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질서 위협하는 ‘선동정치’
임재경 언론인
재임중인 공직자의 불법과 비행을 추궁하여 그 책임을 묻는 것을 가리켜 탄핵이라 하지만 탄핵의 대상이 나라의 최고 공직자인 대통령일 때 비로소 이 말의 쓰임새가 명료하여지는 것은 많은 사람이 느끼는 바와 같다. 헌법 제65조가 규정한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 헌법재판소 재판관, 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 감사원장 등이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한 때에 국회가 단핵을 소추할 수 있다”는 조문의 앞 부분에 대통령이 올라있는 점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 수립이래 국회로부터 탄핵을 받은 대통령은 한 사람도 없을뿐더러 탄핵이 발의된 경우조차 없었다. 탄핵을 받을 만한 사유가 없어서? 천만의 말씀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빈번한 헌정 문란 행위는 이루 열거할 수 없으며 막판에 와서는 민주주의의 기본인 선거를 무의미하게 만든 가부장적 독재자였다. 박정희와 전두환, 이 두 사람으로 말하면 헌정을 총칼로 무너트린 장본인들인 터라 탄핵이란 말이 아까울 정도지만 굳이 탄핵의 사유를 들자면 수십, 수백 가지에 이를 것이다. 지난 군사 정권 하에서는 정치인, 학자, 언론인 누구를 막론하고 공석 상에서 ‘대통령 탄핵’을 입에 담았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붙들려가 밀실에서 우선 초주검을 당해야만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김두관 행자부장관의 해임건의안을 사실상 거부하자 한나라당 간부들이 “헌법 유린이다”, “탄핵을 검토하겠다”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은 것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이 변해도 많이 변했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대통령 ‘해임안’ 사실상 거부에 야당 ‘탄핵검토’
특히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60을 넘은 쪽이라 그들이 한창 활동할 시기에 일어난 유혈의 헌정유린 사례들을 잊어버릴 수 없을 터인데 어떻게 당치도 않은 극언을 퍼붓는지 정당정치의 본질이 이런것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시정의 왈패들끼리 상대방의 기를 꺾을 셈으로 한번 해보는 소리라면 몰라도 국회 다수당이 권위주의 타파를 내세운 취임 6개월의 대통령을 겨냥한 정치 수사(修辭)치고는 치졸하다 못하여 위험한 장난에 가까운 것이었다. 극언이나 극단적인 실력행사는 뜻한바 목적을 관철하기보다는 일이 꼬여 스스로 제 발목을 잡는 격이 비일비재하다. 이와 관련하여 한가지 흥미 있는 점은 노무현 대통령의 전반적으로 저조한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김행자 해임건의 강행 가결이 잘못되었다는 여론(52.8%)이 잘했다는 여론(23.4%)보다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이다(동아일보 9월 8일자). 무리한 정치 공세가 무리한 선동 레토릭을 수반하였고 마침내 여론의 역풍에 맞닥뜨렸다는 증거다.
김행자부장관 해임건의 잇슈, 크게는 ‘노무현 때리기’ 켐페인의 한 가닥인 거대 인쇄 매체의 극우적 언설 역시 선동 정치의 한계를 넘어 선 것을 우리는 주목한다. 우파 정치 논리의 선봉을 자임하는 어느 저널리스트는 그의 개인 홈페이지(www.chogapje.com)를 통해 ‘친북 비호 독재정권 타도는 합헌’이란 제목의 글에서 “...(김행자부장관)해임건의를 대통령이 거부하면 정권이 독재와 반역을 비호하는 것이며, ... 정권이 나서서 반역과 독재에 대한 국민의 합법적 대응의 길을 막으면 국민은 ..... 그런 정권을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고 ...거기에는 군인도 포함된다”고 하였다. 보편적 인권의 한 항목인 저항권을 민간인뿐만이 아니라 무장을 기본요건으로 하는 군인들도 행사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헌법이론상의 과제인지는 몰라도 5.16쿠데타와 전두환 쿠데타는 기본 인권으로서의 저항권 행사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더구나 이 시대의 맥락에서는 저항권 행사에 군인이 포함된다고 하는 발상자체가 무력반란의 정당성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논리라고 보아도 크게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시민단체 ‘쿠테타 선동’한 보수언론인 고발해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를 ‘일사불란’하게 막으려면 초법적인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를 부활시키고 검찰과 경찰을 그 수하에 두는 1970-80년대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민주의식이 높아질 대로 높아지고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이 시대에 그것이 당키나 한 소리인가. 군인 저항권론을 편 문제의 저날리스트는 어이없게도 시민단체가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하는 희화(farce)가 연출되었으므로 어찌 보면 논평의 대상거리도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선동적 언행의 웃음거리가 웃음거리로 끝나지 않는 역사적 경험이 지난 세기에 여러 차례 반복되었으니 뭇소리니와 히틀러의 경우가 그것이다. 실업자가 양산되고 탈권위주의에 올바르게 적응하지 못할 때 정치 의식이 미분화된 계층이 그 소극(笑劇)에 박수를 보낸 결과 극본을 실현하는 데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당은 정권창출 못지 않게 국민에게 민주시민으로서의 규범을 보이는 것이 중요한 책무이다.
