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 ‘가장 위험한 책’] 사람은 자기가 읽고 싶은 대로 읽는다

지역내일 2013-02-22 (수정 2013-02-22 오후 2:04:14)
차미례 칼럼니스트

문화의 힘과 대중에 대한 위력적 파급효과에 대해 이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대중의 문화해독력 여부와 그 수준은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정치인들조차 문화를 구호나 공약으로 들고 나올 정도이지만 기실 그들 중에도 문화맹(文化盲)들이 많다. 나중에 정책을 입안하거나 실행할 때 그 수준이 드러난다.

10년전 쯤에 나는 출판인 단체의 한 공식세미나에서 발제를 맡아 "대중(독자)의 문화해독력을 파악하고 또 일찍부터 배양하는 일을 출판계의 기반사업으로 진행하지 않으면 반세기쯤 뒤에는 활자책 문화의 미래가 없다"는 요지의 주제발표를 한적 있다. 어민들조차도 심해에 물고기아파트 어초(魚礁)를 수없이 투입해서 20년을 내다보며 해초와 어류의 양생을 돕는데, 출판계는 손 놓고 있는 게 안타까웠다. 미국의 경우 출판계와 교육계가 협력해서 수십년 전부터 '몇 살(몇 학년)짜리가 알아야할 것들'시리즈를 부독본으로 발간하고 있는 예도 들었다. 그런데 저녁식사때 한 중진 출판인이 "오늘 출판유통에 대한 발제, 참 좋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는 나의 강연을 아예 듣지도 않았거나, 대충 책파는 유통문제로 잘못 들은 것이다.

이처럼 지식인들조차도 자신이 보려는 것만 보고 듣는 '터널비전' 시각은 심각하다. 하물며 비틀린 역사관의 정치인은 자국의 역사와 사회를 왜곡, 변질시키기도 한다. 한국도 지금 그렇다. 그런데 독일은 더 심했다.

이 책은 "로마제국부터 나치 독일까지 '게르마니아' 오독의 역사"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어떻게 해서 로마의 역사학자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가 서기 98년에 쓴 한 권의 책이 1800년 뒤에 600만명을 죽이게 되었는가를 설명해준다.

하나의 라틴어 고전 '게르마니아'가 저자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가장 위험한 책으로 변질해 가는 과정을 마치 탐정소설처럼 추적한 책이다.

◆위험한 건 텍스트가 아니라 오독(誤讀) = 하버드대학의 고전학 교수인 저자 크레브스는 세계 각지에서 몇백년에 걸쳐 출간된 '게르마니아'에 관련된 방대한 문헌 자료를 찾아 내고 라틴어, 독일어, 히브리어 등 자신의 해박한 언어학 실력을 집약시켜 이 책을 썼다.

책 한 권의 텍스트가 현실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의 생명까지 뒤흔들어 놓는 사례는 많다. 원초적(?) 사례로는 서구사상의 형성의 근간이면서 심각한 오독과 왜곡으로 숱한 갈등을 불러일으켜 온 '성경'이 있다. 20세기 냉전시대를 연 '공산당선언', 미국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된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이슬람교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저자, 출판사, 번역가, 신문사가 테러를 당해 50여명의 사망자를 낸 '악마의 시'도 그렇다.

'게르마니아'도 역사학계에서 인류역사상 가장 위험한 책들 중 상위권으로 꼽힌다. 분열된 독일 민족에게 민족의 뿌리를 숭상하는 국수주의 운동, 인종차별주의, 독일 민족지상주의, 게르만 신화의 구현 등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열혈 나치당원들이 "의식있는 모든 독일인들의 바이블"로 추천한 '게르마니아'는 독일 혈통의 순수성과 우수성을 증언하고 나치를 지지하는 수단으로 조작되었다. 이민족과의 결혼을 금했다는 '게르마니아'를 근거로 유대인과의 결혼을 금하는 '독일인 혈통 및 명예수호법'이 제정되었다.

또한 독일 청년들을 게르만 전사로 육성하고 다른 인종을 증오하도록 교육하는 각종 교재와 독서물에도 인용되었다.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의 제목을 '게르만 혁명'으로 붙일 생각을 했고 '게르마니아'란 이름의 수도를 가진 미래의 게르만 국가를 구상했을 정도였다.

원래 '게르마니아'는 타키투스가 게르만족에 대해 쓴 보고서는 아니었다. 그는 라인강 근처에도 가본적이 없었을 것이다.

