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강당보다도 넓은 조인식장에 할당된 한국인 기자석은 둘 뿐이었다. 유엔 측 기자단만 하여도 약 100명이 되고 참전하지 않은 일본인 기자석도 10명을 넘는데, 휴전회담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또 한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것이다.”
최병우(崔秉宇) 기자가 쓴 휴전협정 조인식 기사의 한 부분이다. 최 기자는 조인식에 걸린 11분간을 ‘백주몽(白晝夢)과 같은’ 이라고 표현했다. 편집기자가 붙였을 기사 제목은 ‘기이한 전투의 정지’였다.
기사의 종결부분에는 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가죽으로 장정(裝幀)하고 금자(金字)로 표제를 박은’ 협정 부도(附圖), 그 안에 ‘우리가 그리지 않은 분할선이 울긋불긋 우리의 강토를 종횡으로’ 금 그었으리라 상상하면서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곳이 우리나라인가?” 묻는 것이다. 그리고 기사는 이런 말로 계속된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살고 죽어야 할 땅은 이곳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자문자답하였다. 10시 12분 정각, 조인작업은 필하였다.”
‘기이한 전투의 정지’로부터 50년
그날 1953년 7월 27일은, 3년 넘게 무류(無類)의 동족상잔과 처절한 자해를 거듭한 한국전쟁이 ‘기이한 전투의 정지’로 일시 중단된 날이다. 꼭 50년이 지났다. 그때 아직 20대였던 최 기자는 이 기사를 쓴 5년 뒤 급박한 전쟁 상황이던 금문도(金門島) 취재 길에서 타고 있던 상륙용 주정(舟艇)이 침몰, 대만해협 격랑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는 한국전쟁을 취재한 종군기자들 중 전장에서 순직한 전몰기자가 17명이나 되는데 그 전원이 외국인이었던 것에 대해 ‘고마운 한편 부끄럽다’고 평소 자주 말하던 터였다. 마치, 그 빚 아닌 빚을 한국 기자를 대표해서 나 스스로 갚는다는 듯이, 그는 그렇게 취재 전선에서 산화하는 길을 찾아 걸었다.
기록을 보면 6?25 발발 당시 서울에는 전쟁 발발 제1보를 특종한 UP 통신의 재크 제임스 기자를 포함 4명의 외국인 기자가 있었다. AFP 모리스 샹텔룹 기자는 서울 철수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북한에 3년이나 억류됐다. 미군 참전과 함께 한국전선에 뛰어들기 시작한 외국 취재진은 7월 9일 INS 통신 레이 리차즈 기자가 첫 희생자가 된 것을 시작으로 7월 한 달에만 6명이 전사했다.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이 그런 것이고 위험에 몸을 던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가슴 한 쪽을 잡아당기는 무엇인가가 남는다. 최병우 기자의 휴전 조인식 기사에 나오는 ‘한국의 운명이 또 한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상황, 그리고 ‘내가 앉아 있는 이곳이 우리나라인가?’ 라는 자문(自問)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은 생각이 그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 우리의 운명이 남의 손으로 결정되고 농락되는 역사를 숱하게 보아 왔다. 제 운명의 속절없음을 멍청히 바라만 보는 ‘구경꾼’일 뿐이다.
지난 역사에서 그랬을 뿐 아니라 바로 지금 진행되는, 또는 다가오는 역사에서도 그러할 개연성이 높다. 내 땅에서 전쟁이 나도 나보다 남이 앞장서고, 당연히 내 일인데도 나는 알 필요도 없는 사람인 듯이 젖혀놓아지는 상황이라면 어찌 심각한 문제가 아닐 것인가.
정전체제 50년은 ‘전쟁도 평화도 아닌’ 그러나 ‘전쟁은 언제나 가까이 있고 평화는 언제나 아득히 먼’ 세월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과 그 평화는 시작과 끝이 모두 내 손 아닌 남의 손에 달렸다. 오로지 타율이다.
1994년에 실제로 진행됐던 한반도 핵전쟁 위기는 민족 절멸을 초래할 일촉즉발의 무시무시한 상황 전개였으나 한국은 대통령조차 손톱만한 정보도 없었다. 우리는 깜깜히 모른 사이 우리의 운명이 제 멋대로 굴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6·15 정신 폄하 … 더 멀어진 평화체제
그렇다면 지금 2003년 7월은 어떤가. 혹시라도 벌어지고 있을지 모를 전쟁의 음모, 전쟁 발발의 위협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 민족에게 닥쳐올 운명에 대해 우리는 대처할 능력, 대처할 방법이 있는 것일까.
한반도 문제에 대한 우리 자신의 주체적 접근과 해결은 2000년 6·15에 이룬 남북정상의 포옹으로 기적과도 같은 진전과 희망을 던져 주었으나, 그 희망이 오늘 어떻게 흠집이 나고 폄하되며 산산조각이 나고 있는지 현실은 차라리 눈물겹다. 50년 전 휴전협정 조인식장의 풍경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한 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역사에서 소외시키는 데 열심이다. 지금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요구다.
