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작은 악마’로 키우는 추악한 어른들
최영희 상임이사
한 나라의 장래를 예측하려면 그 나라의 청소년을 보라 했는데, 지난 주 한 TV에 비친 초등학교 폭력현장 보고서는 시청자들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아이들을 `’작은 악마’로 키워내는 이기적인 추악한 어른들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학교 폭력의 심각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불과 초등학교 2학년짜리 코흘리개들이 가난하거나, 키가 작거나, 못생긴 아이들을 골라 왕따시키고 갖가지 폭력을 행사하는 현장을 TV가 보여주었다. 반장이라고 하지만 겨우 2학년 짜리 아이가 가장 작은 아이를 골라 색연필 한 타스를 입에 물려(입이 작아 간신히 8개를 입에 물었다 한다) 네발로 교실바닥을 몇 바퀴씩 기어다니게 하는 벌을 주는 방법은 어디서 배웠을까? 힘세고 권력 있는 아이에게 잘 보이려고 실로폰 채로 왕따 당하는 아이의 머리를 80대씩이나 때리는 데 가담한 아이들은 어떤 인성을 키우게 될까. 왜 친구를 때렸느냐고 하니 그 어린것들은 “그냥요” “심심해서요” “재밌잖아요” 이런 답을 했다.
‘열심히 논 당신, 교육현장에서 떠나라!’
나만 기분 좋으면 되고, 힘있으면 과시해야되고, 약자는 밟아야 잘나 보이고, 졸개는 더 길게 줄을 세워야 권위가 서는 세상이다. 끊임없이 당하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복수의 칼을 가는 아이들의 일기장을 보면 그들은 마음속으로 ‘악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5학년 여자아이들이 힘센 6학년 아이들에게 소위 ‘찍힘’을 당하지 않기 위해 조폭 사회처럼 90도로 허리 굽혀 일일이 절하는 모습, 그리고 그 아이들은 우리도 빨리 6학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6학년이 되기를 기다리는 아이들, 나보다 더 약자를 찾아 나서는 동물 세계의 먹이사슬을 보는 듯한 비애를 느끼게 한다. 동네에서는 함께 놀던 아이들도 학교가 가까워지면 서로 멀리 떨어져버린다. 같이 있으면 매를 맞기 때문이다. 자신이 맞지 않기 위해 비굴하게 굴고, 친구가 맞아도 외면해야하는 비겁한 방관자들의 자책감도 없다. 그래서 이 한심한 교육현장은 어린학생들 모두를 ‘악마’로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겠지만 과거에 감옥에서는 교도관들의 묵인 하에 폭력배 출신방장이 폭력으로 질서를 잡는, 사실상의 편의주의적 공생 체제를 유지했었다. 문제는 교사가 반장 부반장 등 간부들을 통해 교도소와 다를 바 없이 교실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또래의 아이들에게 한쪽에게는 때릴 권한을 부여하고 다른 한쪽 아이들에게는 매맞을 의무를 준 것이다. 그리고 현장을 외면했다. 몰매와 괴롭힘 때문에 슬픔과 좌절로 일관된 아이의 일기장에 ‘검사를 했다’는 도장을 찍어준 교사가 아이들을 악마로 키우고 있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라 ‘열심히 놀아먹은 당신, 떠나라! 교육현장에서’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직업이 다 그렇다지만 정말 교육현장은 단순히 생계의 수단으로 자리를 지키면 안된다. 떠나야 할 교사를 골라내는 것도 교육개혁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도 중, 고교보다 훨씬 쉽게 교정될 수 있는 곳이 초등학교일 것이다. 한 반의 정원 25명 타령만 하지말자. 한 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재미없는 한문을 재미있게 가르쳐 보려고 온갖 연구를 다 하는 젊은 교사 허시봉 선생을 TV화면을 통해 만났을 때 우린 교사를 존경했다.
‘왕따 친구’ 못 도운 자책으로 살인한 중학생
우리를 더 절망케 하는 것은 가해아동 부모들의 뻔뻔스런 태도이다. 방송국의 도움으로 아이들을 화해시켜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역할극 프로그램으로 심리적 치료를 시도했다. 그러나 가해아동 부모들이 항의하며 이를 거부했다. 자신의 아이가 상처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자신의 아이 때문에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로 우울증까지 겪고 있는 그 작은 아이의 불행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이들이 그렇게 싸우면서 크는 건데 뭘 그러느냐고 말했다. 만약 상황이 그 반대였다 해도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까.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자기 자식을 기죽지 않게 키우기 위해 남에게 입힌 피해는 덮어주고, 자신의 자식이 입은 피해는 교사까지 폭행하기도 하는 극단적인 경우마저 종종 일어났다. 자식을 학교에 왜 보내는가? ‘그냥’, ‘심심해서’ 약자를 괴롭히고 남의 고통을 보며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의 동물적 속성을 고치고 교육하는 것이 학교이며 학부모가 아닌가. 국가와 학교 그리고 부모가 외면한 학교폭력, 그 폭력에 시달리는 친구를 위해 홀로 의리를 지키려던 중학생은 살인자가 되어 감옥으로 가고 말았다. 어른들 모두가 그 아이를 감옥으로 보내고 만 것이다.
