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서두에 이와 같은 유명한 말이 있다. "행복한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모습으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모두 제 각각의 모습으로 불행하다."
이 땅에 1000만에 달하는 남북 이산가족들이 있는데 그 비통하고 불행한 정황을 유형별로 분류하자면 숫자가 얼마나 될까? 톨스토이의 선언적 언술에 기대어 보면 그 유형의 숫자 또한 1000만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이산가족 가운데는 대표를 뽑을만한 수범사례가 없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심경이 궁색하고 화급하기로는 누구나 매한가지인 것이다. 이는 곧 한 사람 한 가족의 사연이 전체 이산가족의 비극을 대변한다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
이산가족관련 민간기구들이 지속적으로 컴퓨터 추첨을 통한 소수의 방문단 교환보다는 서신교환을 통한 광범위한 생사확인, 그리고 면회소 설치를 통한 가족재회의 확대를 주장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언젠가 필자가 편집을 맡고있는 <이산가족>이라는 뉴스레터의 지면에, <평북민보> 편집국장으로 있던 강승희씨의 글이 실린 적이 있다. 북한에 두고 온 누님에게, 또 조카 동민 동혁에게, 남한에서 타계한 매형의 소식을 전하는 편지였다. 그 매형은 강씨와는 서로 다른 길로 월남하여 1951년 부산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로부터 강씨는, 일생을 북한의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다간 매형에 대해 관찰자요 기록자의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매형이 군에서 받은 무공훈장, 살만한 집과 가전 집기, 그리고 세월의 풍화작요엗 퇴락하지 아니하는 가족사랑의 뜨거운 마음, 강씨외에는 이를 증거할 '눈'이 없었던 셈이다.
실정법을 무시하고 이사를 할 때마다 북한의 가족들을 함께 전입으로 신고하고, 그로 인해 관계기관의 조사를 받기도 하면서 일구월심 전전긍긍하던 그 매형이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게 재혼을 권유해도 듣지않다가 끝내 혼자서 운명하면서,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강씨가 전한 그 사연은 글이 아니라 통곡이었다.
"매형은 임종에서 꼭 한마디, 내가 대한민국에서 떳떳이 살면서 내 처자식을 만날 날만을 기다리다가 천추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되 승희로 하여금 내거 어떻게 살다갔는가를 누님과 동민이 동혁이에게 전해달라고 유언으로 남기고 가셨답니다."
지금은 장년을 넘어 초로의 나이에 이르렀을 그 두 아들, 이제는 북녘 땅에 살아있을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 그 누님. 그런데도 세월의 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심히 흐르고 있으니 저마다 숨은 사연을 품은 이산가족들의 속내는 애간장이 다 타서 남은 것이 없을 지경이 아니랴.
이 절박한 인지상정의 통한을 앞두고 항차 사상과 제도, 체제와 이념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남과 북이 정녕 한 겨레라면, 그 지도자들이 이제 정말 동포애와 인도주의의 이름앞에 다른 조건을 내걸지 말아야 할 터이다. 적어도 그가 건전한 상식을 가졌다면, 그리고 후세의 사필을 두려워한다면.평북민보>이산가족>안나>
이 땅에 1000만에 달하는 남북 이산가족들이 있는데 그 비통하고 불행한 정황을 유형별로 분류하자면 숫자가 얼마나 될까? 톨스토이의 선언적 언술에 기대어 보면 그 유형의 숫자 또한 1000만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이산가족 가운데는 대표를 뽑을만한 수범사례가 없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심경이 궁색하고 화급하기로는 누구나 매한가지인 것이다. 이는 곧 한 사람 한 가족의 사연이 전체 이산가족의 비극을 대변한다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
이산가족관련 민간기구들이 지속적으로 컴퓨터 추첨을 통한 소수의 방문단 교환보다는 서신교환을 통한 광범위한 생사확인, 그리고 면회소 설치를 통한 가족재회의 확대를 주장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언젠가 필자가 편집을 맡고있는 <이산가족>이라는 뉴스레터의 지면에, <평북민보> 편집국장으로 있던 강승희씨의 글이 실린 적이 있다. 북한에 두고 온 누님에게, 또 조카 동민 동혁에게, 남한에서 타계한 매형의 소식을 전하는 편지였다. 그 매형은 강씨와는 서로 다른 길로 월남하여 1951년 부산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로부터 강씨는, 일생을 북한의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다간 매형에 대해 관찰자요 기록자의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매형이 군에서 받은 무공훈장, 살만한 집과 가전 집기, 그리고 세월의 풍화작요엗 퇴락하지 아니하는 가족사랑의 뜨거운 마음, 강씨외에는 이를 증거할 '눈'이 없었던 셈이다.
실정법을 무시하고 이사를 할 때마다 북한의 가족들을 함께 전입으로 신고하고, 그로 인해 관계기관의 조사를 받기도 하면서 일구월심 전전긍긍하던 그 매형이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게 재혼을 권유해도 듣지않다가 끝내 혼자서 운명하면서,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강씨가 전한 그 사연은 글이 아니라 통곡이었다.
"매형은 임종에서 꼭 한마디, 내가 대한민국에서 떳떳이 살면서 내 처자식을 만날 날만을 기다리다가 천추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되 승희로 하여금 내거 어떻게 살다갔는가를 누님과 동민이 동혁이에게 전해달라고 유언으로 남기고 가셨답니다."
지금은 장년을 넘어 초로의 나이에 이르렀을 그 두 아들, 이제는 북녘 땅에 살아있을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 그 누님. 그런데도 세월의 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심히 흐르고 있으니 저마다 숨은 사연을 품은 이산가족들의 속내는 애간장이 다 타서 남은 것이 없을 지경이 아니랴.
이 절박한 인지상정의 통한을 앞두고 항차 사상과 제도, 체제와 이념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남과 북이 정녕 한 겨레라면, 그 지도자들이 이제 정말 동포애와 인도주의의 이름앞에 다른 조건을 내걸지 말아야 할 터이다. 적어도 그가 건전한 상식을 가졌다면, 그리고 후세의 사필을 두려워한다면.평북민보>이산가족>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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