임재경 언론인
재임중인 공직자의 불법과 비행을 추궁하여 그 책임을 묻는 것을 가리켜 탄핵이라 하지만 탄핵의 대상이 나라의 최고 공직자인 대통령일 때 비로소 이 말의 쓰임새가 명료하여지는 것은 많은 사람이 느끼는 바와 같다. 헌법 제65조가 규정한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 헌법재판소 재판관, 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 감사원장 등이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한 때에 국회가 단핵을 소추할 수 있다”는 조문의 앞 부분에 대통령이 올라있는 점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 수립이래 국회로부터 탄핵을 받은 대통령은 한 사람도 없을뿐더러 탄핵이 발의된 경우조차 없었다. 탄핵을 받을 만한 사유가 없어서? 천만의 말씀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빈번한 헌정 문란 행위는 이루 열거할 수 없으며 막판에 와서는 민주주의의 기본인 선거를 무의미하게 만든 가부장적 독재자였다. 박정희와 전두환, 이 두 사람으로 말하면 헌정을 총칼로 무너트린 장본인들인 터라 탄핵이란 말이 아까울 정도지만 굳이 탄핵의 사유를 들자면 수십, 수백 가지에 이를 것이다. 지난 군사 정권 하에서는 정치인, 학자, 언론인 누구를 막론하고 공석 상에서 ‘대통령 탄핵’을 입에 담았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붙들려가 밀실에서 우선 초주검을 당해야만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김두관 행자부장관의 해임건의안을 사실상 거부하자 한나라당 간부들이 “헌법 유린이다”, “탄핵을 검토하겠다”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은 것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이 변해도 많이 변했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대통령 ‘해임안’ 사실상 거부에 야당 ‘탄핵검토’
특히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60을 넘은 쪽이라 그들이 한창 활동할 시기에 일어난 유혈의 헌정유린 사례들을 잊어버릴 수 없을 터인데 어떻게 당치도 않은 극언을 퍼붓는지 정당정치의 본질이 이런것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시정의 왈패들끼리 상대방의 기를 꺾을 셈으로 한번 해보는 소리라면 몰라도 국회 다수당이 권위주의 타파를 내세운 취임 6개월의 대통령을 겨냥한 정치 수사(修辭)치고는 치졸하다 못하여 위험한 장난에 가까운 것이었다. 극언이나 극단적인 실력행사는 뜻한바 목적을 관철하기보다는 일이 꼬여 스스로 제 발목을 잡는 격이 비일비재하다. 이와 관련하여 한가지 흥미 있는 점은 노무현 대통령의 전반적으로 저조한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김행자 해임건의 강행 가결이 잘못되었다는 여론(52.8%)이 잘했다는 여론(23.4%)보다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이다(동아일보 9월 8일자). 무리한 정치 공세가 무리한 선동 레토릭을 수반하였고 마침내 여론의 역풍에 맞닥뜨렸다는 증거다.
김행자부장관 해임건의 잇슈, 크게는 ‘노무현 때리기’ 켐페인의 한 가닥인 거대 인쇄 매체의 극우적 언설 역시 선동 정치의 한계를 넘어 선 것을 우리는 주목한다. 우파 정치 논리의 선봉을 자임하는 어느 저널리스트는 그의 개인 홈페이지(www.chogapje.com)를 통해 ‘친북 비호 독재정권 타도는 합헌’이란 제목의 글에서 “...(김행자부장관)해임건의를 대통령이 거부하면 정권이 독재와 반역을 비호하는 것이며, ... 정권이 나서서 반역과 독재에 대한 국민의 합법적 대응의 길을 막으면 국민은 ..... 그런 정권을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고 ...거기에는 군인도 포함된다”고 하였다. 보편적 인권의 한 항목인 저항권을 민간인뿐만이 아니라 무장을 기본요건으로 하는 군인들도 행사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헌법이론상의 과제인지는 몰라도 5.16쿠데타와 전두환 쿠데타는 기본 인권으로서의 저항권 행사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더구나 이 시대의 맥락에서는 저항권 행사에 군인이 포함된다고 하는 발상자체가 무력반란의 정당성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논리라고 보아도 크게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시민단체 ‘쿠테타 선동’한 보수언론인 고발해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를 ‘일사불란’하게 막으려면 초법적인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를 부활시키고 검찰과 경찰을 그 수하에 두는 1970-80년대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민주의식이 높아질 대로 높아지고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이 시대에 그것이 당키나 한 소리인가. 군인 저항권론을 편 문제의 저날리스트는 어이없게도 시민단체가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하는 희화(farce)가 연출되었으므로 어찌 보면 논평의 대상거리도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선동적 언행의 웃음거리가 웃음거리로 끝나지 않는 역사적 경험이 지난 세기에 여러 차례 반복되었으니 뭇소리니와 히틀러의 경우가 그것이다. 실업자가 양산되고 탈권위주의에 올바르게 적응하지 못할 때 정치 의식이 미분화된 계층이 그 소극(笑劇)에 박수를 보낸 결과 극본을 실현하는 데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당은 정권창출 못지 않게 국민에게 민주시민으로서의 규범을 보이는 것이 중요한 책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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