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 문화유산 :3 왕권강화를 위한 대역사>선화공주와 선덕여왕이 남긴 아름다운 건축물들
둘다 신라 진평왕의 딸 … 백제와 신라에서 각각 미륵사 황룡사 지어
지역내일
2000-12-01
(수정 2000-12-01 오후 12:02:27)
신라의 선덕여왕과 백제 무왕의 왕비였던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딸로 친자매 사이이다.
두 자매는 각각 여왕과 왕비가 되어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은 유명한 건축물들을 남겼으니, 언니 선덕여왕 대
에 지어진 경주 첨성대와 분황사탑, 황룡사9층탑과 동생 선화공주 때 건축된 익산 미륵사가 바로 그것이다.
3탑3금당의 가람배치를 한 미륵사
미륵사는 백제 무왕(600~641) 때 창건된 절이다.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다. ‘마를 캐서 파는
아이’라는 뜻이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서라벌로 가서 <서동요>를 퍼뜨
려 결국 선화공주와 혼인하기에 이른다.
왕위에 오른 그는 어느날 왕비와 함께 길을 가다 용화산 밑 큰 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만난다. 이 못을 메워
미륵삼존의 상을 세우고 법당과 세 개의 탑(동·서탑은 석탑, 중앙탑은 목탑), 세 개의 금당을 세워 미륵사
라 이름했다. 신라 진평왕은 100여 공인들을 보내 이 역사(役事)를 도왔다.
이상은 《삼국유사》 제2권 <백제 무왕="">편에 나오는 미륵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다.
실제 1980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미륵사지는 미륵이 하생(下生)하여 3회의 설법으로 미
래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용화삼회설’에 따라 3탑3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륵신앙은 미래의 도솔천, 즉 영원한 평화의 세계를 믿으며 미래의 주인인 미륵불을 받드는 신앙으로 범국
민적인 호국정신을 심어주는 사상이었다. 신라의 화랑이 미륵사상과 통하듯 백제의 미륵사상 또한 호국의
상징이었다.
“익산 쌍릉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무덤”
최근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전북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익산쌍릉’(국가사적 87호)이 무왕(武王)과 그의
부인인 선화비(善花妃)의 무덤인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쌍릉 가운데 대왕묘의 묘실은 길이 380㎝, 너비 178㎝, 높이 227㎝로 지금까지 발견된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규모면에서 왕릉인 부여의 능산리 고분보다도 오히려 품격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 쌍릉의
양식은 묘제 형식상 7세기에 유행한 것이고, 이 시기는 무왕의 재위 및 사망연대와 일치한다.
이 고분은 고려 때부터 왜구의 노략질로 수차례 도굴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1917년 일본인학자들에 의
해 일부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남아 있는 유물이 거의 없어 무왕과 선화비의 무덤임을 증명하지 못해왔다.
그렇지만 《고려사》를 비롯, 《세종실록지리지》 《금마지(金馬志)》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문헌들은
쌍릉은 무왕과 선화비의 무덤이라고 적고 있다.
단순한 별자리 관측용이 아니다
경주 첨성대는 진평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언니 선덕여왕이 지은 건축물이다.
첨성대는 흔히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지 천문을 관측하기 위한 용도라면
이처럼 높을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여러개의 옛 관상대(관천대)는 하나같이 이렇게 생기
지도 않았고 높지도 않다.
이미 고구려 때 282개의 별자리에 1464개의 별을 조각해 놓은 석각천문도가 있고 조선조에서 제작한 천문
도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을 보면 관측방식은 다 비슷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첨성대는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이렇게 높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선덕여왕 때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 수많은 내우외환이 발생했던 시기이다. 《삼국사기》 제5권 <>
라본기 선덕여왕>편을 보면 재위 2년과 5년에 백제가 신라 영토를 침범하고 7년에는 고구려가, 11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공모하여 침공한다.
게다가 재위 첫해부터 가뭄이 든다. 2년에는 서라벌에 지진이 발생하고 3년에는 밤(栗)만한 우박이 오는가
하면 8년에는 동해바다가 붉고 뜨거워져 고기들이 떼죽음을 하기도 한다. 16년에는 부하들이 ‘여왕은 정
치를 잘하지 못한다’하여 반란까지 일으키고 있다.
왕권 강화의 상징물로 세운 첨성대
선덕여왕대는 신라가 귀족들의 집단지배체제에서 태종 무열왕의 전제왕권 확립기로 넘어가는 마지막 과도기
였다.
