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간행물윤리위원장
지난 연말 지인 두 명이 송구영신 선물을 보내왔다. 글을 쓰고 좋아하는 이들답게 한 명은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다른 한 명은 유명 서예가가 공들여 쓴 동양의 경구를 인쇄해 부쳐왔다. 스마트폰 시대, 또 복사의 시대에 대량 유포하는 인사말이긴 하나 그 속뜻이 음미할만해 마음에 들었다.
스마트폰으로 전해진 문자메시지는 이렇다. "고생 많았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메시지를 보낸 이는 지난해 대선후보 캠프에서 일했고 패배했다. 문자는 그가 만든 게 아니고 어느 진보학자가 위로하며 보낸 것으로 '여운'이 남아 내게 '전달'한다고 했다.
참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20년을 감옥서 살고나온 신영복 선생 글이었다. '처음처럼'이란 시화집에 있는 말로, 먼저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더니 이어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을 읊조리고 있었다.
국민 기대 불구 오만이 패배 자초
뜻을 굳이 풀이할 필요는 없겠다. 그저 가슴으로 읽으면 될 일이다. 선거에서 지고 회한에 싸여있을 동지에게 보내는 위로일 수 있겠고 언제나 새로움으로 마음을 닦아 새날을 맞으라는, 그리고 어떤 두려움과 곤궁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당부일 수도 있을 터이다.
전화메시지와 달리 경구는 사실 더 유명하다. 맹자의 고자장 (告子章)에 나온 글이다. 어려운 한자지만 한글로 풀어쓰면 이렇다. "하늘이 장차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면 먼저, 그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고, 육체를 고달프게 하며, 배를 곯게 하고, 하는 일을 어지럽게 하는 등 온갖 시련을 준다.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마음을 움직여 인내심을 키우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다."
이 문장은 고통과 실의에 빠진 사람에겐 하도 절절해 수많은 이들이 외우거나, 써 갖고 다니거나, 아니면 머리맡에 붙여놓기까지 한 경구이다. 조선조 귀양 간 선비들이 그러했고 날선 정치판에 몸담은 이들, 가령 모택동 시대의 등소평 같은 이가 항상 끼고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메시지건 또 경구건 심한 고통에 빠진 사람에게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뜻인데 정치칼럼이나 쓰는 내게 이걸 보낼 이유가 뭐란 말인가. 총선 대선을 치른 2012년 글쟁이에게 무슨 시련이 있었다고 참고 희망을 가지라는 위로를 건넨단 말인가.
나는 그걸 이렇게 해석했다. 정치현상을 분석하고 쓰는 이들은 대개 새 정치에의 희망과 변화, 진보를 갈구한다. 그런데 지난해 두 차례 선거에서 새 정치를 모토로 걸고 자기들만이 새 정치를 구현할 적임자라고 외치던 세력은 패배했다. 국민의 60%이상이 정권을 교체해야 하고 새로운 정치 기풍을 보여야한다고 강력 요구했음에도 그들의 오만이 패배를 자초한 것이다.
지인들은 이런 현실에 "마음 아파하지 말라"며 글 선물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 생각했다. 국민을 보지 않는 오만한 세력, 제 잘못엔 눈감고 남 잘못만을 봉대하는 사람들에게서 워낙 큰 실망을 겪었기 때문이다. 누가 되든 국민 목소리에 겸허하고 소통하며 이해를 구한다면 정치는 하루하루 면모를 일신해나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빈자 고통
그런데…그런데 말이다.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당선인의 인사가 하나씩 뚜껑을 열면서 "이게 아닌데…"하는 사건이 줄을 잇고 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하는 의문이 줄을 잇지만 그걸 풀어야 할 당선인과 국민의 소통 통로는 말 그대로 '밀봉'돼 있는 것 같다.
그것만 해도 암울한데 또 한 인사는 "패자를 찍은 48%보다 당선인에게 표를 준 51.6%를 대변하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선거 후 벌써 5명이 자살했다. 경제회복 기대도 난망이고 빈자들의 고통 또한 쉽사리 해소될 것 같지도 않다. 이런 상황에서 승자들이 외던 '100% 대한민국'이 한낱 선거구호일 뿐이었다면 어떻게 '수많은 처음과 끊임없는 시작'이 만들어지길 기대하겠는가. 새해 역시 곤고(困苦)할 것이라고 보며 좌절하는 이들을 위무할 말은 정녕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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