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선상탈북, ‘보트피플’인가
안병찬 경원대학교 행정대학원장
한 떼의 북한 주민이 어선을 타고 남한으로 직접 넘어왔다. 순룡범 선장 가족을 포함한 21명이다. 5년 전 선장 안선국씨와 기관장 김원형씨 일가족 14명이 서해에서 ‘선상 탈북’하여 곧장 남으로 온 뒤로 처음이다. 해상 피난이라면 1987년 청진병원 내과의사 김만철씨 일가 11명이 배를 타고 북한을 탈출한 일을 원조로 꼽는다. 그렇지만 김만철씨네는 동해를 횡단해서 제3국 일본에 간 뒤 망명신청을 했으므로 성격이 다르다.
당시 일본 외무성 아시아 국장은 김만철씨 일가를 타이완으로 보내면서 일본 주재 중국 공사를 외무성으로 초치하여 특별기 사용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었다. 중국을 승인하고 대만과 외교관계를 단절한 일본으로서는 김만철씨 일가를 대북 중정(中正)공항으로 수송하기 위해 해상보안청 특별기 YS11을 동원하고 외무성 관리가 동승한 점을 중국에 설명해야 했다. 타이완에서는 대일 외교가 단절되고서 15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정부 항공기가 날아온 일을 의미 있는 사건으로 여겼다. 동북아시아 각 국은 김만철씨 일가의 탈북 사건을 두고 이처럼 입장이 갈렸었다.
김만철씨는 일본 당국에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서 탈출을 감행했노라고 진술했었다. 그 말은 필자로 하여금 타이완의 ‘남해혈서(南海血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중국과 미국이 수교하여 타이페이에서 미국 성조기가 걷히던 때, 타이페이 대학가는 반미 구호로 뒤덮였다. 그 벽보 가운데 베트남 선상 난민의 유서라는 ‘남해혈서’가 게시되어 있었다. 타이완 어부 한 사람이 멀리 남해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황량한 무인도에서 뼈만 남은 13구 시체와 의복 위에 쓴 혈서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 유해는 무인도에 표류하여 굶어 죽은 베트남 난민의 것이라고 했다.
베트남 보트피플의 비극 ‘남해혈서’
“남해의 이름 모를 산호초 위에서 나는 셔츠를 벗어 소라 껍질로 선혈을 묻혀 이 글을 쓴다. 나는 이 편지를 누구에게 쓰는지 모른다. 천주에게 쓰는가. 부처님에게 쓰는가. 혹은 구구절절 자유행복을 찾아주겠다던 민주투사에게 쓰는가…. 우리 일가는 11식구였다. 큰형은 베트남 전쟁의 포화에 죽고, 조카는 ‘해방 전쟁의 유탄’에 맞아 죽고, 93세의 노 조모와 7세의 질녀는 해방 후 ‘인민정부’의 보살핌 속에 굶어 죽고, 일평생 정치는 모르던 아버지는 투쟁대회에서 몽둥이로 맞아 죽고, 둘째형은 집단 수용소에서 배고파 훔쳐먹다 즉결처형을 당했다. 어머니는 배를 타다 물에 빠져 죽고, 처는 해상에서 해적한테 사살되고, 나는 헤엄을 쳐서 이 산호초에 닿았다.
그리하여 13일간의 만 가지 고통 속에 죽는다. 바다와 하늘은 망망한데 지금 나는 누구한테 이 글을 쓰는가…” 이런 요지의 ‘남해혈서’는 반공일심(反共一心)·행동일치(行動一致)의 결의로 체제를 지키려는 타이페이 국민당 정권한테는 매우 유용한 소재였다. 혈서는 그 출처의 진위를 떠나 냉전시대 한 가운데서 분단의 비극, 정치의 폭행, 전쟁의 참상, 난민의 비극 등을 드러내는 듯 했다.
70년대 후반에 고비를 이룬 베트남 선상 난민 물결은 베트남이 무력에 의한 통일을 달성하면서 일어난 후유증이었다. 그 특징은 분단 상황에서의 체제 이탈이 아니라 통일 달성 이후의 체제 이탈이라는 점이다. 하노이 당국은 새로운 공산화 통일 체제를 원하지 않는 자들은 이 땅을 떠나도 좋다는 입장으로 난민의 월경 탈출과 선상 탈출을 묵인하고 장려했다.
