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쑤!!”
어깨춤이 절로 나는 흥겨운 풍물가락에 아이들은 어색한 몸짓이지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상모돌리기를 익히느라 정신이 없다.
지난 2일 풍물단원, 교육관계 인사, 기관단체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무을풍물 전수식과 더불어 시작된 무을중학교(교장 조농연)의 풍물 특기적성교육은 예전의 고아초등학교 등에서의 풍물전수교육 시도 및 진행이 항상 뜻은 있었지만 재정적 지원이 미비했던 관계로 꾸준히 유지되지 못한 부분을 보완, 구미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성사되었다.
무을풍물단(단장 황진일)의 총무인 김언태씨는 “무을풍물을 중학교에 전수하게된 것은 무을(舞乙)풍물의 전승자 부족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어 풍물단과 무을면 기관장들이 학생들에게 풍물을 가르칠 것을 제의, 무을중학교에서 학부모들과 협의하여 이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을중학교는 지난 4일부터 무을풍물단원을 교사로 초빙, 전교생을 대상으로 1주일에 2번에 걸쳐 3시간씩 무을풍물 전수에 들어갔다.
수다사 정재진 스님이 초대 상쇠
300여 년의 긴 역사를 지닌 무을풍물은 조선 영조시대 무을면 상송리 수다사 정재진 스님이 가락을 만들어 민간에 전파시킨 것이 그 시초.
현재 무을풍물단원의 평균 연령대는 70대가 대부분인데, 이들에 의하면 상쇠 1대인 정재진 스님 이후 대물림은 분명하지 않으나 정재진 쇠가락을 이은 사람으로 이군선이 무을풍물을 집대성하여 이남문과 윤필선, 최일영에게 전수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남문 상쇠는 한국전쟁 이후 금릉군으로 이사하여 현재 전국에서 이름난 빗내농악을 남겼으며, 이외에도 50∼60년대에는 농악의 발원지인 무을의 여러 농악팀들이 전국농악대회 및 민속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휩쓰는 등의 기록을 세웠다.
무을풍물의 특색은 전투농악형태로서 북가락이 웅장하고 장쾌하며 소고놀음이 발달되어 있으며 행위가 다양하여 영남풍물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또 약 45명의 인원으로 12마당을 연주하는 무을풍물은 상쇠의 전승계보가 뚜렷한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인데, 김칠봉 상쇠를 비롯한 수많은 상쇠들이 무을풍물의 쇠가락을 전수받아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현재 김천의 빗내농악, 부산의 아미농악, 비산농악 그리고 날뫼북춤 등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80년대 이후 타 지역의 농악에 비해 겨우 명맥만 이어오는 정도로 유명무실하게 된 무을풍물이 전승단절의 위기를 맞은 이유는 기존의 상쇠들이 연로함과 더불어 40∼50대의 상쇠들이 없다는 것. 이에 지난 94년 무을풍물단을 다시 창단,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1996년 제3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문화부장관(농악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함으로써 예전의 위상을 재정립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차례 故김택규교수(전 영남대 교수)를 비롯한 각계인사들의 ‘무을풍물의 문화재 지정’에 대한 시도와 추진노력이 있었으나 당시의 사정들로 계속 미뤄지거나 좌절되어 지금은 비지정 무형문화재로서 그 계승에 주력하고 있다고 한다.
지역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여
풍물활동 50년의 경력을 지닌 황 단장은 “우리지역의 조상들이 남겨주신 훌륭한 정신문화를 후배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어 감사하고 감개무량하다”고 전했다. 무을중학교 김현준 학생은 “올해부터 특기적성교육으로 우리 고장에 전해오는 무을풍물을 배울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라며 소감을 밝혔다.
무을중의 교사들과 학교운영위원회(위원장 지병관)는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내 고장 전통문화 계승은 물론 애향심 고취 등 아이들의 정서적 전인교육에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풍물은 징 쇠 장구 북의 4가지 악기로 구성된 사물놀이와는 달리 음악, 무용, 연극, 문학, 미술 등의 예술장르가 통일적으로 스며있는 종합적 매체로서 민중들의 생활 그 자체를 표현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한다.
무을(舞乙), 새가 춤을 추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무을풍물이 언젠가는 하늘 높이 비상하는 그 날이 오리라 기대해본다.