최영희 상임이사
최영희 상임이사
한 나라의 장래를 예측하려면 그 나라의 청소년을 보라 했는데, 지난 주 한 TV에 비친 초등학교 폭력현장 보고서는 시청자들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아이들을 `’작은 악마’로 키워내는 이기적인 추악한 어른들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학교 폭력의 심각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불과 초등학교 2학년짜리 코흘리개들이 가난하거나, 키가 작거나, 못생긴 아이들을 골라 왕따시키고 갖가지 폭력을 행사하는 현장을 TV가 보여주었다. 반장이라고 하지만 겨우 2학년 짜리 아이가 가장 작은 아이를 골라 색연필 한 타스를 입에 물려(입이 작아 간신히 8개를 입에 물었다 한다) 네발로 교실바닥을 몇 바퀴씩 기어다니게 하는 벌을 주는 방법은 어디서 배웠을까? 힘세고 권력 있는 아이에게 잘 보이려고 실로폰 채로 왕따 당하는 아이의 머리를 80대씩이나 때리는 데 가담한 아이들은 어떤 인성을 키우게 될까. 왜 친구를 때렸느냐고 하니 그 어린것들은 “그냥요” “심심해서요” “재밌잖아요” 이런 답을 했다.
‘열심히 논 당신, 교육현장에서 떠나라!’
나만 기분 좋으면 되고, 힘있으면 과시해야되고, 약자는 밟아야 잘나 보이고, 졸개는 더 길게 줄을 세워야 권위가 서는 세상이다. 끊임없이 당하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복수의 칼을 가는 아이들의 일기장을 보면 그들은 마음속으로 ‘악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5학년 여자아이들이 힘센 6학년 아이들에게 소위 ‘찍힘’을 당하지 않기 위해 조폭 사회처럼 90도로 허리 굽혀 일일이 절하는 모습, 그리고 그 아이들은 우리도 빨리 6학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6학년이 되기를 기다리는 아이들, 나보다 더 약자를 찾아 나서는 동물 세계의 먹이사슬을 보는 듯한 비애를 느끼게 한다. 동네에서는 함께 놀던 아이들도 학교가 가까워지면 서로 멀리 떨어져버린다. 같이 있으면 매를 맞기 때문이다. 자신이 맞지 않기 위해 비굴하게 굴고, 친구가 맞아도 외면해야하는 비겁한 방관자들의 자책감도 없다. 그래서 이 한심한 교육현장은 어린학생들 모두를 ‘악마’로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겠지만 과거에 감옥에서는 교도관들의 묵인 하에 폭력배 출신방장이 폭력으로 질서를 잡는, 사실상의 편의주의적 공생 체제를 유지했었다. 문제는 교사가 반장 부반장 등 간부들을 통해 교도소와 다를 바 없이 교실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또래의 아이들에게 한쪽에게는 때릴 권한을 부여하고 다른 한쪽 아이들에게는 매맞을 의무를 준 것이다. 그리고 현장을 외면했다. 몰매와 괴롭힘 때문에 슬픔과 좌절로 일관된 아이의 일기장에 ‘검사를 했다’는 도장을 찍어준 교사가 아이들을 악마로 키우고 있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라 ‘열심히 놀아먹은 당신, 떠나라! 교육현장에서’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직업이 다 그렇다지만 정말 교육현장은 단순히 생계의 수단으로 자리를 지키면 안된다. 떠나야 할 교사를 골라내는 것도 교육개혁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도 중, 고교보다 훨씬 쉽게 교정될 수 있는 곳이 초등학교일 것이다. 한 반의 정원 25명 타령만 하지말자. 한 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재미없는 한문을 재미있게 가르쳐 보려고 온갖 연구를 다 하는 젊은 교사 허시봉 선생을 TV화면을 통해 만났을 때 우린 교사를 존경했다.
‘왕따 친구’ 못 도운 자책으로 살인한 중학생
우리를 더 절망케 하는 것은 가해아동 부모들의 뻔뻔스런 태도이다. 방송국의 도움으로 아이들을 화해시켜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역할극 프로그램으로 심리적 치료를 시도했다. 그러나 가해아동 부모들이 항의하며 이를 거부했다. 자신의 아이가 상처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자신의 아이 때문에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로 우울증까지 겪고 있는 그 작은 아이의 불행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이들이 그렇게 싸우면서 크는 건데 뭘 그러느냐고 말했다. 만약 상황이 그 반대였다 해도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까.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자기 자식을 기죽지 않게 키우기 위해 남에게 입힌 피해는 덮어주고, 자신의 자식이 입은 피해는 교사까지 폭행하기도 하는 극단적인 경우마저 종종 일어났다. 자식을 학교에 왜 보내는가? ‘그냥’, ‘심심해서’ 약자를 괴롭히고 남의 고통을 보며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의 동물적 속성을 고치고 교육하는 것이 학교이며 학부모가 아닌가. 국가와 학교 그리고 부모가 외면한 학교폭력, 그 폭력에 시달리는 친구를 위해 홀로 의리를 지키려던 중학생은 살인자가 되어 감옥으로 가고 말았다. 어른들 모두가 그 아이를 감옥으로 보내고 만 것이다.
최영희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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