지방의 토호들은 전래의 무교(巫敎)적 세계관을 내세워 중앙정권의 권위에 도전하고, 이런 와중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게 많은 성을 뺏기게 된다.
이런 복잡한 정치상황 속에 선덕여왕은 엄청난 국력을 쏟아부어 첨성대(조성연대는 불분명)와 분황사탑(재
위 3년)을 조성한다.
또 재위 12년(645) 3월 중국으로 유학갔던 자장(慈藏)이 돌아오자 그에게 전권을 주어 신라의 정신적 지
도자로 삼고 황룡사지 9층목탑(재위 13년)을 쌓는다.
이런 시기에 지어진 신라의 첨성대는 왕권 강화를 과시하는 하나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다.
별자리를 관측하는 역할보다는 하늘의 뜻을 감지하는 ‘점성대’(占星臺·첨성대의 다른 이름)의 기능이 더
강했을 것이며 이를 위해 보다 높이 쌓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백제 아비지가 쌓은 황룡사 9층탑
《삼국유사》 제3권 <황룡사 9층탑=""> 편을 보면 아비지가 소장(小匠) 200명을 거느리고 역사를 하는 기록이
나온다.
처음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 공장 아비지의 꿈에 백제가 멸망하는 것이 보였다. 마음 속에 의심이 난 공장이
일을 멈추자, 문득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더니 노승 한 사람과 장사 한 사람이 금전문에서 나와 그 기둥
을 세우고 사라졌다. 공장은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완성된 탑의 높이는 철반(鐵
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그 이하 본탑의 높이가 183척이었다.
225척을 당시 쓰인 고려척(尺)으로 환산하면 약 80m. 요즘으로 치면 20층 빌딩 위에 철탑이 하나 더 서
있는 높이였으니 서라벌 장안 어디에서나 왕권을 상징하는 9층탑의 광채가 빛났을 법하다.
분황사 주차장에서 남쪽으로 난 소로(승용차 통행 가능)를 따라가면 곧바로 황룡사지로 들어선다. 이 길 오
른쪽(서쪽)으로는 거대한 금동불이 서 있던 금당터가 있고 왼쪽(동쪽)으로는 64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는 목
탑터가 자리한다.
황량한 목탑터에 서면 아이들은 주춧돌이 몇 인지 세느라 뛰어다니지만, 어른들은 3만평에 이르는 거대한
절터의 한 가운데서 사라진 탑을 생각하며 몸서리를 치게 된다.
황룡사터에서 안압지쪽으로 나가면 길 건너편에 반월성이 보이고 첨성대는 바로 그 앞에 있다.
<첨성대는 정남향이="" 아니다="">
기단석은 동서남북 4방위에 맞추고 맨 위 정자석은 그 중앙을 갈라 8방위에 맞추었으며 … 정남으로 향한
창은 춘분과 추분,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게 되어 있고 …
― 전상운. 《한국과학기술사》. 정음사
지금까지 알려진 경주 첨성대에 관한 몇가지 상식들이다. 혹자들은 여기에 ‘첨성대 건축에 사용된 돌의 수
는 362개로 1년의 날수가 된다’던지 ‘몸체가 27단인 것은 선덕여왕이 신라의 27대 왕임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덧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나침반을 들고 가서 실측을 해보면 첨성대 기단석은 정남향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또 가운
데 창문 아래쪽 12단까지는 깬돌과 진흙으로 채워져 있어 햇볕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내려간다는 것은 불가
능하다.
우리나라의 모든 구조물 ― 탑 성곽 등 ― 은 내부공간이 필요없을 때 이런 방식으로 만든다. 만들기 쉽고
구조적으로도 안전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첨성대의 구조를 ‘규형(圭形)’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는 우리나라 성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구조법이며 적이 올라오지 못할 뿐 아니라 성곽이 무너지지 않는 가장 좋은 구조법”이라고 설명하고 이 모
양을 따라 수원성곽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남대 유홍준 교수는 “첨성대의 우아하면서 온순한 느낌의 형태미는 신라적이라기보다 백제적”이라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시기에 있어서 이런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신라의 분황사탑과 백제
의 익산 미륵사지탑의 조형기술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난다.
숙련된 목수와 어린아이의 솜씨라고나 할까. 백제 미륵사지탑의 옥개석 추녀마루가 날아갈 듯 날렵한 모습
이라면 분황사탑은 보도블럭같은 석재를 조금씩 내밀어 옥개부를 쌓아올린 소박한 모습이다. 결국 황룡사지
9층목탑을 쌓는 일에는 백제의 공장(工匠) 아비지가 동원되었다.
