 계절' 특집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났던 원로 교육학자 김인회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독서의 계절이 있는 것부터 한국은 좀 잘못되었다. 1년 내내 독서의 계절이어야 하고 책읽기와 책의 소중함을 아는 사회여야 하는데, 너무 책들을 안읽으니 독서의 계절 같은 것이 생긴 것이다."
그후 어린이 독서교육이나 학부모 주도의 독서운동 같은 것이 (주로 대입 논술덕에) 활성화되기는 했지만 출판계는 몇몇 대형회사를 제외하고는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형편이다.
어찌된 셈인지 외형상으로는 눈부시게 발전한 듯한 한국 출판계가 최근엔 1년에 책한권 못내는 영세출판사들이 90%가 넘는 지경에 이르렀다. 출판업계와 서적상업계가 치열하게 대결하던 시절은 옛말이 되었다.
30년 만에 거리시위 나선 출판계
동네 책방은 연일 망해 나가고 인터넷 서점등의 할인이 판치면서 도서정가제도 무너져 출판계와 서적상계가 동반 몰락을 겪고 있다. 마침내 80년대 민주화운동 시대후 처음으로 출판인들이 다시 서울 청계광장에 모여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7월에 300여명에 이어 9월 시위도 형식은 콘서트였지만 정부의 출판파탄정책과 새로 출범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원장 낙하산인사에 항의하는 집회였다.
1999년부터 14년간이나 출판산업 위기 타파를 위해서 출판계가 설립을 준비해왔던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정부가 출판계의 염원을 무시하고 출판계와 무관한 대통령의 모교 출신 인사를 원장으로 임명하면서 강력한 반발을 불렀다.
"MB가 챙긴 마지막 선심인사"로까지 지탄받는 이재호 원장의 임명을 철회하라는 출판인들의 강력한 요구는 묵살되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와 한국출판인회의등 대표단체들이 '출판문화살리기 비상대책회의'까지 구성하고 이 원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불황시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게 출판계, 경기회복시 가장 늦게 회복되는 것이 출판계'라는 속설처럼 출판계의 사정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출판산업진흥책을 연구하고 실질적 도움을 주려면 출판산업에 종사했거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필수인데 정부는 "안정적 인력확보나 국회, 행정부와의 교섭 등 행정편의적인 요소를 우선적으로 고려했다"며 맞서고 있다.
출판을 살려야 문화가 산다
하지만 선진국들도 법으로 철저히 보호하고 있는 도서정가제가 지난 2003년 도입후 얼마안되어 공정위가 '가격담합'이라며 할인과 경품 등을 승인, 최고 19%의 할인을 인정하게 되면서 사실상 허물어진 것부터가 출판문화에 대한 각 부처의 무지를 입증한다.
그 후 서적상계와 인터넷 서점의 출혈 할인 경쟁으로 중소서점은 사라졌고 출판계 역시 판매부진으로 극심한 어려움에 처해 사실상 휴업상태가 늘어나고 있다. 이럴 때 출판계 사정을 잘 알고 제도적 결함을 보완할 수 있는 전문인사를 임명해야 '진흥원'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진흥원조차 '자리'로만 인식하는 인사관행도 문제지만 해마다 줄어들어 이젠 국민1인당 10원꼴인 5억원에 불과한 정부의 출판지원금 등은 이른바 '국격'에도 맞지 않는 창피스러운 수준이 아닐 수 없다. 2012년을 '독서의 해'로 정한 정부가 문화의 원천인 출판산업을 포기할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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