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한국 보도지침 사건과 유사 … '남방주말' 이어 '신경보' 거부 파문
중국 주간지 남방주말(南方周末) 파업 사태 와중에 베이징에서 발행되는 비판적인 신문 신경보(新京報)가 선전 당국으로부터 부당한 압력을 받아 기자들이 저항에 나서면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1986년 한국 언론인들이 전두환 정부의 보도통제 가이드라인을 폭로하고 이를 거부한 '보도지침 사건'과 유사한 양상이 전개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전두환 정권 '보도지침 사건'과 닮아 =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徽博)에 폭로된 내용에 따르면 베이징시 당 선전부 렁옌(冷言) 부부장이 8일 신경보를 찾아가 남방주말 사태와 관련해 당국을 두둔하는 관영 환구시보(環球時報)의 사설을 전재하라고 요구하며, 이에 불응할 경우 정간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신경보 내부에서 투표를 통해 문제의 사설을 게재하지 않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으며 다이쯔겅(戴自更) 사장은 항의 표시로 사직 의사를 밝혔다.
신경보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광명일보와 남방주말의 본지 남방일보가 합작해 지난 2003년 베이징을 중심으로 창간한 신문으로 대중에 인기가 높다.
이 신문은 2011년 7월 원저우(溫州) 고속철 추돌 사고가 발생했을 때 당국의 보도지침을 무시하고 특집 기사와 비판성 칼럼을 게재하며 저항하기도 했다.
특히 2005년 12월에는 편집국장 직위 해제에 맞서 기자들이 초유의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중국 당국은 원저우 고속철 사고 이후 눈밖에 난 신경보를 광명일보와 남방일보로부터 빼앗아 베이징시 공산당 위원회로 넘긴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중앙지에서 지방지로 격하시킨 것이다. 지방신문은 중앙신문에 비해 취재와 보도 범위가 제한되고 통제도 강화된다.
중국 당국은 언론을 당의 선전 도구로 여기고 강력히 통제하고 있다. 선전 당국은 언론을 당이 철저히 관리·통제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에서 1980년대 정권안보를 위해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매일 각 언론사에 시달했던 보도 통제와 같은 방식이다. 당시 정부는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 사태의 보도여부는 물론 보도방향과 보도의 내용 및 형식까지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지시를 내렸다.
◆정권 안보 위해 언론 관리·통제 = 이번에도 공산당 중앙선전부는 남방주말 사태와 관련해 최근 각 언론매체들에 내려 보낸 문건에서 언론의 관리·통제 원칙은 확고부동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부는 당 간부들과 언론 담당 관리들에게 보낸 메모에서 "중국 매체는 당이 절대적으로 통제한다"면서 "이 기본 원칙은 확고부동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각 신문에 이번 일과 관련해 관영 환구시보가 게재한 사설을 실으라고 요구했다. 환구시보는 사설에서 이번 일이 당국과는 상관없다고 강조하면서 "중국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고려할 때 이런 사람들이 요구하는 자유 언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베이징시 공산당위원회 선전부 렁옌 부부장은 경화시보(京華時報)를 비롯한 다른 신문들이 모두 당국의 지침대로 8일자에서 언론 자유를 부정하는 7일자 환구시보 사설을 게재한 것처럼 신경보도 9일자에서는 반드시 이 사설을 전재할 것을 요구했다. 렁 부부장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9일자 신문이 발행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신경보를 폐간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신경보에서는 8일 밤늦게까지 다이쯔겅 사장을 비롯한 신경보 관계자들과 베이징시 공산당위원회 선전부 렁 부부장 사이에 대치가 계속됐다. 다이 사장은 렁 부부장에게 "나는 여기서 당신에게 사의를 밝힌다"고 말하면서 지시를 끝까지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신경보 기자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편집국에 모여 있는 기자들의 사진을 올리고 "다이 사장이 물러나겠다는 말에 여직원들이 모두 한바탕 울음을 터뜨렸다"고 전했다. 다른 기자는 "대부분의 기자들은 모두 자기만의 이상이 있을 것"이라며 "미얀마도 이제 검열을 폐지하겠다는데 중국에서 여전히 이런 코미디극이 계속되어야 하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중국 언론인들이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당국의 '보도 지침'에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활동 폭을 넓히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언론인과 시민 보도지침에 도전 = 한국은 1986년 당국의 보도지침 폭로 이후 관련자가 국가보안법 위반 및 국가모독죄로 구속되었으며, 재야단체의 저항과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했다. 보도지침 사건은 1년 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파업 사태로 주목받은 남방주말의 해결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9일 중화권 언론 등에 따르면 지난 6일 언론 검열에 항의해 파업에 들어간 남방주말 편집 기자들은 광둥(廣東)성 당 위원회와 협상 끝에 이번 주(10일자) 신문을 정상 발행하기로 합의했다.