이진희 리포터 fastfoot@naeil.lcom
어깨춤이 절로 나는 흥겨운 풍물가락에 아이들은 어색한 몸짓이지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상모돌리기를 익히느라 정신이 없다.
지난 2일 풍물단원, 교육관계 인사, 기관단체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무을풍물 전수식과 더불어 시작된 무을중학교(교장 조농연)의 풍물 특기적성교육은 예전의 고아초등학교 등에서의 풍물전수교육 시도 및 진행이 항상 뜻은 있었지만 재정적 지원이 미비했던 관계로 꾸준히 유지되지 못한 부분을 보완, 구미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성사되었다.
무을풍물단(단장 황진일)의 총무인 김언태씨는 “무을풍물을 중학교에 전수하게된 것은 무을(舞乙)풍물의 전승자 부족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어 풍물단과 무을면 기관장들이 학생들에게 풍물을 가르칠 것을 제의, 무을중학교에서 학부모들과 협의하여 이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을중학교는 지난 4일부터 무을풍물단원을 교사로 초빙, 전교생을 대상으로 1주일에 2번에 걸쳐 3시간씩 무을풍물 전수에 들어갔다.
수다사 정재진 스님이 초대 상쇠
300여 년의 긴 역사를 지닌 무을풍물은 조선 영조시대 무을면 상송리 수다사 정재진 스님이 가락을 만들어 민간에 전파시킨 것이 그 시초.
현재 무을풍물단원의 평균 연령대는 70대가 대부분인데, 이들에 의하면 상쇠 1대인 정재진 스님 이후 대물림은 분명하지 않으나 정재진 쇠가락을 이은 사람으로 이군선이 무을풍물을 집대성하여 이남문과 윤필선, 최일영에게 전수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남문 상쇠는 한국전쟁 이후 금릉군으로 이사하여 현재 전국에서 이름난 빗내농악을 남겼으며, 이외에도 50∼60년대에는 농악의 발원지인 무을의 여러 농악팀들이 전국농악대회 및 민속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휩쓰는 등의 기록을 세웠다.
무을풍물의 특색은 전투농악형태로서 북가락이 웅장하고 장쾌하며 소고놀음이 발달되어 있으며 행위가 다양하여 영남풍물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또 약 45명의 인원으로 12마당을 연주하는 무을풍물은 상쇠의 전승계보가 뚜렷한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인데, 김칠봉 상쇠를 비롯한 수많은 상쇠들이 무을풍물의 쇠가락을 전수받아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현재 김천의 빗내농악, 부산의 아미농악, 비산농악 그리고 날뫼북춤 등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80년대 이후 타 지역의 농악에 비해 겨우 명맥만 이어오는 정도로 유명무실하게 된 무을풍물이 전승단절의 위기를 맞은 이유는 기존의 상쇠들이 연로함과 더불어 40∼50대의 상쇠들이 없다는 것. 이에 지난 94년 무을풍물단을 다시 창단,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1996년 제3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문화부장관(농악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함으로써 예전의 위상을 재정립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차례 故김택규교수(전 영남대 교수)를 비롯한 각계인사들의 ‘무을풍물의 문화재 지정’에 대한 시도와 추진노력이 있었으나 당시의 사정들로 계속 미뤄지거나 좌절되어 지금은 비지정 무형문화재로서 그 계승에 주력하고 있다고 한다.
지역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여
풍물활동 50년의 경력을 지닌 황 단장은 “우리지역의 조상들이 남겨주신 훌륭한 정신문화를 후배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어 감사하고 감개무량하다”고 전했다. 무을중학교 김현준 학생은 “올해부터 특기적성교육으로 우리 고장에 전해오는 무을풍물을 배울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라며 소감을 밝혔다.
무을중의 교사들과 학교운영위원회(위원장 지병관)는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내 고장 전통문화 계승은 물론 애향심 고취 등 아이들의 정서적 전인교육에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풍물은 징 쇠 장구 북의 4가지 악기로 구성된 사물놀이와는 달리 음악, 무용, 연극, 문학, 미술 등의 예술장르가 통일적으로 스며있는 종합적 매체로서 민중들의 생활 그 자체를 표현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한다.
무을(舞乙), 새가 춤을 추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무을풍물이 언젠가는 하늘 높이 비상하는 그 날이 오리라 기대해본다.
이진희 리포터 fastfoot@nae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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