최병우(崔秉宇) 기자가 쓴 휴전협정 조인식 기사의 한 부분이다. 최 기자는 조인식에 걸린 11분간을 ‘백주몽(白晝夢)과 같은’ 이라고 표현했다. 편집기자가 붙였을 기사 제목은 ‘기이한 전투의 정지’였다.
기사의 종결부분에는 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가죽으로 장정(裝幀)하고 금자(金字)로 표제를 박은’ 협정 부도(附圖), 그 안에 ‘우리가 그리지 않은 분할선이 울긋불긋 우리의 강토를 종횡으로’ 금 그었으리라 상상하면서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곳이 우리나라인가?” 묻는 것이다. 그리고 기사는 이런 말로 계속된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살고 죽어야 할 땅은 이곳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자문자답하였다. 10시 12분 정각, 조인작업은 필하였다.”
‘기이한 전투의 정지’로부터 50년
그날 1953년 7월 27일은, 3년 넘게 무류(無類)의 동족상잔과 처절한 자해를 거듭한 한국전쟁이 ‘기이한 전투의 정지’로 일시 중단된 날이다. 꼭 50년이 지났다. 그때 아직 20대였던 최 기자는 이 기사를 쓴 5년 뒤 급박한 전쟁 상황이던 금문도(金門島) 취재 길에서 타고 있던 상륙용 주정(舟艇)이 침몰, 대만해협 격랑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는 한국전쟁을 취재한 종군기자들 중 전장에서 순직한 전몰기자가 17명이나 되는데 그 전원이 외국인이었던 것에 대해 ‘고마운 한편 부끄럽다’고 평소 자주 말하던 터였다. 마치, 그 빚 아닌 빚을 한국 기자를 대표해서 나 스스로 갚는다는 듯이, 그는 그렇게 취재 전선에서 산화하는 길을 찾아 걸었다.
기록을 보면 6?25 발발 당시 서울에는 전쟁 발발 제1보를 특종한 UP 통신의 재크 제임스 기자를 포함 4명의 외국인 기자가 있었다. AFP 모리스 샹텔룹 기자는 서울 철수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북한에 3년이나 억류됐다. 미군 참전과 함께 한국전선에 뛰어들기 시작한 외국 취재진은 7월 9일 INS 통신 레이 리차즈 기자가 첫 희생자가 된 것을 시작으로 7월 한 달에만 6명이 전사했다.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이 그런 것이고 위험에 몸을 던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가슴 한 쪽을 잡아당기는 무엇인가가 남는다. 최병우 기자의 휴전 조인식 기사에 나오는 ‘한국의 운명이 또 한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상황, 그리고 ‘내가 앉아 있는 이곳이 우리나라인가?’ 라는 자문(自問)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은 생각이 그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 우리의 운명이 남의 손으로 결정되고 농락되는 역사를 숱하게 보아 왔다. 제 운명의 속절없음을 멍청히 바라만 보는 ‘구경꾼’일 뿐이다.
지난 역사에서 그랬을 뿐 아니라 바로 지금 진행되는, 또는 다가오는 역사에서도 그러할 개연성이 높다. 내 땅에서 전쟁이 나도 나보다 남이 앞장서고, 당연히 내 일인데도 나는 알 필요도 없는 사람인 듯이 젖혀놓아지는 상황이라면 어찌 심각한 문제가 아닐 것인가.
정전체제 50년은 ‘전쟁도 평화도 아닌’ 그러나 ‘전쟁은 언제나 가까이 있고 평화는 언제나 아득히 먼’ 세월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과 그 평화는 시작과 끝이 모두 내 손 아닌 남의 손에 달렸다. 오로지 타율이다.
1994년에 실제로 진행됐던 한반도 핵전쟁 위기는 민족 절멸을 초래할 일촉즉발의 무시무시한 상황 전개였으나 한국은 대통령조차 손톱만한 정보도 없었다. 우리는 깜깜히 모른 사이 우리의 운명이 제 멋대로 굴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6·15 정신 폄하 … 더 멀어진 평화체제
그렇다면 지금 2003년 7월은 어떤가. 혹시라도 벌어지고 있을지 모를 전쟁의 음모, 전쟁 발발의 위협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 민족에게 닥쳐올 운명에 대해 우리는 대처할 능력, 대처할 방법이 있는 것일까.
한반도 문제에 대한 우리 자신의 주체적 접근과 해결은 2000년 6·15에 이룬 남북정상의 포옹으로 기적과도 같은 진전과 희망을 던져 주었으나, 그 희망이 오늘 어떻게 흠집이 나고 폄하되며 산산조각이 나고 있는지 현실은 차라리 눈물겹다. 50년 전 휴전협정 조인식장의 풍경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한 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역사에서 소외시키는 데 열심이다. 지금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요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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