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분황사를 지나 감포 쪽으로 가는 4번 국도를 타면 길은 이내 굴곡이 심한 산길로 접어든
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길은 아주 편해졌다. 꼬불꼬불한 추령고개 밑으로 터널이 뚫렸고, 가파르고
굴곡이 심한 내리막길에는 고가도로가 놓였다.
해풍이 불 때면 동해바다 내음이 밀려드는 이 길은 대종천을 따라 대왕암까지 이어진다. 양북면 삼거
리에서 감포 방면 4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 14번 국도로 들어서면 표지판에 ‘대왕암·감은사 방
면’이란 안내문이 보인다.
대종천 옆으로 길게 뻗은 929번 지방도를 5분쯤 달리다 보면 왼쪽으로 우뚝 솟은 2개의 탑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3층석탑
바로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다. 지붕돌 옥개받침은 의성 탑리오층석탑을, 낙수면은 부
여 정림사지탑을 계승한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그 축조형식에서 우리나라 삼층석탑의 전형을 이루어
낸 선구적인 탑이다.
미륵사지탑과 정림사지탑으로 대표되는 백제계 석탑과 분황사탑으로 대표되는 신라계 석탑은 삼국통
일을 맞아 한국 석탑의 이른바 전형 양식을 낳았으니, 그 예로 먼저 경주 감은사지 동서석탑을 들
수 있다. … 이 탑에서 얻어진 일반적 양식은 우리나라 석탑의 전통을 이루고 길이 후대까지 계승되
었다.
― 황수영. <불교와 건축="">. 《황수영전집》
화강암 상하 2층 기단 위에 3층으로 축조된 이 탑은 총 높이 13m로 우리나라 삼층석탑 가운데 가장 크
고 웅장하고 장대하다. 규모가 너무 큰 나머지 몸돌과 지붕돌을 하나의 돌이 아니라 여러개의 석재
를 조립해서 축조했고 탑몸 안쪽은 잡석과 흙으로 채웠다.
금당터 양쪽에 1300년 동안 흔들림 없이 떡 버티고 선 이 두 개의 삼층석탑은 삼국을 통일한 옛 신라
인들의 웅혼한 기상을 그대로 말해준다.
중국의 전탑, 한국의 석탑, 일본의 목탑
탑(塔)은 원래 고대 인도에서 전해내려오던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인도인들은 불교가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탑을 쌓았는데, 기원전 5세기경 석가가 입적하자 탑을 쌓아 그의 진신사리를 모셨다. 그후 탑
의 의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한 하나의 기념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탑 조성 풍습은 불교의 동진(東進)과 함께 중국과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이어졌다. 그러
나 탑 조성 방법과 양식은 나라마다 달랐다.
진흙이 풍부한 중국에서 ‘전탑’(塼塔:흙벽돌로 쌓은 탑)이 많이 지어졌다면 양질의 화강암이 널려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석탑’이 지어졌다. 화산섬이라 진흙도 좋은 석재도 없는 일본에서는
풍부한 나무를 소재로 한 ‘목탑’이 유행하게 된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백제의 경우 익산 <미륵사지 서탑="">과 부여 <>
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이 있고, 신라의 경우 경주 분황사탑(국보 30호)과 의성 탑리(塔里) 5층석탑
(국보 제 77호) 등이 있다.
이들 백제계 석탑과 신라계 석탑은 하나로 합쳐지면서 한국 석탑으로서 독특한 양식을 이루게 된다.
새로운 시대는 바로 삼국통일의 역사(서기 668년)이다. 바로 이 시기에 경주 양북면 감은사 터의 동
서 3층탑과 경주시 암곡리 고선사 터의 3층탑이 탄생하는 것이다.
도괴범이 폭파한 장항리석탑
감은사에서 대왕암을 보고 다시 경주로 오는 길, 토함산 동쪽 기슭 장항리에는 이름 모를 절터가 하
나 있다.(4번 국도변에서 ‘장항리사지 입구’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 호젓한 절터에는 불대좌가 중앙에 자리잡은 금당터와 오층석탑 2기가 남아 있어 답사객을 반겨준
다. 그러나 지붕돌만 쌓여 있는 동탑과 석조여래가 사라진 불대좌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는 1923년 도괴범이 사리를 훔치기 위해 탑을 폭파했기 때문이다.
장항리 오층석탑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개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8세기 중엽 이후 석탑
의 전형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일제 때 복원된 서탑과는 달리 동탑은 1966년에야 대종천
일대에서 겨우 지붕돌만 수습되어 복원되었다.
산산조각이 난 장항사터 석조여래는 시멘트로 붙인 흉한 모습으로 경주박물관 뜰에 놓여 있다. 경주
박물관 뜰에는 감은사탑과 함께 우리나라 삼층석탑의 전형이 된 고선사지 3층석탑도 옮겨져 있다.
해체복원 시작된 미륵사지 서탑
이제 발걸음을 백제로 돌려보자. 익산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뜰을 지나 잘 정비된 절터 안으로 들어가
면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었던 세월의 무게를 증언하듯 힘겹게 서 있는 미륵사지 서탑이 나타난다.
