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치매극복의 날 유공자 표창 받은 행신동 김남호씨
“부모 모시는 일 당연한데 상을 주시니 부끄럽지요”
김남호(54)씨는 지난 9월 19일 치매 극복의 날을 기념해 보건복지부가 주관하는 제7회 치매극복의 날 행사에서 유공차 표창으로 보건복지부장관상을 받았다.
약 3년 동안 장모님인 고 윤모 어르신을 등에 업어 노인보호센터에 등하원 시키는 등 지극한 효심을 곁에서 지켜 본 은빛사랑채 고양노인주야간보호센터 직원들의 적극적인 추천 때문이었다.
장모가 치매를 얻은 후 셋째 사위로 4년 동안 모신 김남호씨는 그러나 인터뷰도 쑥스럽다며 손을 저었다. 두 달 전 돌아가신 일이 아직도 실감나지 않아 길을 걷다가도 문득 놀라곤 한다는 김남호씨. 치매로 고통 받고 있거나 앞으로 겪게 될지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용기를 내 달라는 설득 끝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부모님 모신 일 후회 없어
어떻게 장모를 4년이나 모실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바로 나온 말은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요”라는 대답이었다.
전라남도 장성이 고향인 김남호씨는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 속에 자랐다. 위로 누나가 셋 있는 귀한 손자라고 할머니는 김씨를 바닥에 발 닿을 새 없이 안고 키웠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손자를 안고 기도를 쉼 없이 읊조렸단다. 할머니의 신앙은 손자에게도 전해져 일요일이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도 지게를 그대로 놓고 예배를 보러 갔다.
군대에서는 이등병시절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수도 없이 맞았다. 택시기사를 한 후에는 사납금을 자기 돈으로 내면서 일요일 예배를 빠지지 않았다.
“성경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이 있잖아요. 전에 저희 아버지도 15년을 모시고 살았는데 마지막 석 달은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어요. 4년 쉬고 나니 장모님이 오셨어요. 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것 같아요.”
김씨의 어머니는 23년 전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가신 후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가슴에 사무쳤던 그는 아버지에게는 못다 한 효도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겪어보니 무서운 치매
투박하지만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김남호씨. 아버지 15년에 장모 4년을 합하면 19년이다.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부모를 모셨는데 힘들지 않았을까.
“치매를 겪어보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에요. 듣기만 했는데 막상 모시니까 무섭긴 무서웠어요.”
장인이 7년 전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혼자되신 김남호씨의 장모 고 윤모 어르신은 6년 전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4년 전 김씨의 집에 왔을 때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수시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돌아다녔다. 첫 일 년은 김씨의 아내가 미용사 일을 쉬고 돌보다 2년째부터 보호센터를 이용하게 됐다.
“형제간에 모였을 때도 요양원 얘기가 나왔어요. 어머님이 말씀을 알아들으시면 요양원에 모실까요 여쭤볼 수 있는데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보내요. 애들도 할머니 요양원에 보내지 말자고 했어요.”
부인이 아침 10시까지 어머니를 돌보고 출근하면 택시기사로 새벽 근무를 마친 김씨가 12시에 들어와 장모를 주야간보호센터에 등원시켰다. 여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김씨는 “치매 환자가 있을 땐 몸으로 힘을 써야 하는 일이 많이 생긴다. 남자들의 협조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족들의 협조 절실한 치매
장모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고 주야간보호센터에서도 돌볼 수 있는 한계치까지 다다랐지만 김씨 부부의 효심에 3년 가까이 돌봐주었다고 한다.
집이 2층인데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김씨는 장모를 업거나 부축해 계단을 오르내렸다. 김씨는 “41kg의 장모님이지만 힘이 없으니 70~80kg처럼 느껴졌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두 달 동안 누워만 계실 때는 목욕을 하루 세 번 까지도 시켜야 했어요. 살이 없이 뼈하고 가죽만 남은 몸에 욕창이 생겨 두 시간에 한 번은 운동도 해야 했고 소독도 하루 두세 번은 했어요.”
지난 8월, 장모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모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고 윤모 어르신은 자녀들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큰 딸부터 한사람씩 말없이 바라보던 어르신은 잠시 후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 때 우리 어머니 돌아가실 때 보다 더 많이 울었어요. 얼마나 서럽던지. 지금도 돌아가신 게 실감이 안 나고 유품도 그대로 보관하고 있어요.”
4년 동안 장모를 모시면서 정이 많이 들었다는 김씨. 한이 남지 않도록 효도를 다 하고 싶었고 네 분의 부모 중 두 분의 임종을 지켰지만 그래도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게 후회로 남는단다.
“자식이 아파도 부모는 버리지 않잖아요. 모실 때 까지 모시고 정 안되면 요양원에 가더라도 처음부터 보내는 건 좀 그렇죠. 낳아주신 부모님인데.”
이향지 리포터 greengreen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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