광둥성 선전부는 남방주말에 대해 관행적인 사전 검열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고 남방주말 쪽에서는 총편집인이 사퇴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신들은 사태 해결의 돌파구가 마련된 데 대해 정치적 압박을 받아온 후춘화(胡春華) 광둥성 서기가 직접 개입한 결과라고 전했다.
대만 중국시보는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남방주말 기자들의 큰 승리이며 중국 내 신문자유의 새 이정표를 마련하게 된다고 평가했다.
전두환정부 정권안보용 보도지침 하달
가(可), 불가(不可), 절대불가 지시 … 1986년 폭로, 6월 항쟁 도화선
전두환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문화공보부에서 각 언론사에 보도통제 가이드라인인 '보도지침'을 하달했다.
보도지침(홍보조정지침)은 정권안보를 위해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매일 각 언론사에 은밀하게 시달했던 것으로 뉴스의 비중이나 보도 가치에 관계없이 사건이나 상황, 사태의 보도여부는 물론 보도방향과 보도의 내용 및 형식까지 구체적으로 결정해 '가(可), 불가(不可), 절대불가'의 지시를 내렸다.
어떤 기사를 어떤 내용으로 어느 면 어느 위치에 몇 단으로 싣고 제목도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하며 사진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또는 사용해야 하고 당국의 분석 자료를 어떻게 처리하라는 등 세부사항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심지어 방송의 경우 9시 뉴스를 정무수석실과 홍보조정실로 보내 크기와 배열을 사전 심의 받는 형식을 취하기도 했다. 이는 86년 9월 당시 한 월간지를 통해 보도되면서 알려졌다.
정부는 보도지침을 폭로한 언론인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및 국가모독죄로 구속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화추진협의회 등 재야단체의 비난성명이 잇따랐고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미국언론인보호위원회, 미국·캐나다 신문협회 등도 석방요구서한을 보냈다.
결국 기소된 언론인 3명은 87년 6월 3일 집행유예로 모두 풀려났고 8년여가 흐른 1994년 7월 5일에야 서울형사지법에서 당사자 3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보도지침 사건은 이듬해인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으며 6월 항쟁 이후 공식적으로는 사라졌다.
김기수 기자 ks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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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주간지 남방주말(南方周末) 파업 사태 와중에 베이징에서 발행되는 비판적인 신문 신경보(新京報)가 선전 당국으로부터 부당한 압력을 받아 기자들이 저항에 나서면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1986년 한국 언론인들이 전두환 정부의 보도통제 가이드라인을 폭로하고 이를 거부한 '보도지침 사건'과 유사한 양상이 전개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전두환 정권 '보도지침 사건'과 닮아 =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徽博)에 폭로된 내용에 따르면 베이징시 당 선전부 렁옌(冷言) 부부장이 8일 신경보를 찾아가 남방주말 사태와 관련해 당국을 두둔하는 관영 환구시보(環球時報)의 사설을 전재하라고 요구하며, 이에 불응할 경우 정간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신경보 내부에서 투표를 통해 문제의 사설을 게재하지 않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으며 다이쯔겅(戴自更) 사장은 항의 표시로 사직 의사를 밝혔다.
신경보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광명일보와 남방주말의 본지 남방일보가 합작해 지난 2003년 베이징을 중심으로 창간한 신문으로 대중에 인기가 높다.
이 신문은 2011년 7월 원저우(溫州) 고속철 추돌 사고가 발생했을 때 당국의 보도지침을 무시하고 특집 기사와 비판성 칼럼을 게재하며 저항하기도 했다.
특히 2005년 12월에는 편집국장 직위 해제에 맞서 기자들이 초유의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중국 당국은 원저우 고속철 사고 이후 눈밖에 난 신경보를 광명일보와 남방일보로부터 빼앗아 베이징시 공산당 위원회로 넘긴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중앙지에서 지방지로 격하시킨 것이다. 지방신문은 중앙신문에 비해 취재와 보도 범위가 제한되고 통제도 강화된다.
중국 당국은 언론을 당의 선전 도구로 여기고 강력히 통제하고 있다. 선전 당국은 언론을 당이 철저히 관리·통제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에서 1980년대 정권안보를 위해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매일 각 언론사에 시달했던 보도 통제와 같은 방식이다. 당시 정부는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 사태의 보도여부는 물론 보도방향과 보도의 내용 및 형식까지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지시를 내렸다.
