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진 전 서울신문 편집국장
1950년 6월 28일 갓 30줄에 들어선 박갑동은 서울 소공동 정판사 부근 은신처에서 나와 중앙청으로 향했다. 남로당 총책 김삼룡과 고문 이주하가 3월 말 체포되면서 청년 박갑동은 남로당 간부 가운데 최고위 간부였다. 박은 남침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 지휘관을 만나고자 했다. 남로당을 대표해서.
멋지게 악수를 나누고 서울을 '해방'시킨 인민군의 노고에 격려를 아끼지 않겠다는 박의 생각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중앙청을 점령한 인민군 연대장은 남로당 대표를 한참 기다리게 하더니 칫솔을 입에 물고 나타났다.
'국군 놈들이 어찌 빨리 도망가는지 쫓아오느라 군화도 못 벗고 양치질도 못했수다'라고 칫솔 물고 나타난 비례를 변명하더니 바로 박을 추궁했다. '동무, 왜 이제 나타났소. 인민군이 여기까지 오는데 환영 인파를 왜 조직하지 않았소. 대체 뭣들 하고 있었소. 후방에서 봉기를 조직해야 하는 것 아니오'라고. 박이 이에 대해 '공격이 시작된 줄 몰랐소. 미리 알려줬어야 하는 것 아니오'라고 말하자 연대장이 '동무, 해방일보에 가서 논설위원이나 하시오'라고 말하고는 휙 돌아서더라는 것이다.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박갑동은 박헌영 등 남로당 세력 숙청 때 북한을 탈출해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보냈다. 이 이야기는 1990년대 중반 박갑동씨로부터 들은 내용이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지난 5월 12일 이른바 RO(지하혁명조직) 모임에서 발언한 녹취록 전문을 읽으면서 박씨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녹취록에 따르면 후방봉기 내지는 전시 후방테러에 대한 집착이 닮은 꼴인데 이 의원은 마치 6·25 때 남로당의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듯이 조직원들의 사상무장과 정치 군사적 준비태세를 강조했다.
서로 비판하는 손가락질부터 거둬야
여론과 법은 그와 그의 조직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 결과는 심판정에 맡기자.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사건의 와중에 등장한 책임론이다. 새누리당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등이 국회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정부가 이석기를 사면했고, 지난해 19대 총선에서는 민주당이 통합진보당과 연대함으로써 통합진보당이 다수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배출하도록 도와주었다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통합진보당이 그런 줄 몰랐다' '연대를 했지만 이석기 등이 지역구가 아니라 비례대표로 진출한 것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도와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정도 말로는 해명이 되지 않는다. 주사파의 정체는 2006년 민노당 일심회 사건(NL 계열의 당 간부들이 국내 정보를 북한에 보고한 것이 드러나 PD계열인 심상정 노회찬 등이 탈당한 사건) 때 충분히 알려졌다. 새누리당의 정치 공세는 불쾌하더라도 민주당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
그렇다면 새누리당 등 보수 세력은 책임이 없는가? 적어도 원인(遠因)은 제공했다. 주사파가 운동권에 등장한 것이 1980년대 중반이다. 요지부동의 독재, 노동 계층과 빈민에 대한 탄압, 광주에서의 시민 학살 등 폭압적 상황이 지속되면서 기존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무력감이 확산되었고 북쪽에서 대안을 찾는 종북 세력이 탄생했던 것이다. 이들이 헤게모니 다툼을 거듭하면서 오늘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대한민국의 이단아'들이 자라난 것이다.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서로를 비난하는 손가락질을 거두어야 한다. 이석기 사태는 가깝든 멀든 정치 시스템이 실패한 결과물이다. 몇몇을 꺾더라도 이단은 상당 기간 존재할 것이다.
청년층에 희망의 메시지 스며들어야
우리가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한 이단을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줄여나갈 수밖에 없다. 이단을 줄이는 근본 대책은 정치가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능감을 주는 것이다. 곰팡이가 피지 않게 하려면 곰팡이를 닦아내는 한편 빛을 쪼이고 습기를 제거해야 한다.
국정원 개혁, 경제 민주화, 복지 공약 실천 등 당면 과제를 발빠르게 풀어나가야 한다. 국민 특히 청년층에 희망의 메시지가 스며들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야간 대화와 소통이 긴요하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그토록 영수회담을 하자는 야당 대표의 손길을 뿌리친 채 4일 해외순방을 떠났다. 소통의 물꼬를 막아놓은 채 비행기에 오르는 박 대통령의 뒷모습이 답답해 보인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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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8일 갓 30줄에 들어선 박갑동은 서울 소공동 정판사 부근 은신처에서 나와 중앙청으로 향했다. 남로당 총책 김삼룡과 고문 이주하가 3월 말 체포되면서 청년 박갑동은 남로당 간부 가운데 최고위 간부였다. 박은 남침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 지휘관을 만나고자 했다. 남로당을 대표해서.
