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이후의 한국 정치
임재경 언론인
신문의 시사 논평 필자는 마음 내키는 대로 언제 어떠한 문제건 다 다룰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 가장 큰 제약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논평 테마와 논평 게재 시점의 정합성(整合性)인데 2002년 월드컵의 개막식이 서울에서 열리는 날 이른바 ‘3홍의 스캔들’을 주제로 하여 열을 올린다면 그것은 바로 정합성에 어긋나는 경우다. 저널리스트로서 40여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줄잡아 2·3000 건의 짧은 글을 썼지만 여태까지 스포츠 행사를 주제로 삼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젊은 시절 내 머리 속에 각인된, 상업적 미국 문화의 오염 루트, 즉 스포츠(sports), 영화(screen), 섹스(sex)등 <3s> 혐오증과 무관치 않을지 모르겠다. 어떻든 지난 반세기 동안 이 <3s>가 사회정의를 해쳤으면 해쳤지 증진시키지는 못했다는 믿음에는 지금껏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월드컵은? 프랑스에서 열렸던 2000년 월드컵 대회는 상업주의의 극치였고 서울 대회(한일 공동주최)는 그런 것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올림픽을 포함한 국제적 스포츠 행사에 상업주의가 개재하지 않는 데가 없을뿐더러 앞으로 지구화의 물결을 타고 상업주의는 더 극성을 부릴 것이 뻔하다. 그러므로 2002년 서울 월드컵의 상업주의가 4년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는 만무하다.
미국과 경기는 꼭 이겨야 한다
그러나 스포츠는 그 자체로 인간의 본성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유희, 투쟁, 격렬한 육체활동의 3대 요소를 지니고 있는 까닭에 월드컵 대회에 상업주의 한 가지 측면에서만 논란을 거듭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 자세가 아닐 터이다. 스포츠의 으뜸 되는 요소인 유희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인)라는 개념어가 성립할 정도로 보편화하였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긴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둘째, 스포츠의 투쟁 요소는 유난히 축구에 두드러져 스포츠 행위자들 사이의 그것으로 머무르지 않고 축구팀의 소속 국가, 지역 혹은 도시로 갈린 관중들 사이의 승부감정으로 발전하고 있음은 익히 아는 대로다. 한-일간의 축구 시합이 특히 인기가 높은 것은 그런 까닭에서이며, 지나간 이야기지만 1960년대 같은 사회주의 진영에 속해 있던 북한과 소련이 국가 대항 축구시합을 벌였을 때 남한 국민이 손에 땀을 쥐고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던 일이 기억에 새롭다. 그런 맥락에서 오는 6월 10일 대구에서 펼쳐질 한국과 미국의 시합은 누가 뭐라 해도 우리들에게는 2002년 월드컵의 최대 구경거리이자 관심사다. 개인적 희망을 말하라면 다른 시합에는 지는 한이 있더라도 미국에는 꼭 이겨야만 한다.
월드컵의 특징이자 강점은 관중을 동원하는 그 거대한 힘에 있다. 관중 동원력은 유희와 투쟁에 곁들여 격렬한 육체적 활동 요소가 가미된 결과인데 육체적 활동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현대인이 축구 시합을 보면서 결핍된 자신의 육체활동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대상심리(代償心理)가 작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가지 지나칠 수 없는 점은 백인 국가에서 활동하는 검은 피부 선수들의 활약상이다.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국가간의 주권존중과 평등을 입에 담고 있으나 인종 차별이 엄존하는 이 지구상에서 흑색 혹은 흑갈색 피부의 인간이 백인을 압도하는 모습은 보고 짓밟혀 온 민중들은 더 할 나위 없는 쾌감을 맛볼 것이다.
축구에 열광하는 관중의 다수가 사회-경제적으로 중하소득층, 연령적으로는 노년층보다는 청소년층이 중심이고 최근에 이르러 여성 팬이 증가 추세에 있음도 눈여겨볼 현상이다. 서울 월드컵 개막 직전에 발간된 2000년 월드컵의 프랑스 팀의 주장인 아프리카 가나 출신 마르셀 데싸위가 쓴 자서전 <검은 두목="">은 축구판 ‘신데렐라’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남북분단 극복할 역량 보강 계기로 삼아야
2002년 월드컵은 한국과 같이 역동성을 지닌 정치 사회에서는 단순한 스포츠 축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남북 분단을 극복하는 문제에 자주적 역량을 보강하는 측면이 있을 수도 있고 억압받는 민중적 요구가 공동의 광장을 구축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큰 불상사 없이 한국에서 진행될 30여개의 시합들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전제와 한국팀이 훌륭한 스포츠 정신을 발휘한다는 확신에서 출발한 것이다.
한국의 극성스럽기까지 한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와 건국 이래 초유의 자발적 정치 클럽인 <노사모>가 서로 친연관계인지 아니면 대척 관계인지가 주목거리인 것도 모두 그런 까닭에서다. 두 모임은 공히 20-30대의 연령층을 핵심으로 삼고 있는 새로운 힘이다. 2002년 월드컵 대회가 지방선거 직전에 있고 다시 반년 뒤에는 대통령선거가 있다는 시기적 특수성은 긴 눈으로 보아 우리의 정치적 미래에 결코 나쁜 징조는 아니라 믿고 싶다.
