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마을은 배산임수를 따라 자연발생하지요. 자연취락단위가 묶여서 법정동이 되고 2∼3개가 모아지면 행정동으로 나누어집니다. 때문에 역사현장의 발굴은 나라의 경계도 넘어서야 합니다. ‘과거를 지배한자 현재도 통치한다’는 말이 있듯이 역사는 ‘자신의 거울’입니다. 항상 승자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인 역사관은 왕조중심, 지배자 중심으로 지역특성의 정치질서가 반영되어 있는 특색이 있습니다. 지방화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는 이 시대에는 우리 문화를 보는 눈을 달리 가져야 합니다. 전체사 또한 부분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삶의 실체를 무시할 수 없듯이 개인적 사료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인간이 빠진 역사는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의미가 없다는 권삼문(구미시 문화공보담당관실)씨의 설명이다.
황상동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보물 1122호)
옥계에서 인동방향으로 나오면서 2공단 중간에 있는 고개하나를 헐떡거리며 넘어서면 오른편에 보이는 작은 표시판 하나가 여기에 보물 제 1122호로 지정되어 있는 마애여래입상을 찾아오는 길임을 가르쳐 준다.
바람결에 댓잎이 사르락 사르락 소리를 내며 낯선 방문객을 반겨준다. 자동차 엔진소리가 시끄럽지는 않았는지 조심스레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마애여래입상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분홍빛 철쭉 또한 얽혀진 마음을 올올히 풀어줄 듯 하다.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속칭 석현(石峴)이라 불리는 고갯길 좌측으로 솟아있는 암벽 전면에 조각된 높이 7.3m의 여래입상이다. 석불입상으로 풍만한 육체를 그대로 묘사한 조각미가 돋보인다고 한다.
암벽 위에는 별도의 판석을 얹어 불상의 머리 부분을 덮고 있다. 이는 야외에 노출된 고려시대 불상에서 흔히 나타나는 형태이다. 불상은 바위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조각하여 전체적으로 율동감을 준다. 전체적인 조각 수법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조각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어 10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군에게 쫓기던 당나라의 장수가 어느 여인의 도움으로 이 바위 뒤에 숨어 목숨을 구하였는데, 그 여인은 간 곳이 없었다 한다. 그 여인이 부처님이라고 생각한 장수가 이 바위에 불상을 조각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거의동 용샘(龍泉)의 전설
지금은 금오공대 신축공사로 시끌시끌한 거의동 마을. 이 거의동을 감싸고 있는 증산(甑山)에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 있었는데 이 샘을 용샘에라 불렸으며, 그 샘의 물의 양, 빛깔, 범람하는 시기 등으로 홍수, 그해의 농사를 예견하였고 음력 정월 14일에 용샘의 물이 흐리면 낙동강이 범람하였다고 한다.
이 용샘의 주위에 용마(龍馬) 한 마리가 항상 노닐고 있었는데 사람이 근접하면 어디로 숨어 버리곤 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해평(海平)의 의병장 박진경 장군이 그 용마(龍馬)를 데려다가 낙동강 갈대밭을 누비며 조련시켜 천하에 둘도 없는 용마로 만들었다.
하루는 해평의 영산에서 이 용샘으로 활을 쏘아 화살보다 먼저 용마가 다다르기로 달렸는데 당도하여 아무리 살펴봐도 화살이 날아오지 않아 화가 난 박진경 장군이 칼을 빼어 용마의 목을 내리치고 말았다.
그 순간 화살이 쌩하고 날아와 바위에 꽂혔으니 애석하게도 귀한 용마만이 우둔한 주인을 만나 죽음을 당하였다는 애절한 사연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 용샘은 금오공대 거의 캠퍼스 공사로 인하여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바쁜 아침시간에 귀를 쫑긋하게 하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1929년부터 세계지도에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는 동해가 서울대 지리교육학과 이기석 교수에 의해서 다시 제 이름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반가운 뉴스더군요.” 식구들의 아침출근(?)준비에 정신이 없었지만 끝까지 다 보았다는 임지영(32·상모동)씨는 이기석 교수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역사란 진실을 바탕으로 과거의 사실을 그대로 보고 반성하며 그것을 토대로 보다 나은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학문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주변 문화재들을 찾아보면서 선조들의 삶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김은선 리포터 6k5tod@orgio.net
인간이 빠진 역사는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의미가 없다는 권삼문(구미시 문화공보담당관실)씨의 설명이다.