◆정권 안보 위해 언론 관리·통제 = 이번에도 공산당 중앙선전부는 남방주말 사태와 관련해 최근 각 언론매체들에 내려 보낸 문건에서 언론의 관리·통제 원칙은 확고부동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부는 당 간부들과 언론 담당 관리들에게 보낸 메모에서 "중국 매체는 당이 절대적으로 통제한다"면서 "이 기본 원칙은 확고부동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각 신문에 이번 일과 관련해 관영 환구시보가 게재한 사설을 실으라고 요구했다. 환구시보는 사설에서 이번 일이 당국과는 상관없다고 강조하면서 "중국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고려할 때 이런 사람들이 요구하는 자유 언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베이징시 공산당위원회 선전부 렁옌 부부장은 경화시보(京華時報)를 비롯한 다른 신문들이 모두 당국의 지침대로 8일자에서 언론 자유를 부정하는 7일자 환구시보 사설을 게재한 것처럼 신경보도 9일자에서는 반드시 이 사설을 전재할 것을 요구했다. 렁 부부장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9일자 신문이 발행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신경보를 폐간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신경보에서는 8일 밤늦게까지 다이쯔겅 사장을 비롯한 신경보 관계자들과 베이징시 공산당위원회 선전부 렁 부부장 사이에 대치가 계속됐다. 다이 사장은 렁 부부장에게 "나는 여기서 당신에게 사의를 밝힌다"고 말하면서 지시를 끝까지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신경보 기자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편집국에 모여 있는 기자들의 사진을 올리고 "다이 사장이 물러나겠다는 말에 여직원들이 모두 한바탕 울음을 터뜨렸다"고 전했다. 다른 기자는 "대부분의 기자들은 모두 자기만의 이상이 있을 것"이라며 "미얀마도 이제 검열을 폐지하겠다는데 중국에서 여전히 이런 코미디극이 계속되어야 하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중국 언론인들이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당국의 '보도 지침'에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활동 폭을 넓히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언론인과 시민 보도지침에 도전 = 한국은 1986년 당국의 보도지침 폭로 이후 관련자가 국가보안법 위반 및 국가모독죄로 구속되었으며, 재야단체의 저항과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했다. 보도지침 사건은 1년 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파업 사태로 주목받은 남방주말의 해결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9일 중화권 언론 등에 따르면 지난 6일 언론 검열에 항의해 파업에 들어간 남방주말 편집 기자들은 광둥(廣東)성 당 위원회와 협상 끝에 이번 주(10일자) 신문을 정상 발행하기로 합의했다.
광둥성 선전부는 남방주말에 대해 관행적인 사전 검열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고 남방주말 쪽에서는 총편집인이 사퇴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신들은 사태 해결의 돌파구가 마련된 데 대해 정치적 압박을 받아온 후춘화(胡春華) 광둥성 서기가 직접 개입한 결과라고 전했다.
대만 중국시보는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남방주말 기자들의 큰 승리이며 중국 내 신문자유의 새 이정표를 마련하게 된다고 평가했다.
전두환정부 정권안보용 보도지침 하달
가(可), 불가(不可), 절대불가 지시 … 1986년 폭로, 6월 항쟁 도화선
전두환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문화공보부에서 각 언론사에 보도통제 가이드라인인 '보도지침'을 하달했다.
보도지침(홍보조정지침)은 정권안보를 위해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매일 각 언론사에 은밀하게 시달했던 것으로 뉴스의 비중이나 보도 가치에 관계없이 사건이나 상황, 사태의 보도여부는 물론 보도방향과 보도의 내용 및 형식까지 구체적으로 결정해 '가(可), 불가(不可), 절대불가'의 지시를 내렸다.
어떤 기사를 어떤 내용으로 어느 면 어느 위치에 몇 단으로 싣고 제목도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하며 사진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또는 사용해야 하고 당국의 분석 자료를 어떻게 처리하라는 등 세부사항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심지어 방송의 경우 9시 뉴스를 정무수석실과 홍보조정실로 보내 크기와 배열을 사전 심의 받는 형식을 취하기도 했다. 이는 86년 9월 당시 한 월간지를 통해 보도되면서 알려졌다.
정부는 보도지침을 폭로한 언론인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및 국가모독죄로 구속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화추진협의회 등 재야단체의 비난성명이 잇따랐고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미국언론인보호위원회, 미국·캐나다 신문협회 등도 석방요구서한을 보냈다.
결국 기소된 언론인 3명은 87년 6월 3일 집행유예로 모두 풀려났고 8년여가 흐른 1994년 7월 5일에야 서울형사지법에서 당사자 3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보도지침 사건은 이듬해인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으며 6월 항쟁 이후 공식적으로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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