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민족자주를 추구하고 살맛나는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제시한 80년 5월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근식 교수(48·서울대 사회학·사진)는 5월 광주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기억 속에서 지워지거나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위해서는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필요하다고 했다. 80년 5월 기억의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 기억의 현재 의미를 끊임없이 재현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 그는 그러한 ‘기억투쟁’으로서 5월 문화운동에 무게를 두었다.
◆ 5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근식 교수는 “95년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의 제정 이후 5월 운동은 제도권내에 포섭되면서 진상규명을 넘어선 문화운동의 중요성이 대두됐다”고 말했다.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고 97년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으며 이어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 2000년 5·18 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 5월 운동에는 전환점이 왔다. 그 기간 동안 5월 진상규명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문화운동의 과제가 부각됐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 사건은 기억 그 자체로서보다 예술작품으로 형상화되어 사람들 눈앞에 재현될 때 새로운 힘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24주년 기념일을 맞는 2004년 5월 18일. 80년 5월을 겪은 이들이 24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넘어 5월 광주를 현재에 되살리는 문화운동은 또 하나의 투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하에 정근식 교수는 한국민주화 운동에서 차지하는 문화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재평가하면서 제주 4·3연구소와 공동연구를 통해 민주화 과정에 있어서의 문화운동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연구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광주와 제주를 오가면서 연구의 방향과 분석틀에 관해 토론했다. 2003년 5월에는 광주에서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연구성과를 점검했으며 이 결과물이 ‘기억투쟁과 문화운동의 전개’라는 연구서로 지난 5월 1일 빛을 봤다.
◆ 기억투쟁으로서의 문화운동 =정교수는 “5월 문화운동은 검열을 의식하면서도 진상규명을 치열하게 지향하였다는 특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5·18의 역사적 무게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은 그 부담에 짓눌려 자유로운 상상력을 접고 사실적 재현에 경도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작풍의 형성과정과 이를 통한 작품이 제대로 수집되지도 못하고 있다”며 “문화운동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제대로 된 자료수집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여줄 수 있는 문화운동자료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도 도청이전과 동시에 만들어지는 5·18 기념관의 내부적 컨텐츠 구축도 예산이 부족하여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문화운동 자료관의 설립은 요원하다”고 안타까워했다. 정근식 교수는 서울대 사회학과 76학번이다. 동시대 지식인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80년 5월의 부채를 삶에 짊어지고 살아왔다고 한다.
“대학원 다닐 때 광주 학살의 소식을 듣고 고통스러워했지만 중심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85년 전남대에 부임한 이후부터 ‘살아남은 자’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기 시작했다고 봐야죠.”
정근식 교수는 1985년 전남대에 부임한 이후 5·18민중항쟁, 영호남 지역감정, 문화도시 육성 등 지역현안을 연구주제로 천착하며 120여편의 논문과 저서를 발표해왔다. 특히 그는 지난 88년 송기숙교수(68·전남대 명예교수)가 금남로 부근에 설립한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에서 일하면서 ‘광주 5월 민중항쟁 사료전집’을 꾸리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현대사사료연구소는 96년 재정난으로 전남대 5·18연구소로 업무를 이관했다.이후 정근식 교수는 2000년부터 지금까지 5·18 연구소가 발간하는 잡지 ‘민주주의와 인권’의 편집위원장을 맡아오고 있다.
“5월이 연구주제로서 점차 인기를 잃어가자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해나갈 연구원들이 부족하다는 것이 저의 고민입니다.”
정근식 교수는 지난해 7월 서울대로 자리를 옮기면서도 5월 광주에 대한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박정미 기자 pjm@naeil.com
정근식 교수(48·서울대 사회학·사진)는 5월 광주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기억 속에서 지워지거나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위해서는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필요하다고 했다. 80년 5월 기억의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 기억의 현재 의미를 끊임없이 재현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 그는 그러한 ‘기억투쟁’으로서 5월 문화운동에 무게를 두었다.
◆ 5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근식 교수는 “95년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의 제정 이후 5월 운동은 제도권내에 포섭되면서 진상규명을 넘어선 문화운동의 중요성이 대두됐다”고 말했다.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고 97년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으며 이어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 2000년 5·18 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 5월 운동에는 전환점이 왔다. 그 기간 동안 5월 진상규명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문화운동의 과제가 부각됐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 사건은 기억 그 자체로서보다 예술작품으로 형상화되어 사람들 눈앞에 재현될 때 새로운 힘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24주년 기념일을 맞는 2004년 5월 18일. 80년 5월을 겪은 이들이 24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넘어 5월 광주를 현재에 되살리는 문화운동은 또 하나의 투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하에 정근식 교수는 한국민주화 운동에서 차지하는 문화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재평가하면서 제주 4·3연구소와 공동연구를 통해 민주화 과정에 있어서의 문화운동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연구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광주와 제주를 오가면서 연구의 방향과 분석틀에 관해 토론했다. 2003년 5월에는 광주에서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연구성과를 점검했으며 이 결과물이 ‘기억투쟁과 문화운동의 전개’라는 연구서로 지난 5월 1일 빛을 봤다.
◆ 기억투쟁으로서의 문화운동 =정교수는 “5월 문화운동은 검열을 의식하면서도 진상규명을 치열하게 지향하였다는 특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5·18의 역사적 무게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은 그 부담에 짓눌려 자유로운 상상력을 접고 사실적 재현에 경도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작풍의 형성과정과 이를 통한 작품이 제대로 수집되지도 못하고 있다”며 “문화운동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제대로 된 자료수집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여줄 수 있는 문화운동자료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도 도청이전과 동시에 만들어지는 5·18 기념관의 내부적 컨텐츠 구축도 예산이 부족하여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문화운동 자료관의 설립은 요원하다”고 안타까워했다. 정근식 교수는 서울대 사회학과 76학번이다. 동시대 지식인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80년 5월의 부채를 삶에 짊어지고 살아왔다고 한다.
“대학원 다닐 때 광주 학살의 소식을 듣고 고통스러워했지만 중심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85년 전남대에 부임한 이후부터 ‘살아남은 자’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기 시작했다고 봐야죠.”
정근식 교수는 1985년 전남대에 부임한 이후 5·18민중항쟁, 영호남 지역감정, 문화도시 육성 등 지역현안을 연구주제로 천착하며 120여편의 논문과 저서를 발표해왔다. 특히 그는 지난 88년 송기숙교수(68·전남대 명예교수)가 금남로 부근에 설립한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에서 일하면서 ‘광주 5월 민중항쟁 사료전집’을 꾸리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현대사사료연구소는 96년 재정난으로 전남대 5·18연구소로 업무를 이관했다.이후 정근식 교수는 2000년부터 지금까지 5·18 연구소가 발간하는 잡지 ‘민주주의와 인권’의 편집위원장을 맡아오고 있다.
“5월이 연구주제로서 점차 인기를 잃어가자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해나갈 연구원들이 부족하다는 것이 저의 고민입니다.”
정근식 교수는 지난해 7월 서울대로 자리를 옮기면서도 5월 광주에 대한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박정미 기자 pj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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