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남북공동선언의 허와 실
김근식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4년을 맞는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성사 자체만으로도 역사적 상징성을 갖는 것이었다. 분단 이후 대결과 반목으로 점철되었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서로 적성국가로 간주되던 양 정상이 활짝 웃으면서 포옹한 사실만으로도 남북화해 시대는 그 첫발을 디딘 것으로 평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합의하고 서명한 ‘6·15 공동선언’의 결과물에 비한다면 만남 그 자체의 성과는 여전히 부족해 보였다. 자주의 원칙과 통일방안의 공통성 인정 등 총론적인 합의 외에도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 및 다방면적 교류 그리고 당국간 대화의 정례화 등을 명시한 6.15 공동선언의 내용들은 남북간의 상시적 긴장과 갈등 대신 평화를, 불신과 대결 대신 화해를, 소모적 경쟁 대신 협력을 이루기 위한 실행가능한 구체적 원칙들을 합의한 것이었다. 결국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은 상호 체제인정과 이를 토대로 한 평화공존의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적대와 대결의 남북관계 대신 화해와 공존의 남북관계가 개막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6.15 공동선언의 시민적 ‘힘’은 더욱 강력해지고 있음을 여기저기서 목도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남측 시민사회에서 6.15의 힘은 확대일로에 있다. 정상회담 이후 진행된 남북한간 교류협력의 진전과 민족화해의 가속화는 지난 2002년 대선에서 한반도 평화세력의 정치적 승리를 결과했고 최근 4.15 총선에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민족화해세력의 의회 내 다수확보라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했다. 정상회담 이후에도 이른바 남남갈등의 여진은 지속되었지만 시대의 흐름은 결국 냉전적 대결을 뒤로 하고 화해와 협력의 방향에 손을 들어 주었다.
군사회담 개성공단 조성, 남북화해 물꼬터
최근 용천 폭발사고 이후 북한주민을 돕자는 운동이 여야,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은 6.15의 시민적 힘이 이제 되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았음을 실감케 하는 사례이다.
또한 6.15의 힘은 남북관계 전반의 질적 발전과 함께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실질적 진전을 가능케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발휘되고 있다. 정상회담 이후 14차례의 장관급회담과 9차례의 경추위 회담이 진행되면서 이제 당국간 회담은 정례화와 제도화의 단계에 들어섰고 민간차원의 다방면적 교류협력 역시 구체적인 내용을 다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획기적 진전을 이루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남북경협의 활성화는 물론이고 남북간 철도 도로 연결과 개성공단 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음 역시 한반도 경제공동체의 앞날을 밝게 하는 청신호임에 분명하다. 특히 최근의 남북장성급회담 개최를 통해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의 첫 걸음을 떼고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의 가능성을 마련한 것은 6.15 이후 남북관계가 평화와 번영의 두 수레바퀴로 진전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계기라 할 것이다. 2000년 당시 6.15 공동선언에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내용이 누락되었음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최근 장성급회담에서의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 합의는 분명 6.15의 힘이 화해협력을 넘어 평화정착에까지 확대될 가능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다른 한편 6.15의 힘은 냉전시기 지속되었던 한반도 질서의 변화가능성을 추동한다는 점에서 작용과 반작용의 내홍을 겪고 있기도 하다. 6.15가 남북이 주도적으로 나서 민족화해의 전기를 마련한 점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여전히 한반도 국제질서의 차원에서는 과거의 힘과 새로운 힘이 맞부딪치는 과도기에 놓여 있다. 남북관계의 의미있는 진전에도 불구하고 북미관계는 답보상태일 뿐 아니라 2차 북핵위기 이후 북미갈등이 첨예화되면서 남북관계도 상당한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북미갈등 한미동맹 변화 6.15로 극복을
물론 북핵위기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긴장을 막고 위기를 관리하는 토대가 6.15의 힘에서 비롯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냉전적 국제질서는 한반도의 역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장애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북미간 갈등의 존속과 더불어 한미관계의 불안정성이 남아 있는 것 역시 6.15의 힘에 대한 또 하나의 반작용이다. 6.15의 성과에 따라 남북관계의 개선과 한반도 화해의 진전이 이루어지면서 한미동맹의 내용과 수준에 일정한 변화가 요구되는 것은 분명 6.15가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의미가 숫자로 표현되는 날짜에 역사적으로 녹아져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5.16이 상징하는 군사독재의 어두운 그림자가 5.18로 대표되는 민주화의 진전으로 해소될 수 있기까지는 20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마찬가지로 6.25가 상징하는 분단과 적대의 역사가 6.15를 통해 화해와 통일의 방향으로 물꼬를 트는 데도 반세기가 필요했다. 이제 6.15 4돌을 맞으면서 우리가 보다 확산된 6.15의 힘을 기대하는 것도 바로 역사적 대세이기 때문이다.