첨성대는>황룡사>백제>서동요>
두 자매는 각각 여왕과 왕비가 되어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은 유명한 건축물들을 남겼으니, 언니 선덕여왕 대
에 지어진 경주 첨성대와 분황사탑, 황룡사9층탑과 동생 선화공주 때 건축된 익산 미륵사가 바로 그것이다.
3탑3금당의 가람배치를 한 미륵사
미륵사는 백제 무왕(600~641) 때 창건된 절이다.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다. ‘마를 캐서 파는
아이’라는 뜻이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서라벌로 가서 <서동요>를 퍼뜨
려 결국 선화공주와 혼인하기에 이른다.
왕위에 오른 그는 어느날 왕비와 함께 길을 가다 용화산 밑 큰 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만난다. 이 못을 메워
미륵삼존의 상을 세우고 법당과 세 개의 탑(동·서탑은 석탑, 중앙탑은 목탑), 세 개의 금당을 세워 미륵사
라 이름했다. 신라 진평왕은 100여 공인들을 보내 이 역사(役事)를 도왔다.
이상은 《삼국유사》 제2권 <백제 무왕="">편에 나오는 미륵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다.
실제 1980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미륵사지는 미륵이 하생(下生)하여 3회의 설법으로 미
래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용화삼회설’에 따라 3탑3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륵신앙은 미래의 도솔천, 즉 영원한 평화의 세계를 믿으며 미래의 주인인 미륵불을 받드는 신앙으로 범국
민적인 호국정신을 심어주는 사상이었다. 신라의 화랑이 미륵사상과 통하듯 백제의 미륵사상 또한 호국의
상징이었다.
“익산 쌍릉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무덤”
최근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전북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익산쌍릉’(국가사적 87호)이 무왕(武王)과 그의
부인인 선화비(善花妃)의 무덤인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쌍릉 가운데 대왕묘의 묘실은 길이 380㎝, 너비 178㎝, 높이 227㎝로 지금까지 발견된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규모면에서 왕릉인 부여의 능산리 고분보다도 오히려 품격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 쌍릉의
양식은 묘제 형식상 7세기에 유행한 것이고, 이 시기는 무왕의 재위 및 사망연대와 일치한다.
이 고분은 고려 때부터 왜구의 노략질로 수차례 도굴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1917년 일본인학자들에 의
해 일부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남아 있는 유물이 거의 없어 무왕과 선화비의 무덤임을 증명하지 못해왔다.
그렇지만 《고려사》를 비롯, 《세종실록지리지》 《금마지(金馬志)》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문헌들은
쌍릉은 무왕과 선화비의 무덤이라고 적고 있다.
단순한 별자리 관측용이 아니다
경주 첨성대는 진평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언니 선덕여왕이 지은 건축물이다.
첨성대는 흔히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지 천문을 관측하기 위한 용도라면
이처럼 높을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여러개의 옛 관상대(관천대)는 하나같이 이렇게 생기
지도 않았고 높지도 않다.
이미 고구려 때 282개의 별자리에 1464개의 별을 조각해 놓은 석각천문도가 있고 조선조에서 제작한 천문
도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을 보면 관측방식은 다 비슷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첨성대는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이렇게 높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선덕여왕 때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 수많은 내우외환이 발생했던 시기이다. 《삼국사기》 제5권 <>
라본기 선덕여왕>편을 보면 재위 2년과 5년에 백제가 신라 영토를 침범하고 7년에는 고구려가, 11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공모하여 침공한다.
게다가 재위 첫해부터 가뭄이 든다. 2년에는 서라벌에 지진이 발생하고 3년에는 밤(栗)만한 우박이 오는가
하면 8년에는 동해바다가 붉고 뜨거워져 고기들이 떼죽음을 하기도 한다. 16년에는 부하들이 ‘여왕은 정
치를 잘하지 못한다’하여 반란까지 일으키고 있다.
왕권 강화의 상징물로 세운 첨성대
선덕여왕대는 신라가 귀족들의 집단지배체제에서 태종 무열왕의 전제왕권 확립기로 넘어가는 마지막 과도기
였다.
지방의 토호들은 전래의 무교(巫敎)적 세계관을 내세워 중앙정권의 권위에 도전하고, 이런 와중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게 많은 성을 뺏기게 된다.