황상동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보물 1122호)
옥계에서 인동방향으로 나오면서 2공단 중간에 있는 고개하나를 헐떡거리며 넘어서면 오른편에 보이는 작은 표시판 하나가 여기에 보물 제 1122호로 지정되어 있는 마애여래입상을 찾아오는 길임을 가르쳐 준다.
바람결에 댓잎이 사르락 사르락 소리를 내며 낯선 방문객을 반겨준다. 자동차 엔진소리가 시끄럽지는 않았는지 조심스레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마애여래입상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분홍빛 철쭉 또한 얽혀진 마음을 올올히 풀어줄 듯 하다.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속칭 석현(石峴)이라 불리는 고갯길 좌측으로 솟아있는 암벽 전면에 조각된 높이 7.3m의 여래입상이다. 석불입상으로 풍만한 육체를 그대로 묘사한 조각미가 돋보인다고 한다.
암벽 위에는 별도의 판석을 얹어 불상의 머리 부분을 덮고 있다. 이는 야외에 노출된 고려시대 불상에서 흔히 나타나는 형태이다. 불상은 바위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조각하여 전체적으로 율동감을 준다. 전체적인 조각 수법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조각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어 10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군에게 쫓기던 당나라의 장수가 어느 여인의 도움으로 이 바위 뒤에 숨어 목숨을 구하였는데, 그 여인은 간 곳이 없었다 한다. 그 여인이 부처님이라고 생각한 장수가 이 바위에 불상을 조각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거의동 용샘(龍泉)의 전설
지금은 금오공대 신축공사로 시끌시끌한 거의동 마을. 이 거의동을 감싸고 있는 증산(甑山)에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 있었는데 이 샘을 용샘에라 불렸으며, 그 샘의 물의 양, 빛깔, 범람하는 시기 등으로 홍수, 그해의 농사를 예견하였고 음력 정월 14일에 용샘의 물이 흐리면 낙동강이 범람하였다고 한다.
이 용샘의 주위에 용마(龍馬) 한 마리가 항상 노닐고 있었는데 사람이 근접하면 어디로 숨어 버리곤 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해평(海平)의 의병장 박진경 장군이 그 용마(龍馬)를 데려다가 낙동강 갈대밭을 누비며 조련시켜 천하에 둘도 없는 용마로 만들었다.
하루는 해평의 영산에서 이 용샘으로 활을 쏘아 화살보다 먼저 용마가 다다르기로 달렸는데 당도하여 아무리 살펴봐도 화살이 날아오지 않아 화가 난 박진경 장군이 칼을 빼어 용마의 목을 내리치고 말았다.
그 순간 화살이 쌩하고 날아와 바위에 꽂혔으니 애석하게도 귀한 용마만이 우둔한 주인을 만나 죽음을 당하였다는 애절한 사연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 용샘은 금오공대 거의 캠퍼스 공사로 인하여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바쁜 아침시간에 귀를 쫑긋하게 하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1929년부터 세계지도에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는 동해가 서울대 지리교육학과 이기석 교수에 의해서 다시 제 이름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반가운 뉴스더군요.” 식구들의 아침출근(?)준비에 정신이 없었지만 끝까지 다 보았다는 임지영(32·상모동)씨는 이기석 교수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역사란 진실을 바탕으로 과거의 사실을 그대로 보고 반성하며 그것을 토대로 보다 나은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학문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주변 문화재들을 찾아보면서 선조들의 삶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김은선 리포터 6k5tod@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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