게르마니아 사본 제목인 '게르만민족의 기원과 관습에 대하여'도 독일의 민족성을 정의 했다기보다는 로마의 정세를 염두에 둔 채 북부의 현실을 언급한 것이다. 타키투스는 여행자들의 보고와 자료를 모아 게르마니아 지역에 사는 이민족들의 기원과 관습을 추측해서 기록했을 뿐이다.

그가 묘사한 게르만족은 충성스럽고 강인한 신체를 가졌지만 문화나 교양이 없는 원시인에 가까웠다. 결국 이 책은 로마인이 쓴 인간의 미덕에 대한 상상의 소산이며 정치적 발언이었다고 저자 크레브스는 이 책의 서문 '불길한 과거'에서 밝히고 있다.

로마제국과 함께 사라진 이 책의 양피지 필사본이 15세기 로마에서 재발견 되면서 유럽 지식인과 권력자들은 이를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을 써서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전파했고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는 타키투스의 묘사에서 영감을 얻어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란 연설문을 발표했다. 독일 작곡가 바그너는 '게르마니아'를 근거로 '인종불평등론'을 쓴 프랑스의 고비노와 교류하며 국가사회주의 문화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결국 500년간이나 '게르마니아'는 재해석되고 오독되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인용 또는 조작되었다. 나중엔 원고자체까지 신성시되어 학자, 귀족, 심지어 교황까지 이를 구하거나 훔치려들었다.

20세기 나치독일에 이르러 이를 홀로코스트의 사상적 근거로 삼은 히믈러의 나치부대는 불과 30쪽도 안되는 이 문서를 찾아 오랜 고문서 수장가문인 이탈리아의 발데스키-발레아니 가문의 유서깊은 저택을 샅샅이 수색할 정도였다.

◆나치독일 바이블 된 '게르마니아' = 게르만족을 언급한 유일한 고대 문서라는 점에서 게르마니아를 "위대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교과서에 써넣을 정도로 문화적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저자인 크레브스 교수는 "사상은 바이러스와 비슷하다. 인간정신을 숙주로 하여 변형과 복제를 반복하다가 한데 모이면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집단에서 집단으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파되어 나간다"고 말한다.

이같은 해악의 텍스트가 나타나는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검사해서 이 책 같은 '지식의 전염병학'을 쓰는 것은 왜곡된 현대사의 기록을 가진 한국사회에서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민음인 / 크리스토퍼 B. 크레브스 지음 / 이시은 옮김 / 1만7000원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닫기
(주)내일엘엠씨(이하 '회사'라 함)은 개인정보보호법을 준수하고 있으며, 지역내일 미디어 사이트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개인정보 수집∙이용(제공)에 대한 귀하의 동의를 받고자 합니다. 내용을 자세히 읽으신 후 동의 여부를 결정하여 주십시오. [관련법령 개인정보보호법 제15조, 제17조, 제22조, 제23조, 제24조] 회사는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중요시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인정보보호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개인정보처리방침을 통하여 회사가 이용자로부터 제공받은 개인정보를 어떠한 용도와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어떠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알려드립니다.


1) 수집 방법
지역내일 미디어 기사제보

2) 수집하는 개인정보의 이용 목적
기사 제보 확인 및 운영

3) 수집 항목
필수 : 이름, 이메일 / 제보내용
선택 : 휴대폰
※인터넷 서비스 이용과정에서 아래 개인정보 항목이 자동으로 생성되어 수집될 수 있습니다. (IP 주소, 쿠키, MAC 주소, 서비스 이용 기록, 방문 기록, 불량 이용 기록 등)

4) 보유 및 이용기간
① 회사는 정보주체에게 동의 받은 개인정보 보유기간이 경과하거나 개인정보의 처리 목적이 달성된 경우 지체 없이 개인정보를 복구·재생 할 수 없도록 파기합니다. 다만, 다른 법률에 따라 개인정보를 보존하여야 하는 경우에는 해당 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존합니다.
② 처리목적에 따른 개인정보의 보유기간은 다음과 같습니다.
- 문의 등록일로부터 3개월

※ 관계 법령
이용자의 인터넷 로그 등 로그 기록 / 이용자의 접속자 추적 자료 : 3개월 (통신비밀보호법)

5) 수집 거부의 권리
귀하는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동의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다만, 수집 거부 시 문의하기 기능이 제한됩니다.
이름*
휴대폰
이메일*
제목*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