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계의 거목 송건호 선생이 21일 오전 6시 서울 은평구 역촌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5살.
1953년 대한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딘 송건호 선생은 65년 경향신문 편집국장, 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75년 동아일보 기자 150여명이 강제 해직되자 송건호 선생은 편집국장직을 사퇴하고, 이후 재야 민주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이후 송건호 선생은 87년 국민주 신문인 한겨레의 창간을 주도하고, 이듬해 초대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송건호 선생은 80년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류 협의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당한 고문 휴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아왔으며 97년 이후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오랜 기간 투병생활을 해왔다.
고 송건호 선생은 한국현대사 분야에서도 학자로도 큰 족적을 남겼다. 송건호 선생의 현대사 관련 저서로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 한국현대사론=""> <서재필과 이승만=""> <의열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한국현대사> <김구> <민족통일을 위하여=""> <한국현대언론사> 등이 있다. 또 송건호 선생은 그동안 금관문화훈장, 한국언론학회언론상, 호암언론상, 심산상, 정일형 자유민주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부는 이같은 공적을 기려 21일 고 송건호 선생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부인 이정순 씨에게 전화를 걸어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정순(71)씨와 준용(41·㈜와이에스파터너스 컨설턴트), 제용(36·조선일보사 광고국 근무)씨 등 2남4녀가 있다. 고 송건호 선생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24일 광주 5·18묘역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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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대한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딘 송건호 선생은 65년 경향신문 편집국장, 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75년 동아일보 기자 150여명이 강제 해직되자 송건호 선생은 편집국장직을 사퇴하고, 이후 재야 민주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이후 송건호 선생은 87년 국민주 신문인 한겨레의 창간을 주도하고, 이듬해 초대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송건호 선생은 80년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류 협의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당한 고문 휴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아왔으며 97년 이후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오랜 기간 투병생활을 해왔다.
고 송건호 선생은 한국현대사 분야에서도 학자로도 큰 족적을 남겼다. 송건호 선생의 현대사 관련 저서로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 한국현대사론=""> <서재필과 이승만=""> <의열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한국현대사> <김구> <민족통일을 위하여=""> <한국현대언론사> 등이 있다. 또 송건호 선생은 그동안 금관문화훈장, 한국언론학회언론상, 호암언론상, 심산상, 정일형 자유민주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부는 이같은 공적을 기려 21일 고 송건호 선생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부인 이정순 씨에게 전화를 걸어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정순(71)씨와 준용(41·㈜와이에스파터너스 컨설턴트), 제용(36·조선일보사 광고국 근무)씨 등 2남4녀가 있다. 고 송건호 선생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24일 광주 5·18묘역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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