‘천년도 넘는 세월 뒤 이제야 나를 찾아왔구려’ 하고 빙그레 미소짓는 서탑은 현존하는 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년부터 해체에 들어가는 미륵사지 서탑은 오랜 세월 비바람과 엉터리 보수의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당당하고 날렵하며 아름답다. 그것은 이 탑이 경쾌하고 날렵한 모습의 목탑 구조를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돌을 뼈대식으로 걸쳐올린 탑이기 때문에 목구조 기법에서 출발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처마받침돌이 쌓기식과 유사하다고 해서 경주 분황사탑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굵
직하게 3단으로 평행고임한 기법은 고구려 고분의 구조기법과 완전히 동일함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 명지대 건축학과 김홍식 교수
석탑 해체는 준비 작업이 모두 끝나는 내년부터 착수되어 2007년까지 복원 공사를 마치게 되며 이를
위한 총사업비로 80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현재 6층까지 남아 있는 탑을 해체한 후 현 상태로 복원
할 것인지, 새로운 부자재를 넣어 원형인 9층으로 복원할 것인지는 ‘미륵사지 석탑 해체복원 소위원
회’의 추후 결정을 따른다고 한다.
법륭사 5층목탑의 비례치와 완전히 일치
부여 정림사지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목탑계 석탑의 전형을 만나게 된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미륵
사지탑에서 한걸음 발전하여 돌 고유의 소재 성격을 살려서 설계한 것이다.
명지대 건축학과 김홍식 교수는 “정림사지탑은 부여시기 백제 고분의 내부 모를 죽이는 세모꼴 받
침기법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라며 “어떤 기법도 갑자기 탄생하는 것은 없으며 기존의 구법이 새
롭게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분석한다.
정림사지탑은 탑의 비례가 정연하며 일본 법륭사(法隆寺) 5층목탑의 비례치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
에서 더욱 유명하다. 이 두 탑은 모두 고구려자(尺)를 썼으며 아래 위 대응층의 탑몸 너비의 합이 같
다. 또한 매층 탑몸 너비의 합이 탑의 총 높이와 같게 계획되었다.
이는 법륭사 5층 목탑이 백제계 목탑임을 말해주는 것이고 거꾸로 정림사지탑이 이같은 기존 목탑의
비례치를 이용해서 만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글 사진 남준기 ·익산 소문관 기자 jknam@naeil.com mkso@naeil.com정림사지>미륵사지>불교와>
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길은 아주 편해졌다. 꼬불꼬불한 추령고개 밑으로 터널이 뚫렸고, 가파르고
굴곡이 심한 내리막길에는 고가도로가 놓였다.
해풍이 불 때면 동해바다 내음이 밀려드는 이 길은 대종천을 따라 대왕암까지 이어진다. 양북면 삼거
리에서 감포 방면 4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 14번 국도로 들어서면 표지판에 ‘대왕암·감은사 방
면’이란 안내문이 보인다.
대종천 옆으로 길게 뻗은 929번 지방도를 5분쯤 달리다 보면 왼쪽으로 우뚝 솟은 2개의 탑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3층석탑
바로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다. 지붕돌 옥개받침은 의성 탑리오층석탑을, 낙수면은 부
여 정림사지탑을 계승한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그 축조형식에서 우리나라 삼층석탑의 전형을 이루어
낸 선구적인 탑이다.
미륵사지탑과 정림사지탑으로 대표되는 백제계 석탑과 분황사탑으로 대표되는 신라계 석탑은 삼국통
일을 맞아 한국 석탑의 이른바 전형 양식을 낳았으니, 그 예로 먼저 경주 감은사지 동서석탑을 들
수 있다. … 이 탑에서 얻어진 일반적 양식은 우리나라 석탑의 전통을 이루고 길이 후대까지 계승되
었다.
― 황수영. <불교와 건축="">. 《황수영전집》
화강암 상하 2층 기단 위에 3층으로 축조된 이 탑은 총 높이 13m로 우리나라 삼층석탑 가운데 가장 크
고 웅장하고 장대하다. 규모가 너무 큰 나머지 몸돌과 지붕돌을 하나의 돌이 아니라 여러개의 석재
를 조립해서 축조했고 탑몸 안쪽은 잡석과 흙으로 채웠다.
금당터 양쪽에 1300년 동안 흔들림 없이 떡 버티고 선 이 두 개의 삼층석탑은 삼국을 통일한 옛 신라
인들의 웅혼한 기상을 그대로 말해준다.
중국의 전탑, 한국의 석탑, 일본의 목탑
탑(塔)은 원래 고대 인도에서 전해내려오던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인도인들은 불교가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탑을 쌓았는데, 기원전 5세기경 석가가 입적하자 탑을 쌓아 그의 진신사리를 모셨다. 그후 탑
의 의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한 하나의 기념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탑 조성 풍습은 불교의 동진(東進)과 함께 중국과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이어졌다. 그러
나 탑 조성 방법과 양식은 나라마다 달랐다.