임재경 언론인노사모>붉은>검은>3s>3s>
임재경 언론인
신문의 시사 논평 필자는 마음 내키는 대로 언제 어떠한 문제건 다 다룰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 가장 큰 제약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논평 테마와 논평 게재 시점의 정합성(整合性)인데 2002년 월드컵의 개막식이 서울에서 열리는 날 이른바 ‘3홍의 스캔들’을 주제로 하여 열을 올린다면 그것은 바로 정합성에 어긋나는 경우다. 저널리스트로서 40여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줄잡아 2·3000 건의 짧은 글을 썼지만 여태까지 스포츠 행사를 주제로 삼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젊은 시절 내 머리 속에 각인된, 상업적 미국 문화의 오염 루트, 즉 스포츠(sports), 영화(screen), 섹스(sex)등 <3s> 혐오증과 무관치 않을지 모르겠다. 어떻든 지난 반세기 동안 이 <3s>가 사회정의를 해쳤으면 해쳤지 증진시키지는 못했다는 믿음에는 지금껏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월드컵은? 프랑스에서 열렸던 2000년 월드컵 대회는 상업주의의 극치였고 서울 대회(한일 공동주최)는 그런 것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올림픽을 포함한 국제적 스포츠 행사에 상업주의가 개재하지 않는 데가 없을뿐더러 앞으로 지구화의 물결을 타고 상업주의는 더 극성을 부릴 것이 뻔하다. 그러므로 2002년 서울 월드컵의 상업주의가 4년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는 만무하다.
미국과 경기는 꼭 이겨야 한다
그러나 스포츠는 그 자체로 인간의 본성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유희, 투쟁, 격렬한 육체활동의 3대 요소를 지니고 있는 까닭에 월드컵 대회에 상업주의 한 가지 측면에서만 논란을 거듭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 자세가 아닐 터이다. 스포츠의 으뜸 되는 요소인 유희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인)라는 개념어가 성립할 정도로 보편화하였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긴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둘째, 스포츠의 투쟁 요소는 유난히 축구에 두드러져 스포츠 행위자들 사이의 그것으로 머무르지 않고 축구팀의 소속 국가, 지역 혹은 도시로 갈린 관중들 사이의 승부감정으로 발전하고 있음은 익히 아는 대로다. 한-일간의 축구 시합이 특히 인기가 높은 것은 그런 까닭에서이며, 지나간 이야기지만 1960년대 같은 사회주의 진영에 속해 있던 북한과 소련이 국가 대항 축구시합을 벌였을 때 남한 국민이 손에 땀을 쥐고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던 일이 기억에 새롭다. 그런 맥락에서 오는 6월 10일 대구에서 펼쳐질 한국과 미국의 시합은 누가 뭐라 해도 우리들에게는 2002년 월드컵의 최대 구경거리이자 관심사다. 개인적 희망을 말하라면 다른 시합에는 지는 한이 있더라도 미국에는 꼭 이겨야만 한다.
월드컵의 특징이자 강점은 관중을 동원하는 그 거대한 힘에 있다. 관중 동원력은 유희와 투쟁에 곁들여 격렬한 육체적 활동 요소가 가미된 결과인데 육체적 활동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현대인이 축구 시합을 보면서 결핍된 자신의 육체활동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대상심리(代償心理)가 작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가지 지나칠 수 없는 점은 백인 국가에서 활동하는 검은 피부 선수들의 활약상이다.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국가간의 주권존중과 평등을 입에 담고 있으나 인종 차별이 엄존하는 이 지구상에서 흑색 혹은 흑갈색 피부의 인간이 백인을 압도하는 모습은 보고 짓밟혀 온 민중들은 더 할 나위 없는 쾌감을 맛볼 것이다.
축구에 열광하는 관중의 다수가 사회-경제적으로 중하소득층, 연령적으로는 노년층보다는 청소년층이 중심이고 최근에 이르러 여성 팬이 증가 추세에 있음도 눈여겨볼 현상이다. 서울 월드컵 개막 직전에 발간된 2000년 월드컵의 프랑스 팀의 주장인 아프리카 가나 출신 마르셀 데싸위가 쓴 자서전 <검은 두목="">은 축구판 ‘신데렐라’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남북분단 극복할 역량 보강 계기로 삼아야
2002년 월드컵은 한국과 같이 역동성을 지닌 정치 사회에서는 단순한 스포츠 축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남북 분단을 극복하는 문제에 자주적 역량을 보강하는 측면이 있을 수도 있고 억압받는 민중적 요구가 공동의 광장을 구축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큰 불상사 없이 한국에서 진행될 30여개의 시합들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전제와 한국팀이 훌륭한 스포츠 정신을 발휘한다는 확신에서 출발한 것이다.
한국의 극성스럽기까지 한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와 건국 이래 초유의 자발적 정치 클럽인 <노사모>가 서로 친연관계인지 아니면 대척 관계인지가 주목거리인 것도 모두 그런 까닭에서다. 두 모임은 공히 20-30대의 연령층을 핵심으로 삼고 있는 새로운 힘이다. 2002년 월드컵 대회가 지방선거 직전에 있고 다시 반년 뒤에는 대통령선거가 있다는 시기적 특수성은 긴 눈으로 보아 우리의 정치적 미래에 결코 나쁜 징조는 아니라 믿고 싶다.
임재경 언론인노사모>붉은>검은>3s>3s>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