이런 복잡한 정치상황 속에 선덕여왕은 엄청난 국력을 쏟아부어 첨성대(조성연대는 불분명)와 분황사탑(재
위 3년)을 조성한다.
또 재위 12년(645) 3월 중국으로 유학갔던 자장(慈藏)이 돌아오자 그에게 전권을 주어 신라의 정신적 지
도자로 삼고 황룡사지 9층목탑(재위 13년)을 쌓는다.
이런 시기에 지어진 신라의 첨성대는 왕권 강화를 과시하는 하나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다.
별자리를 관측하는 역할보다는 하늘의 뜻을 감지하는 ‘점성대’(占星臺·첨성대의 다른 이름)의 기능이 더
강했을 것이며 이를 위해 보다 높이 쌓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백제 아비지가 쌓은 황룡사 9층탑
《삼국유사》 제3권 <황룡사 9층탑=""> 편을 보면 아비지가 소장(小匠) 200명을 거느리고 역사를 하는 기록이
나온다.
처음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 공장 아비지의 꿈에 백제가 멸망하는 것이 보였다. 마음 속에 의심이 난 공장이
일을 멈추자, 문득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더니 노승 한 사람과 장사 한 사람이 금전문에서 나와 그 기둥
을 세우고 사라졌다. 공장은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완성된 탑의 높이는 철반(鐵
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그 이하 본탑의 높이가 183척이었다.
225척을 당시 쓰인 고려척(尺)으로 환산하면 약 80m. 요즘으로 치면 20층 빌딩 위에 철탑이 하나 더 서
있는 높이였으니 서라벌 장안 어디에서나 왕권을 상징하는 9층탑의 광채가 빛났을 법하다.
분황사 주차장에서 남쪽으로 난 소로(승용차 통행 가능)를 따라가면 곧바로 황룡사지로 들어선다. 이 길 오
른쪽(서쪽)으로는 거대한 금동불이 서 있던 금당터가 있고 왼쪽(동쪽)으로는 64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는 목
탑터가 자리한다.
황량한 목탑터에 서면 아이들은 주춧돌이 몇 인지 세느라 뛰어다니지만, 어른들은 3만평에 이르는 거대한
절터의 한 가운데서 사라진 탑을 생각하며 몸서리를 치게 된다.
황룡사터에서 안압지쪽으로 나가면 길 건너편에 반월성이 보이고 첨성대는 바로 그 앞에 있다.
<첨성대는 정남향이="" 아니다="">
기단석은 동서남북 4방위에 맞추고 맨 위 정자석은 그 중앙을 갈라 8방위에 맞추었으며 … 정남으로 향한
창은 춘분과 추분,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게 되어 있고 …
― 전상운. 《한국과학기술사》. 정음사
지금까지 알려진 경주 첨성대에 관한 몇가지 상식들이다. 혹자들은 여기에 ‘첨성대 건축에 사용된 돌의 수
는 362개로 1년의 날수가 된다’던지 ‘몸체가 27단인 것은 선덕여왕이 신라의 27대 왕임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덧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나침반을 들고 가서 실측을 해보면 첨성대 기단석은 정남향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또 가운
데 창문 아래쪽 12단까지는 깬돌과 진흙으로 채워져 있어 햇볕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내려간다는 것은 불가
능하다.
우리나라의 모든 구조물 ― 탑 성곽 등 ― 은 내부공간이 필요없을 때 이런 방식으로 만든다. 만들기 쉽고
구조적으로도 안전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첨성대의 구조를 ‘규형(圭形)’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는 우리나라 성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구조법이며 적이 올라오지 못할 뿐 아니라 성곽이 무너지지 않는 가장 좋은 구조법”이라고 설명하고 이 모
양을 따라 수원성곽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남대 유홍준 교수는 “첨성대의 우아하면서 온순한 느낌의 형태미는 신라적이라기보다 백제적”이라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시기에 있어서 이런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신라의 분황사탑과 백제
의 익산 미륵사지탑의 조형기술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난다.
숙련된 목수와 어린아이의 솜씨라고나 할까. 백제 미륵사지탑의 옥개석 추녀마루가 날아갈 듯 날렵한 모습
이라면 분황사탑은 보도블럭같은 석재를 조금씩 내밀어 옥개부를 쌓아올린 소박한 모습이다. 결국 황룡사지
9층목탑을 쌓는 일에는 백제의 공장(工匠) 아비지가 동원되었다.
첨성대는>황룡사>백제>서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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