진흙이 풍부한 중국에서 ‘전탑’(塼塔:흙벽돌로 쌓은 탑)이 많이 지어졌다면 양질의 화강암이 널려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석탑’이 지어졌다. 화산섬이라 진흙도 좋은 석재도 없는 일본에서는
풍부한 나무를 소재로 한 ‘목탑’이 유행하게 된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백제의 경우 익산 <미륵사지 서탑="">과 부여 <>
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이 있고, 신라의 경우 경주 분황사탑(국보 30호)과 의성 탑리(塔里) 5층석탑
(국보 제 77호) 등이 있다.
이들 백제계 석탑과 신라계 석탑은 하나로 합쳐지면서 한국 석탑으로서 독특한 양식을 이루게 된다.
새로운 시대는 바로 삼국통일의 역사(서기 668년)이다. 바로 이 시기에 경주 양북면 감은사 터의 동
서 3층탑과 경주시 암곡리 고선사 터의 3층탑이 탄생하는 것이다.
도괴범이 폭파한 장항리석탑
감은사에서 대왕암을 보고 다시 경주로 오는 길, 토함산 동쪽 기슭 장항리에는 이름 모를 절터가 하
나 있다.(4번 국도변에서 ‘장항리사지 입구’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 호젓한 절터에는 불대좌가 중앙에 자리잡은 금당터와 오층석탑 2기가 남아 있어 답사객을 반겨준
다. 그러나 지붕돌만 쌓여 있는 동탑과 석조여래가 사라진 불대좌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는 1923년 도괴범이 사리를 훔치기 위해 탑을 폭파했기 때문이다.
장항리 오층석탑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개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8세기 중엽 이후 석탑
의 전형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일제 때 복원된 서탑과는 달리 동탑은 1966년에야 대종천
일대에서 겨우 지붕돌만 수습되어 복원되었다.
산산조각이 난 장항사터 석조여래는 시멘트로 붙인 흉한 모습으로 경주박물관 뜰에 놓여 있다. 경주
박물관 뜰에는 감은사탑과 함께 우리나라 삼층석탑의 전형이 된 고선사지 3층석탑도 옮겨져 있다.
해체복원 시작된 미륵사지 서탑
이제 발걸음을 백제로 돌려보자. 익산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뜰을 지나 잘 정비된 절터 안으로 들어가
면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었던 세월의 무게를 증언하듯 힘겹게 서 있는 미륵사지 서탑이 나타난다.
‘천년도 넘는 세월 뒤 이제야 나를 찾아왔구려’ 하고 빙그레 미소짓는 서탑은 현존하는 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년부터 해체에 들어가는 미륵사지 서탑은 오랜 세월 비바람과 엉터리 보수의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당당하고 날렵하며 아름답다. 그것은 이 탑이 경쾌하고 날렵한 모습의 목탑 구조를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돌을 뼈대식으로 걸쳐올린 탑이기 때문에 목구조 기법에서 출발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처마받침돌이 쌓기식과 유사하다고 해서 경주 분황사탑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굵
직하게 3단으로 평행고임한 기법은 고구려 고분의 구조기법과 완전히 동일함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 명지대 건축학과 김홍식 교수
석탑 해체는 준비 작업이 모두 끝나는 내년부터 착수되어 2007년까지 복원 공사를 마치게 되며 이를
위한 총사업비로 80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현재 6층까지 남아 있는 탑을 해체한 후 현 상태로 복원
할 것인지, 새로운 부자재를 넣어 원형인 9층으로 복원할 것인지는 ‘미륵사지 석탑 해체복원 소위원
회’의 추후 결정을 따른다고 한다.
법륭사 5층목탑의 비례치와 완전히 일치
부여 정림사지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목탑계 석탑의 전형을 만나게 된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미륵
사지탑에서 한걸음 발전하여 돌 고유의 소재 성격을 살려서 설계한 것이다.
명지대 건축학과 김홍식 교수는 “정림사지탑은 부여시기 백제 고분의 내부 모를 죽이는 세모꼴 받
침기법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라며 “어떤 기법도 갑자기 탄생하는 것은 없으며 기존의 구법이 새
롭게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분석한다.
정림사지탑은 탑의 비례가 정연하며 일본 법륭사(法隆寺) 5층목탑의 비례치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
에서 더욱 유명하다. 이 두 탑은 모두 고구려자(尺)를 썼으며 아래 위 대응층의 탑몸 너비의 합이 같
다. 또한 매층 탑몸 너비의 합이 탑의 총 높이와 같게 계획되었다.
이는 법륭사 5층 목탑이 백제계 목탑임을 말해주는 것이고 거꾸로 정림사지탑이 이같은 기존 목탑의
비례치를 이용해서 만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글 사진 남준기 ·익산 소문관 기자 jknam@naeil.com mkso@naeil.com정림사지>미륵사지>불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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