특히 중국인(화교)을 배척하여 그들이 중국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 것을 환영했다. 결과적으로 베트남 난민 물결은 동남아 해역으로 밀려 나가 세계 각처로 흩어져 배회했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조차 선상 난민은 베트남 정부 관원이 알고 있는 가운데 진행되는 ‘난민 수출’이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근래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탈북은 과거 베트남 난민 물결과는 성격이 다르다. 탈북자들은 이념적인 이유보다는 기아와 생활고 때문에 두만강 국경을 넘은 경우가 많다. 불법 체류자인 그들 대부분은 중국에 숨어살면서 자리를 잡아보려고 애쓴다. 최근에는 서방 인권단체 개입 하에 탈북자들이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사무소, 서방국 대사관, 한국총영사관 등에 진입하는 방법을 쓰지만 그 숫자는 극소수에 그친다.
일회성 ‘어선 탈북’, 확대 해석 말아야
이번 순룡범씨네 경우는 우발적인 탈북이 아니고 몇 년간 준비하고 계획하여 단행한 ‘선상 탈북’이다. 배에 실려있는 경유와 쌀 등을 북한 암시장에서 구입하자면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을 것이다. 순룡범씨가 재작년에 중국 단둥시 부근에서 남한 삼촌을 극적으로 만났다는 사실은 이 가족이 미리부터 치밀하게 선상 탈북 계획을 짤 수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선상 탈북은 일회성이라고 보아야한다. 북한 체제는 상당히 안정되어 실제적인 경제문제의 해결을 꾀하며 개혁조치를 단행하고 있는 중이다. 이와 맞물려 요즈음 남북관계가 풀려 돌아가고 있다. 국토통일원은 이번에 귀순한 21명을 다른 탈북자와 똑같이 처리할 예정이다. 관계기관의 합동 신문이 끝나는 대로 안성에 있는 탈북자 사회적응교육 시설 ‘하나원’에 보낸 뒤 정착지원을 하는 절차이다. 남북교류가 각 분야에서 진척을 보이는 이때 선상 탈북 문제를 확대해석 하거나 경직된 냉전적 시선으로 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병찬 경원대학교 행정대학원장
안병찬 경원대학교 행정대학원장
한 떼의 북한 주민이 어선을 타고 남한으로 직접 넘어왔다. 순룡범 선장 가족을 포함한 21명이다. 5년 전 선장 안선국씨와 기관장 김원형씨 일가족 14명이 서해에서 ‘선상 탈북’하여 곧장 남으로 온 뒤로 처음이다. 해상 피난이라면 1987년 청진병원 내과의사 김만철씨 일가 11명이 배를 타고 북한을 탈출한 일을 원조로 꼽는다. 그렇지만 김만철씨네는 동해를 횡단해서 제3국 일본에 간 뒤 망명신청을 했으므로 성격이 다르다.
당시 일본 외무성 아시아 국장은 김만철씨 일가를 타이완으로 보내면서 일본 주재 중국 공사를 외무성으로 초치하여 특별기 사용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었다. 중국을 승인하고 대만과 외교관계를 단절한 일본으로서는 김만철씨 일가를 대북 중정(中正)공항으로 수송하기 위해 해상보안청 특별기 YS11을 동원하고 외무성 관리가 동승한 점을 중국에 설명해야 했다. 타이완에서는 대일 외교가 단절되고서 15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정부 항공기가 날아온 일을 의미 있는 사건으로 여겼다. 동북아시아 각 국은 김만철씨 일가의 탈북 사건을 두고 이처럼 입장이 갈렸었다.
김만철씨는 일본 당국에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서 탈출을 감행했노라고 진술했었다. 그 말은 필자로 하여금 타이완의 ‘남해혈서(南海血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중국과 미국이 수교하여 타이페이에서 미국 성조기가 걷히던 때, 타이페이 대학가는 반미 구호로 뒤덮였다. 그 벽보 가운데 베트남 선상 난민의 유서라는 ‘남해혈서’가 게시되어 있었다. 타이완 어부 한 사람이 멀리 남해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황량한 무인도에서 뼈만 남은 13구 시체와 의복 위에 쓴 혈서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 유해는 무인도에 표류하여 굶어 죽은 베트남 난민의 것이라고 했다.
