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우리 동네 떠날 수 없어요”

대검찰청, 매년 선정 올해 179곳 … 서울 도심·화성에도 범죄 ‘제로’

지역내일 2004-07-21 (수정 2004-07-21 오후 12:39:22)
“산만 넘으면 유 모인가 하는 살인마가 살았다는 거 아닙니까. 우리 동네에서 그런 범죄자가 살아서 밤마다 칼을 간다는 생각을 하면…어이구,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이래서 제가 이 동네를 못 떠나요.”
서울시 북아현동 주민 이순종씨(61)씨는 몇 일 전부터 신문과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을 접할 때마다 가슴을 쓸어 내린다. 살인 사건 피의자 유 모씨가 살았던 마포구 노고산동은 이씨 동네에서 신촌쪽으로 산 하나만 넘으면 닿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통장(북아현 3동 4통)으로 있는 동네에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집에 있는 ‘범죄 없는 마을’상장을 다시 한번 어루만져본다.
이씨는 “지난 79년부터 이 동네에 살면서 몇 번 이사가려고 했지만 서울 어디에도 이만큼 안전한 곳이 없다는 생각에 눌러앉았다”며 자신의 결정에 만족했다.
◆‘범죄 없는 마을’= ‘범죄 없는 마을’이란 매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거나 기소유예, 공소보류, 기소중지, 공소권 없음(단, 명백한 무혐의사건은 제외) 등을 결정한 범죄가 1건도 없는 마을을 말한다.
대검찰청은 해마다 4월 25일 ‘법의 날’에 ‘범죄 없는 마을’을 선정하고 있다. 해당지역 경찰서장이 매년 2월말까지 조사를 벌여 선정된 마을을 소속 검찰청에 추천하고, 심사위원회에서 타당성을 조사해 선정한다. 이런 식으로 2003년도에는 188개 마을, 2004년 올해 179개 마을이 선정됐다.
선정된 마을은 광역자치단체장과 검사장 연명으로 된 ‘범죄 없는 마을’이란 간판이 마을에 세워지고, 1000만∼2000만원 상당의 지원금이 지급된다. 이 행사는 지난 78년 제주지방검찰청에서 범죄예방을 위해 지난해 1년 동안 범죄가 일어나지 않은 마을 두 곳을 선정한 다음, 숙원사업을 지원해주었던 것이 계기가 됐다. 1982년부터 대검이 ‘범죄 없는 마을 운동지침’을 제정해 전국에 확대 실시했다.
‘범죄 없는 마을’행사를 총괄하고 있는 김주현 대검 기획과장은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되면 주민들이 잔치를 벌이고, 아이들에게 의미를 설명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며 “주민들은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내년에도 계속 이어갈 것을 다짐하는 등 공동의 목표를 만든다”고 말했다.
◆주민 방범 활발한 ‘북아현동’ = 앞서 설명한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 3동 4통, 5통 일대. 서대문 로터리에서 이화여대 가기 전, 우측에 있는 산 윗동네다. 동네 뒷산인 안산 뒤로는 이화여대와 신촌으로 이어지며, 동네 안에는 추계 예술 대학교가 있다. 도심지인 광화문과 부도심 신촌 가운데 있어 복잡하고 유동 인구가 많다.
그런데도 이 마을 주민들이 112 신고 전화 한 번 안 하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마을 지형과 사회적 배경, 동네 주민들의 노력이 함께 어우러진 결과다.
이순종씨는 우선 마을 뒷산인 안산에 공을 돌린다. 산 아래에서 마을 끝인 안산까지 이어지는 마을 형태가 마치 어머니 ‘자궁’을 닮았다는 것. 이씨는 “악한 사람이라도 차분한 분위기에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이 동네는 지난해 초까지 전통적으로 거물 정치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이씨에 따르면 이만섭 전 국회의장 이기택 전 의원 박태준 전 의원 등 한때 30여명에 달하는 정치인들이 거주했다. 이 때문에 경찰 방범 활동이 다른 동네보다 다소 엄격했다는 기억이다.
하지만 이 동네 주민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 동네가 안전한 것은 주민들의 활발한 자율방범활동 덕도 컸다고 믿는다. 지난해 초에 거물 정치인들이 거짓말처럼 한꺼번에 이사를 가 방범활동이 이전 보다 조금 뜸했고, 갑작스레 늘어난 원룸주택 건설 붐 때문에 좀도둑이 늘었다. 공사장에서는 동네 청소년들이 음주와 흡연을 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고, 심지어는 성범죄까지 발생할 뻔했다.
이 때문에 마을 주민 50여명은 자율 방범대를 조직해 매일 밤 10시부터 새벽까지 5명씩 조를 짜서 마을을 돌았다. 이를 위해서 주민들은 돈을 모아 승합차를 구입했다. 또 전체 방범대원이 한달에 한번씩은 동네 전체를 직접 돌아다니며 방범 활동을 했다.
김용만(54·사진상단) 마을 순찰대장은 “지난해를 돌이켜보면 범죄 없고 안전한 마을을 만드는데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앞으로도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유 모씨 같은 살인마가 우리 동네에는 발붙이지 못하도록 주민 모두가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정’으로 가꿔온 ‘화성’= ‘경기도 화성.’ 반사적으로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떠오르는 곳이다. 한때 이름만으로도 온 국민은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곳으로부터 4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도 서울 북아현동처럼 특이한 마을이 있다. 화성 마도면 송정2리는 23년 동안 단 한 건의 범죄도 없었다. 대검찰청이 해마다 선정하는 ‘범죄 없는 마을’에 단골손님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순박한 마을이지만, 대문이나 울타리가 있는 집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거창한 방범지구대나 순찰차량이 있는 것도 아니다. 범죄가 없는 비법이라면 32가구 주민 126명이 한 가족처럼 사는 게 전부다. 공권력의 빈자리를 사람들 사이의 정으로 채운 것.
송정2리 전갑철(58) 이장은 “주민들이 각 모임별로 매주 세 차례 이상 만나 집안의 시시콜콜한 얘기를 모두 꺼내놓는다”고 마을 운영방식을 설명했다. 큰일이 생기면 마을회의에서 모두 결정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서로 속사정을 훤히 꿰고 있고, 갈등의 소지도 없다. 간혹 동네에 낯선 차량이 나타나면 주민들은 무관심 대신 시신경만 집중한다. 이렇게 시신경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는 동네를 지키는 유일한 방범망이다.
“사람이 다 똑같은 건 아니지만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죽여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고, 잘못하면 감싸주고 사는데 무슨 범죄가 생기겠어요.”
송정2리가 범죄 없는 마을로 소개되자 10년 전부터는 이사 오는 사람도 생겼다. 그렇게 벌써 서울, 경기 등에서 여섯 가구가 이사를 왔다. 5년 전 서울생활을 접었던 강영권(63)씨는 오자마자 동네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간단한 신고식을 치른 강씨는 어느새 한 가족이 돼버렸다고 한다.
강씨는 “저도 한 가족이 되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마을사람들이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 줬다”면서 “최소한 내 이웃이 누구이고 뭘 하는지는 알아야 범죄가 사라질 것 아니냐”며 이웃이 없어져 가는 도시에 따끔한 충고를 보냈다.

/정원택 방국진 김남성 기자 kns1992@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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