멋지게 악수를 나누고 서울을 '해방'시킨 인민군의 노고에 격려를 아끼지 않겠다는 박의 생각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중앙청을 점령한 인민군 연대장은 남로당 대표를 한참 기다리게 하더니 칫솔을 입에 물고 나타났다.
'국군 놈들이 어찌 빨리 도망가는지 쫓아오느라 군화도 못 벗고 양치질도 못했수다'라고 칫솔 물고 나타난 비례를 변명하더니 바로 박을 추궁했다. '동무, 왜 이제 나타났소. 인민군이 여기까지 오는데 환영 인파를 왜 조직하지 않았소. 대체 뭣들 하고 있었소. 후방에서 봉기를 조직해야 하는 것 아니오'라고. 박이 이에 대해 '공격이 시작된 줄 몰랐소. 미리 알려줬어야 하는 것 아니오'라고 말하자 연대장이 '동무, 해방일보에 가서 논설위원이나 하시오'라고 말하고는 휙 돌아서더라는 것이다.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박갑동은 박헌영 등 남로당 세력 숙청 때 북한을 탈출해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보냈다. 이 이야기는 1990년대 중반 박갑동씨로부터 들은 내용이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지난 5월 12일 이른바 RO(지하혁명조직) 모임에서 발언한 녹취록 전문을 읽으면서 박씨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녹취록에 따르면 후방봉기 내지는 전시 후방테러에 대한 집착이 닮은 꼴인데 이 의원은 마치 6·25 때 남로당의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듯이 조직원들의 사상무장과 정치 군사적 준비태세를 강조했다.
서로 비판하는 손가락질부터 거둬야
여론과 법은 그와 그의 조직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 결과는 심판정에 맡기자.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사건의 와중에 등장한 책임론이다. 새누리당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등이 국회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정부가 이석기를 사면했고, 지난해 19대 총선에서는 민주당이 통합진보당과 연대함으로써 통합진보당이 다수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배출하도록 도와주었다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통합진보당이 그런 줄 몰랐다' '연대를 했지만 이석기 등이 지역구가 아니라 비례대표로 진출한 것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도와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정도 말로는 해명이 되지 않는다. 주사파의 정체는 2006년 민노당 일심회 사건(NL 계열의 당 간부들이 국내 정보를 북한에 보고한 것이 드러나 PD계열인 심상정 노회찬 등이 탈당한 사건) 때 충분히 알려졌다. 새누리당의 정치 공세는 불쾌하더라도 민주당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
그렇다면 새누리당 등 보수 세력은 책임이 없는가? 적어도 원인(遠因)은 제공했다. 주사파가 운동권에 등장한 것이 1980년대 중반이다. 요지부동의 독재, 노동 계층과 빈민에 대한 탄압, 광주에서의 시민 학살 등 폭압적 상황이 지속되면서 기존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무력감이 확산되었고 북쪽에서 대안을 찾는 종북 세력이 탄생했던 것이다. 이들이 헤게모니 다툼을 거듭하면서 오늘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대한민국의 이단아'들이 자라난 것이다.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서로를 비난하는 손가락질을 거두어야 한다. 이석기 사태는 가깝든 멀든 정치 시스템이 실패한 결과물이다. 몇몇을 꺾더라도 이단은 상당 기간 존재할 것이다.
청년층에 희망의 메시지 스며들어야
우리가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한 이단을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줄여나갈 수밖에 없다. 이단을 줄이는 근본 대책은 정치가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능감을 주는 것이다. 곰팡이가 피지 않게 하려면 곰팡이를 닦아내는 한편 빛을 쪼이고 습기를 제거해야 한다.
국정원 개혁, 경제 민주화, 복지 공약 실천 등 당면 과제를 발빠르게 풀어나가야 한다. 국민 특히 청년층에 희망의 메시지가 스며들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야간 대화와 소통이 긴요하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그토록 영수회담을 하자는 야당 대표의 손길을 뿌리친 채 4일 해외순방을 떠났다. 소통의 물꼬를 막아놓은 채 비행기에 오르는 박 대통령의 뒷모습이 답답해 보인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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