베트남 보트피플의 비극 ‘남해혈서’
“남해의 이름 모를 산호초 위에서 나는 셔츠를 벗어 소라 껍질로 선혈을 묻혀 이 글을 쓴다. 나는 이 편지를 누구에게 쓰는지 모른다. 천주에게 쓰는가. 부처님에게 쓰는가. 혹은 구구절절 자유행복을 찾아주겠다던 민주투사에게 쓰는가…. 우리 일가는 11식구였다. 큰형은 베트남 전쟁의 포화에 죽고, 조카는 ‘해방 전쟁의 유탄’에 맞아 죽고, 93세의 노 조모와 7세의 질녀는 해방 후 ‘인민정부’의 보살핌 속에 굶어 죽고, 일평생 정치는 모르던 아버지는 투쟁대회에서 몽둥이로 맞아 죽고, 둘째형은 집단 수용소에서 배고파 훔쳐먹다 즉결처형을 당했다. 어머니는 배를 타다 물에 빠져 죽고, 처는 해상에서 해적한테 사살되고, 나는 헤엄을 쳐서 이 산호초에 닿았다.
그리하여 13일간의 만 가지 고통 속에 죽는다. 바다와 하늘은 망망한데 지금 나는 누구한테 이 글을 쓰는가…” 이런 요지의 ‘남해혈서’는 반공일심(反共一心)·행동일치(行動一致)의 결의로 체제를 지키려는 타이페이 국민당 정권한테는 매우 유용한 소재였다. 혈서는 그 출처의 진위를 떠나 냉전시대 한 가운데서 분단의 비극, 정치의 폭행, 전쟁의 참상, 난민의 비극 등을 드러내는 듯 했다.
70년대 후반에 고비를 이룬 베트남 선상 난민 물결은 베트남이 무력에 의한 통일을 달성하면서 일어난 후유증이었다. 그 특징은 분단 상황에서의 체제 이탈이 아니라 통일 달성 이후의 체제 이탈이라는 점이다. 하노이 당국은 새로운 공산화 통일 체제를 원하지 않는 자들은 이 땅을 떠나도 좋다는 입장으로 난민의 월경 탈출과 선상 탈출을 묵인하고 장려했다.
특히 중국인(화교)을 배척하여 그들이 중국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 것을 환영했다. 결과적으로 베트남 난민 물결은 동남아 해역으로 밀려 나가 세계 각처로 흩어져 배회했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조차 선상 난민은 베트남 정부 관원이 알고 있는 가운데 진행되는 ‘난민 수출’이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근래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탈북은 과거 베트남 난민 물결과는 성격이 다르다. 탈북자들은 이념적인 이유보다는 기아와 생활고 때문에 두만강 국경을 넘은 경우가 많다. 불법 체류자인 그들 대부분은 중국에 숨어살면서 자리를 잡아보려고 애쓴다. 최근에는 서방 인권단체 개입 하에 탈북자들이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사무소, 서방국 대사관, 한국총영사관 등에 진입하는 방법을 쓰지만 그 숫자는 극소수에 그친다.
일회성 ‘어선 탈북’, 확대 해석 말아야
이번 순룡범씨네 경우는 우발적인 탈북이 아니고 몇 년간 준비하고 계획하여 단행한 ‘선상 탈북’이다. 배에 실려있는 경유와 쌀 등을 북한 암시장에서 구입하자면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을 것이다. 순룡범씨가 재작년에 중국 단둥시 부근에서 남한 삼촌을 극적으로 만났다는 사실은 이 가족이 미리부터 치밀하게 선상 탈북 계획을 짤 수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선상 탈북은 일회성이라고 보아야한다. 북한 체제는 상당히 안정되어 실제적인 경제문제의 해결을 꾀하며 개혁조치를 단행하고 있는 중이다. 이와 맞물려 요즈음 남북관계가 풀려 돌아가고 있다. 국토통일원은 이번에 귀순한 21명을 다른 탈북자와 똑같이 처리할 예정이다. 관계기관의 합동 신문이 끝나는 대로 안성에 있는 탈북자 사회적응교육 시설 ‘하나원’에 보낸 뒤 정착지원을 하는 절차이다. 남북교류가 각 분야에서 진척을 보이는 이때 선상 탈북 문제를 확대해석 하거나 경직된 냉전적 시선으로 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병찬 경원대학교 행정대학원장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