김근식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4년을 맞는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성사 자체만으로도 역사적 상징성을 갖는 것이었다. 분단 이후 대결과 반목으로 점철되었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서로 적성국가로 간주되던 양 정상이 활짝 웃으면서 포옹한 사실만으로도 남북화해 시대는 그 첫발을 디딘 것으로 평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합의하고 서명한 ‘6·15 공동선언’의 결과물에 비한다면 만남 그 자체의 성과는 여전히 부족해 보였다. 자주의 원칙과 통일방안의 공통성 인정 등 총론적인 합의 외에도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 및 다방면적 교류 그리고 당국간 대화의 정례화 등을 명시한 6.15 공동선언의 내용들은 남북간의 상시적 긴장과 갈등 대신 평화를, 불신과 대결 대신 화해를, 소모적 경쟁 대신 협력을 이루기 위한 실행가능한 구체적 원칙들을 합의한 것이었다. 결국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은 상호 체제인정과 이를 토대로 한 평화공존의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적대와 대결의 남북관계 대신 화해와 공존의 남북관계가 개막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6.15 공동선언의 시민적 ‘힘’은 더욱 강력해지고 있음을 여기저기서 목도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남측 시민사회에서 6.15의 힘은 확대일로에 있다. 정상회담 이후 진행된 남북한간 교류협력의 진전과 민족화해의 가속화는 지난 2002년 대선에서 한반도 평화세력의 정치적 승리를 결과했고 최근 4.15 총선에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민족화해세력의 의회 내 다수확보라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했다. 정상회담 이후에도 이른바 남남갈등의 여진은 지속되었지만 시대의 흐름은 결국 냉전적 대결을 뒤로 하고 화해와 협력의 방향에 손을 들어 주었다.
군사회담 개성공단 조성, 남북화해 물꼬터
최근 용천 폭발사고 이후 북한주민을 돕자는 운동이 여야,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은 6.15의 시민적 힘이 이제 되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았음을 실감케 하는 사례이다.
또한 6.15의 힘은 남북관계 전반의 질적 발전과 함께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실질적 진전을 가능케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발휘되고 있다. 정상회담 이후 14차례의 장관급회담과 9차례의 경추위 회담이 진행되면서 이제 당국간 회담은 정례화와 제도화의 단계에 들어섰고 민간차원의 다방면적 교류협력 역시 구체적인 내용을 다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획기적 진전을 이루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남북경협의 활성화는 물론이고 남북간 철도 도로 연결과 개성공단 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음 역시 한반도 경제공동체의 앞날을 밝게 하는 청신호임에 분명하다. 특히 최근의 남북장성급회담 개최를 통해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의 첫 걸음을 떼고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의 가능성을 마련한 것은 6.15 이후 남북관계가 평화와 번영의 두 수레바퀴로 진전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계기라 할 것이다. 2000년 당시 6.15 공동선언에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내용이 누락되었음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최근 장성급회담에서의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 합의는 분명 6.15의 힘이 화해협력을 넘어 평화정착에까지 확대될 가능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다른 한편 6.15의 힘은 냉전시기 지속되었던 한반도 질서의 변화가능성을 추동한다는 점에서 작용과 반작용의 내홍을 겪고 있기도 하다. 6.15가 남북이 주도적으로 나서 민족화해의 전기를 마련한 점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여전히 한반도 국제질서의 차원에서는 과거의 힘과 새로운 힘이 맞부딪치는 과도기에 놓여 있다. 남북관계의 의미있는 진전에도 불구하고 북미관계는 답보상태일 뿐 아니라 2차 북핵위기 이후 북미갈등이 첨예화되면서 남북관계도 상당한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북미갈등 한미동맹 변화 6.15로 극복을
물론 북핵위기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긴장을 막고 위기를 관리하는 토대가 6.15의 힘에서 비롯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냉전적 국제질서는 한반도의 역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장애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북미간 갈등의 존속과 더불어 한미관계의 불안정성이 남아 있는 것 역시 6.15의 힘에 대한 또 하나의 반작용이다. 6.15의 성과에 따라 남북관계의 개선과 한반도 화해의 진전이 이루어지면서 한미동맹의 내용과 수준에 일정한 변화가 요구되는 것은 분명 6.15가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의미가 숫자로 표현되는 날짜에 역사적으로 녹아져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5.16이 상징하는 군사독재의 어두운 그림자가 5.18로 대표되는 민주화의 진전으로 해소될 수 있기까지는 20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마찬가지로 6.25가 상징하는 분단과 적대의 역사가 6.15를 통해 화해와 통일의 방향으로 물꼬를 트는 데도 반세기가 필요했다. 이제 6.15 4돌을 맞으면서 우리가 보다 확산된 6.15의 힘을 기대하는 것도 바로 역사적 대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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